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토요 휴먼다큐 <사랑의 가족> 화면 캡쳐

KBS 토요 휴먼다큐 <사랑의 가족> 화면 캡쳐 ⓒ KBS

 
살아가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가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칼로 밴 상처는 쉽게 치료가 가능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는 한 번 박히면 빼낼 수도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콕, 콕 찌른다. 깊게 덧난다. 마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처럼. 비록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감정의 골이지만 한 번 그 우울의 늪에 빠지면 몇 날 며칠이 암흑 그 자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글을 짓는 프리랜서 작가의 인생도 희로애락 중에서,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분노와 슬픔이 대부분이다. 10대 시절 누나의 황망했던 교통사고 죽음, 20대 학생운동으로 점철된 분노의 역류, 30대 처연했던 부모님의 돌연사, 40대 홀로 버려진 백수 작가의 우울 등이다. 정말 삶이 이래도 되는 건가.
 
또 있다. 7살 때 가족 소풍 때 강가에서 놀다가 익사해 죽을 뻔한 처절한 기억. 30대 젊은 나이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3일 동안 의식을 잃고 황천길 다녀온 무서운 기억. 40대 최근엔 대장암 3기로 겨우 죽을 고비 넘긴 잔혹한 인생사. 정말 인생이 이래도 된단 말인가.
 
덕분에 결혼은커녕 사랑도 온전히 하질 못했다. 생은 죽음 또 다른 죽음과의 연속이었다. 연애도 드라마나 영화 속 이야기들뿐. 그렇게 기나긴 세월 고독과 진한 사랑을 나누고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를 추앙한다. 감히 나의 잔혹한 불행과 닮은 니체를 추앙한다. 일평생 한 여인을 짝사랑만 하다가 거짓의 신을 죽이고 기꺼이 신의 경지에 오른, 영원불멸의 위버멘쉬(초인)로 오롯이 짜라투스투라로 남은 고독의 달인. 나는 그래서 고통과 불행을 기꺼이 사랑한 니체를 추앙한다.
 
"니체는 어렸을 적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니체는 정신병력과 신경쇠약으로 평생을 고통에 시달렸다. 뇌종양과 병약한 몸으로 환청과 과대망상에 시달렸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다. 그의 책은 생에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극기의 프로메테우스(선지자)였다. 질투를 자인하고, 매우 위험하게 살라고 독촉했다. 베수비오 산기슭에 그대의 집을 지으라고 재촉했다...." <책 니체 평전 중에서>
 
그냥 산다...별 일 없이, 별 볼일 많게
 
지난 2006년을 끝으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거리의 작가로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공무원 생활을 잠깐 하다가 그만두고 그냥 산다. 별 일 없이 산다. 별 볼일만 많아졌다. 산으로 들로 강가로 나가 산책하는 게 일이다. 툭 하면 동네 산을 정복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건강을 다진다. 가끔 도서관 책 무덤에 쌓인다. 책은 유일한 안식처이자 완벽한 연인이다.
 
여자 없인 살아도 TV 없인 못 산다. 텔레비전은 삶의 전부가 된 지 오래다. 특히 EBS교육 방송을 많이 본다. 다큐 프로그램은 단골 메뉴다. 왜 인간극장은 갑자기 사라진 걸까. 인간극장을 대체할 휴먼다큐는 바로 KBS <사랑의 가족>이다. 주로 장애인들의 진솔한 삶과 진정한 사랑을 보여 준다.
 
오늘은 과연 어떤 사랑의 미학을 보여줄까. 이전 방송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주인공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진실한 사랑이야기였다. 우리는 모두가 장애인이이다. 단지 그 시기가 조금 늦어질 뿐. 단지 그것을 회피하고 싶을 뿐. 그래서 더욱 지금을, 오늘을 사랑해야 한다. 내일도 없고 미래는 없다. 그래서 더욱 지금의 사랑, 오늘의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오직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 사랑의 위대함으로
 
"미숙아로 태어나 생후 백일에 뇌 병변 장애 판정을 받은 이윤정(50)씨. 왼발만 간신히 사용할 수 있는 최고단계 중증 장애로,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화가의 꿈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붓 하나 사기 힘든 형편에도 윤정 씨는 꿋꿋하게 왼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미술대전 입상과 전시회를 거쳐 구족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던 윤정 씨의 삶에 송욱 씨가 들어왔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경증 시각장애와 안면마비를 갖게 된 송욱(50세) 씨는 윤정 씨를 정성으로 보듬어 주었고, 활동지원사로 매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 두 사람. 하지만 불규칙한 생활을 계속 해 온 탓인지 눈에 이상이 생긴 송욱씨, 윤정씨는 그런 송욱씨가 걱정인데... 무지갯빛 사랑을 원동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 있다는 두 사람. 기꺼이 서로의 눈과 손발이 되어, 함께 걸어가고 있는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는 데...."<KBS 사랑의 가족 중에서>"

 
오늘 방송도 그랬다. 왜 사랑이 위대한지. 왜 사랑의 힘이 이렇게 절실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시각장애인 남자와 뇌 병변 장애 여자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남자는 두 눈을 뜨지 못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뿌연 안갯속의 거리를 걷고 움직인다. 단지 오가는 자가 활동만 가능할 뿐. 그것뿐이다. 아니 단지 그것 뿐이기에 헌신적인 사랑만 오롯이 보여줄 수 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단지 그것 뿐이기에.
 
여자는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밥도 혼자 못 먹고 씻을 수도 없다.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지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작은 왼쪽 발. 그러나 놀라운 건 그녀가 구족화가라는 것.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 유명화가의 그림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완벽하지 못한 신체를 가진 그녀의 아주 완벽한 그림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온통 사랑의 힘이 겹쳐있다. 그림 속에는 그녀만의 절절한 애틋함이 포개졌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위대한 작가반열에 오른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그렇게 우연히, 필연적으로 만났다. 그녀의 전시회에서. 그 남자는 그녀의 그림에 반했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열정에 반했다. 활동보조인에서 남자친구로, 남자친구에서 평생의 동반자로. 열정에서 헌신으로. 그런 게 사랑이다. 진짜 사랑. 사랑 그대로의 사랑 말이다.
 
둘은 한 몸으로 움직인다. 매일 매일 매 순간 한 몸이다. 어디를 가나 어디에 있든 그 남자는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두 눈이 되어준다. 달팽이가 무거운 집을 느릿느릿 옮겨가듯.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달팽이의 사랑처럼.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듯. 그렇게 오롯이 완벽하게!
 
달팽이의 사랑 – 시인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 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사랑의가족 KBS 휴먼다큐 달팽이 사랑법 구족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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