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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게에서 쓰던 음료 보관용 냉장고가 고장 났다. 내부 온도가 슬금슬금 오르더니 어느 순간부터 냉각팬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2도였던 내부 온도가 순식간에 17도까지 올랐다. 급하게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다른 냉장고로 옮겼다. 정수기에 붙여 놓은 수리 기사님의 명함을 찾아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다. 업소라 여러모로 급한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리니 다행히 그날 저녁에 시간이 있단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기사님이 찾아왔다. 그는 인사차 드린 녹차도 들지 않은 채 냉장고 위아래를 전부 뜯어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냉장고 안쪽에 머리를 넣고 훑어보기 시작하다 '아!' 소리와 함께 쇠로 된 어딘가를 드라이버로 깡깡 건드렸다. 원인을 찾은 듯했다. 냉장고에서 머리를 뺀 그가 몸을 일으켜 내게 말했다.

"예상대로네요. 냉매 관이 새요. 며칠 전부터 물이 뚝뚝 떨어지고 그러지 않았어요?"

기사님의 말대로 며칠 전부터 냉장고가 위치한 복도 바닥이 흥건해서 자주 청소를 했다. 이미 그때부터 냉장고에 문제가 있던 것이다.

염분, 냉장고의 가장 큰 적
 
염분 자체가 냉장고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염분 자체가 냉장고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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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냉매가스가 아래에서 위로 순환하며 열을 빼앗도록 설계되어 있다. 순환하는 길 중간에 냉매가스를 액화시키는 응축기가 있는데, 여기를 거치면서 기존의 열이 방출되고 가스가 액화된다. 액화된 냉매는 다시 냉장고 상부의 증발기를 통해 기화되며 내부의 온도를 낮춘다. 고장이 난 곳은 냉장고의 상부. 즉, 증발기가 있는 지점이었다. 그는 관이 부식된 이유가 염분 때문이라 했다.

"염분이요?"
"지금 냉장고에 보관 중인 밑반찬 있잖아요. 여기 있는 염분이 공기를 타고 대류 하면서 냉장고 냉각팬 안쪽으로 들어오거든요? 그럼 그 염분들이 증발기 주변의 관들을 부식시켜요. 이 부분에서 액체인 냉매가 기체로 바뀌면서 온도가 내려가는데, 이게 다 새 버리니 시원할 리가 없죠."


그는 바닷바람이 자동차나 철 구조물을 부식시키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다. 그럼 모든 냉장고는 다 이렇게 고장이 나냐고 묻자, 기종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노후화의 원인은 대부분 그렇다고 했다. "본래 냉장고란 신선식품이나 음료수를 차갑게 하는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할 말이 없었다. 고장 난 냉장고가 사실 음료 보관용이었으니까. 공간이 부족해 직원들이 식사시간 때 먹는 밑반찬을 같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게 냉장고의 수명을 깎아먹은 것이다.

기사님은 가정집 냉장고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니 염장식품은 되도록 두지 않는 게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업소에서 쓰는 음료 보관용 냉장고처럼 냉매관이 직접 노출된 구조는 아니지만 염분 자체가 냉장고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면 반찬통을 랩으로 싸 놓거나 김치냉장고에 따로 보관하는 게 냉장고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결국 고장 난 냉장고는 쓸 수 없게 됐다.

애초에 중고품을 구매한 것이라 크게 손해 본 건 없었지만, 기사님의 말을 듣고 나니 우리 집 냉장고 상태가 문득 걱정됐다. 김장 때 처가에서 받은 배추김치와 무말랭이, 본가에서 받은 파김치가 아직도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여러 날 먹으려고 만들어 놓은 내 장조림도. 염분을 최대한 줄인답시고 싱겁게 만들었지만 맛이 너무 비어서 간장을 더 넣고 끓인 기억도 죄책감처럼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우리 집 냉장고의 수명은 얼마쯤 될까. 아니, 그전에 내 수명은? 냉장고의 수명을 떠나서 염장식품을 가득 쟁여둔 건 분명 건강한 식습관은 아니었다.

나와 냉장고, 건강이 얽힌 운명 공동체
 
시계방향으로 올리브절임, 무말랭이, 무김치, 김장김치, 케일장아찌, 쌈장. 줄인 게 아직 이 정도다.
 시계방향으로 올리브절임, 무말랭이, 무김치, 김장김치, 케일장아찌, 쌈장. 줄인 게 아직 이 정도다.
ⓒ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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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염장식품은 냉장고가 없던 시대의 유산이다. 냉장 시설이 마땅치 않으니 식자재를 절이지 않으면 전부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단순히 보존 그 자체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농업기술이 빈약하던 시절에는 일정한 분량의 식량을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저장은 곧 생존이었다. 쟁여놓지 않고 다 소비했다가 다음 해 기근이라도 닥치면 몰살당할 수 있었다. 아시아의 젓갈과 유럽의 햄은 그렇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보존기간을 더 늘리기 위해 서늘한 토굴에 염장한 식자재를 저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인류는 수 천 년을 살아냈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온실재배와 냉장고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인류는 매일 싱싱한 식자재를 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염장식품들은 여전히 우리의 식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 번 해 놓으면 조리과정 없이 꺼내 먹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맛있다. 21세기에도 냉장고를 토굴처럼 쓰는 문화가 남아있는 이유다. 차이가 있다면 토굴과는 달리 냉장고는 고장이 날 수 있다. 고장이 나면 사람을 불러야 하고, 결국 수리비는 내 수입에서 나간다.
 
나와 아내, 그리고 냉장고의 수명을 위해 조금씩 염장식품을 퇴출시키려 노력중이다. 결코 쉽진 않다.
 나와 아내, 그리고 냉장고의 수명을 위해 조금씩 염장식품을 퇴출시키려 노력중이다. 결코 쉽진 않다.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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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서 메모장에 적은 식단표를 다시 살펴봤다. 이번 달 새로 만들 메뉴들 중 달래장, (결국 익은 김치가 될) 겉절이 같은 밑반찬들이 눈에 띄었다. 목록에 있는 밑반찬 수를 줄이고 그 자리를 나물무침과 토마토 샐러드로 바꿔 적었다. 가열찬 각오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생겼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갈 텐데 감당할 수 있을까?'

막상 해보니 그리 어렵진 않았다. 끓는 물에 나물을 살짝 담갔다 뺀 뒤 몇 가지 양념을 더해서 무치면 끝이었다(부디 손질이 간편한 나물들을 사길 권한다). SNS 피드에 올리려고 이탈리안 요리들을 낑낑대며 만들었던 정성의 10분의 일이면 충분했다. 무엇보다 냉장고를 더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가장 바람직한 것들은 늘 명쾌하다.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이 건강한 삶이듯이. 냉장고 사용법 역시 그렇다. 염장식품 대신 신선한 채소를 자주 조리해 먹는 것이 나와 냉장고의 수명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결국 내가 건강하려면 냉장고 속이 건강해야 한다.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인과관계가 되는 것. 우린 그걸 운명공동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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