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8 17:57최종 업데이트 22.05.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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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학살 책임이 미국에도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아직 덜 알려진 것이 있다. 일본 역시 책임이 크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 당일에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 18일 이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이날 장면 내각은 총사퇴했고, 최고회의는 정부 권력을 넘겨받았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이 최고회의 같은 비상정부를 세우는 데 걸린 시간은 5개월 반이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5·18 광주항쟁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이다. 국보위 기구가 구성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12·12 쿠데타가 5개월 반 뒤의 국보위 설치로 곧바로 직결된 것도 아니었다. 10·26 사태를 계기로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들에 발포돼 있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5·17 쿠데타를 거친 뒤에야 국보위 설치로 이어졌다. 두 차례 쿠데타를 거쳐 5개월 반 만에 비상정부 수립에 도달했던 것이다.

여타의 쿠데타 사례들과 비교할 때, 12·12 이후에 전두환 신군부가 행정부를 상대로 행사한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이로 인한 조급증이 5·18 광주학살의 잔혹성을 배가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군부의 행정적 권력이 그처럼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5·17 쿠데타의 법적 수단이 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관철하려면 이를 합리화할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런 명분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전두환에게 결정적 조력을 제공한 쪽이 바로 일본이다.
  

5·17 쿠데타는 다음날부터 자행된 5·18 학살의 원인이 됐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고무된 전두환

신군부가 두 번째 쿠데타인 5·17 쿠데타를 감행한 명분은 크게 두 가지다. 신군부가 제시한 쿠데타 명분은 최규하 정부가 공표한 '비상계엄 제안 이유'에 나타난다. 5월 18일 자 <조선일보> 톱기사는 제안 이유를 이렇게 보도했다.
 
제안 이유: 1979년 10월 27일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는 바. 현재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 하에 있다고 판단되므로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 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하려는 것임.
 
5·17 쿠데타의 핵심 명분인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중에서 전두환 측에 훨씬 더 힘이 된 것은 전자였다. 이 점은 전두환·노태우 등에 대한 사법절차가 진행될 때인 1996년 1월 23일 언론에 공개된 검찰 공소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공소장은 5·18 당시 국방장관인 주영복에 관한 부분에서 "계엄법상 비상계엄 선포가 가능한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과 적의 포위 공격'이라는 상황이 발생한 사실이 없음에도, 단순히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 하에 있다고 판단되어 계엄확대 선포한다고 제안 설명을 한 후 반대 토론 없이 8분 만에 (국무회의에서) 의결"시킨 혐의를 적시했다.

남침 가능성이 없는데도 그런 가능성을 명분으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관철했다는 것이다.

공소장에도 언급됐듯이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려면 외부의 침공 가능성이 필요했다. 학생 시위로 인한 전국적 소요 사태만으로는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놓기가 힘들었다. 그런 신군부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 쪽이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줌으로써 전두환의 제2차 쿠데타에 힘을 실어줬다.

전두환은 북한 위협론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 따르면 그는 10·26 이후에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과 미군의 총격전이 발생하고 북한 특공대가 노태우 9사단장의 관할 구역에 침투해 국군과 충돌한 사실을 포함해 4건의 무장 충돌에 관한 보고를 받은 바 있다.

그런데도 그는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난 12월 12일 전방의 9사단 병력을 서울로 빼내 쿠데타에 동원했다. 남북간의 소규모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을 것이며 국군 상당수가 전방 병력을 비워도 북한이 남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북한 남침설을 근거로 5·17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의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은 한반도에 대한 현상유지정책을 추구했다. 민주화 열기로 인해 군사정권이 몰락하면 한·미·일 협력체제가 금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두환을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래서 북한 남침설을 제공해 전두환과 신군부의 존재 이유에 힘을 실어줬던 것이다. 

1980년 상반기에 보도된 언론 기사들을 살펴보면, 일본 측이 한반도 안보를 유난히 자주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1월 10일 자 <경향신문> '북괴는 뭔가 바쁘다'에는 "일본 산께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10·26 직후 휴전선 부근에 북괴의 병력 이동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는 내용이 실렸다.

