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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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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만 되면 '아이고... 국어 파괴하는 꼴을 보면 세종대왕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네'라는 한탄이나 '외래어, 한자어,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고 순우리말을 되찾자'는 외침이 들려온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세종대왕님은 우리가 자유자재로 한글 활용하는 걸 보면 오히려 좋아하실걸? 내가 이렇게 범용으로 쓰일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구나, 하고 흐뭇해 하실 거다'라고 맞받아치거나 '순우리말에 집착하는 이상한 사람들은 한국에만 있어. 한국인 종특(특징)' '순우리말의 순도 이미 한자거든?'라며 비꼬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어떤 글이든지 참새 방앗간 들르듯 나타나서 맞춤법만 지적하고 다녀서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맞춤법 빌런'(맥락 없이 아무 데나 끼어들어 맞춤법 지적만 하고 다니는 잔소리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맞춤법 빌런을 따라다니는 소문도 있다. '맞춤법 빌런은 유독 한국에 많대'라는 소문이다. 이런 소문들은 어디까지 정말일까?  

맞춤법 빌런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대학원생 논문 지도할 때 오직 맞춤법만 지적하는 교수가 흔한 밈(meme)이듯, 맞춤법 잔소리꾼은 어느 문화권에나 있다. 영어에는 구두점 현학자(punctuation pedant), 문법 현학자(grammar pedant)라는 표현이 있다. 댓글마다 틀린 맞춤법, 비문 지적하는 사람이니까, 구두점 쫌생이, 문법 쫌생이 정도의 어감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영국에는 아포스트로피 보호 협회(The Apostrophe Protection Society)라는 단체까지 있었다! 2001년에 이 단체를 설립한 존 리처즈(John Richards)는 은퇴한 언론인으로 아포스트로피(apostrophe)를 잘못 쓰는 무지한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18년간 애쓰다 2019년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아무리 해도 I'm yours를 I'm your's 라고 잘못 쓰고, It's mine을 Its mine 이라고 잘못 쓰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졌다. 야만인들이 이겼다'라고 포기 선언을 했다. 

리처즈는 마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어포스트로피를 제대로 사용하던 과거의 황금 시대가 있었는데 이제 그 좋은 시절이 가버렸다는 뉘앙스로 말한다. 하지만 사실 구두법이나 철자가 정리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그 전에는 사람들이 그냥 되는 대로 적었다.

책 <인포메이션>의 저자 제임스 글릭에 따르면 17세기가 되기 전까지 '영어에서는 단어를 적을 때 미리 정해진 특정 글자를 튀해 써야 한다는 '철자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사람들은 종이에 단어를 적기 위해 펜에 잉크를 묻힐 때마다 무엇이든 적당해 보이는 철자를 새로 골라 썼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The Cambridge Encyclopedia of the English Language에 따르면, 18세기에 아포스트로피의 용법이 표준화되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아포스트로피의 표준 사용법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 인류 역사상 가장 통일되고 정돈된 맞춤법이 널리 쓰이는 시대일 것이다.

언어순혈주의자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벤또'를 도시락으로,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클럽'을 동아리로, '신입생'을 새내기로 바꾸는 등의 언어 순화 운동은 한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래어로 오염되기 전의 '순우리말'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여러 언어권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순'이 이미 한자 純이라서 시작부터 무리다).

영어에서도 게르만 어원 단어만 쓰자는 운동이 있었다(프랑스어에서 거의 80%의 어휘가 왔기 때문에 사실 무리다). 영국 지식인들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에서 빌려온 단어들을 많이 쓰는 세태에 대한 한탄이 16세기에 이미 나온다.

로버트 코드리라는 영국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먼 곳에서 온 이국적인 단어를 찾느라 어머니가 쓰던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만약 이들의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아들이 하는 말을 쓰지 못하거나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정통 영어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프랑스어에서도 언어 순혈주의 경향이 심해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상표나 학술용어도 프랑스식 표현을 고집한다(DNA를 곧 죽어도 ADN라고 쓴다). 근대국민국가를 세우면서 통일된 언어로 민족감정을 고취시키려는 나라에서는 대개 이런 순화 운동이 있었다.

언어 순화 운동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존재한다. 고유어를 적극적으로 보존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점점 줄어가는 마오리어에서는 신조어를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다가는 단어의 대부분이 영어에서 온 외래어가 되어버릴 위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조어를 마오리어로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예를 들어 콘돔에 해당하는 단어를 만들기 위해 오래 전에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마오리어 단어를 발굴했다.

pūkoro는 뱀장어를 잡기 위해 쓰이던 전통적인 낚시 도구의 이름이다. 뱀장어가 그 안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면 포획할 수 있는, 한쪽이 막힌 기다란 통이다. 콘돔이라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쓰는 대신에 이 단어를 되살려 pūkoro ure를 콘돔에 해당하는 마오리어 단어로 쓰고 있다.

한의대 시절, 해부학 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려는 시도 때문에 영어 이름, 한자어식 이름, 순우리말 이름 세 가지를 정신없이 외웠던 기억은 부정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최근에 박물관에 갔다가 어린 시절 '기마인물형토기'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외웠던 문화재가 '말 탄 사람 토기'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을 보고 반가웠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의 순화 운동이 남한보다 더 심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다소 과장된 것이고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도 꽤 된다고 한다. 

'엽전론'은 국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맞춤법과 문법을 정하는 국가 기관이 언어 '꼰대질' 하는 나라는 남한과 북한뿐이래(실제로는 영어 빼고 거의 모든 언어에 공식적인 언어 기관이 있다), 유사역사학 추종자가 설치는 곳은 조선 땅밖에 없을 거야(실제로는 위대한 과거와 세계언어의 기원에 집착하는 유사역사학 추종자는 많은 문화권에 존재한다) 등 '엽전론'은 극단주의자들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자기 비하와 자기 혐오를 위해 현실을 왜곡한다.

그리고 이런 엽전론은 '이렇게 독특하게 잘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국뽕과 동전의 양면이다. 자기 비하는 곧 자아 비대로 튀어오른다. 하지만 맞춤법 빌런, 언어 순혈주의자, 자기 언어가 전세계 언어의 기원이라고 믿는 유사언어학 추종자 등은 나름 '글로벌'한 현상이다. 자기비하를 빼고 담담하게 논리적으로만 대응해도 충분하다.

인포메이션 - 인간과 우주에 담긴 정보의 빅히스토리

제임스 글릭 (지은이), 박래선, 김태훈 (옮긴이), 김상욱 (감수), 동아시아(2017)


태그:#맞춤법빌런, #언어순혈주의자, #한글날, #도시괴담, #유사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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