1월 16일 자 <동아일보> 1면 좌단에는 일본 언론인이 1월 8일 한국 정부 당국자를 만나 '12·12 직후에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대북 송유관을 폐쇄할 준비를 했다'는 첩보를 전달한 사실을 보도했다. 중국이 그런 조치를 취해야 했을 만큼 남침이 현실화됐다는 첩보가 일본 언론인을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됐던 것이다.

일본 방위청은 한술 더 떴다. 한일연합군사훈련 가능성까지 띄웠다. 2월 11일 자 <경향신문> 1면 좌중단은 "일본 방위청은 일본 자위대가 한국군과 공동으로 군사훈련을 갖는 것이 법률상 허용될 수 있다고 밝혀 크게 주목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미국에 더해 일본까지 한국군과 군사훈련을 해야 할 정도로 북한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위기감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1979년 12월에는 외무성 북동아과장이 주일중국대사관 무관의 말을 근거로 '1980년 1월 내에 북한이 침공한다'라는 제보를 했다.

1980년 1월에는 정보기관인 내각조사실이 중국대사관 직원의 말을 근거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사주하고 있다'라고 제보했다. 같은 달에 공안조사처는 중국 신화통신 기자의 말을 근거로 '1980년 5월에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제보헸다. 5·17 쿠데타 7일 전인 1980년 5월 10일에는 내각조사실이 중국 정부의 말을 근거로 '1980년 5월 15일과 20일 사이에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제보했다. 이런 정보 제공은 이 외에도 여럿 있었다.

5월 15일과 20일 사이에 남침이 있을 것이라는 첩보는 전두환을 고무시켰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는 회고록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김영선 중앙정보부 제2차장으로부터 첩보를 보고받은 직후의 느낌을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 이렇게 술회했다(관련기사: "온몸에 전율 느꼈다"는 전두환의 거짓 연기 http://omn.kr/1t6qh).
 
보고를 받고 김 차장을 돌려보내자 온몸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불안해지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려하던 위협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대규모 정규전은 아니더라도, 북한의 특수8군단이 투입돼 비정규전이 벌어진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의 시위 정국을 악용해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정도로 당시 시위 상황은 심각했다. 더구나 5월 15일부터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는 구체적 날짜까지 명기된 첩보여서, 북한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정부가 제공해준 북한 남침설은 위의 계엄확대 조치 제안 이유에도 언급된 것처럼 전두환이 5·17 쿠데타를 일으키는 결정적 명분이 됐다.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학생 시위도 빌미가 될 수 있었지만, 학생들과 싸우겠다는 명분을 맨 앞에 내세우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에게 그럴싸한 명분이 된 것은 일본 정부가 제공해준 김일성 남침설이었다.

일본의 제보가 전두환의 결정에 구체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그의 검찰 진술에서 나타났다. 1996년 4월 23일 자 <경향신문> 5면에 따르면, 전두환은 김상희 검사 앞에서 "당시 본인이 아는 것은 79년 12월, 80년 5월 1일(10일을 잘못 말한 듯) 내각조사실의 첩보뿐"이라며 "이 첩보에 따라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학봉과 권정달에 입안을 지시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일본의 제보가 5·17 쿠데타에 결정적이었음이 전두환의 입으로 증명된 것이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을 악수로 환송하고 있다(1980. 8.). ⓒ 국가기록원

 
최규하 무시하고 전두환만 만나

5·17 쿠데타는 다음날부터 자행된 5·18 학살의 원인이 됐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제공한 부실한 정보에 따라 5·17 쿠데타가 일어났고 전두환이 이를 빌미로 광주에서 만행을 자행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역시 책임이 있는 이유다.

5·18과 일본의 관련성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전두환이 국제적 비판을 받던 5·18 학살 기간 중에도 일본은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줬다.

광주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1980년 5월  21일,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파견한 특명전권대사인 마에다 도시카츠는 최규하 대통령은 만나지 않고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만 만났다.

식민지배 사과·배상을 경제협력으로 퉁치는 김종필·오히라 각서로도 유명했던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그런 식으로 전두환을 도운 것이다. 일본이 5·18 앞에서 몸을 숙여야 하는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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