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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7.2원 오른 달러당 1282.5원으로 출발하며 장중 연고점을 경신했다.
 12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7.2원 오른 달러당 1282.5원으로 출발하며 장중 연고점을 경신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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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가로등이 꺼졌고, 냉장고 등 가전제품은 가동을 멈췄다. '유물'이 되어가던 물레방아가 되살아났고 어민들도 동력을 쓰는 대신 돛을 달고 고기잡이에 나섰다. 지난 1979~1980년, 2차 석유 파동의 여파가 한국을 덮쳤을 당시의 이야기다.

오르지 않는 걸 찾아보기 힘들던 시대였다. 석유 가격과 전기 요금을 포함한 시중의 모든 물가가 급등했다. 그런데도 경제는 역성장했다. 실업률도 7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민들은 살인적인 물가를 견뎌내기 위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불황 속 물가 상승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경제 전문가들은 당시를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을 합친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40년 전 악몽이 최근 국내외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국내외 증시의 속절없는 추락과 함께 '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커지고 있다. 투자자들의 단순한 걱정만도 아니다. 지난 11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높은 물가를 지적하며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산업 경쟁력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투자자들의 우려대로 현재 세계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일까.

70년대 석유 파동과 현재, 무엇이 닮았나

실제 최근 물가 상황을 보면 안 오르는 게 없다. 지난달 25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에 따르면 밀가루와 식용유·사이다·콜라 등 생필품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0% 넘게 올랐다. 휘발유와 경유 가격도 2000원대에 육박하는 등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다. 물가 상승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8.3% 상승했다.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던 전달(8.5%)보단 줄었지만  물가가 곧 안정되리라 보기 어려운 수치다.

물가를 잡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은 속속 금리 인상에 나섰다. 미국은 금리를 0.5%p 올리는 '빅스텝'을 이미 한 차례 단행했지만 앞으로 두 번 더 같은 방식의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한미 금리역전이 우려되는 만큼 한국은행 역시 추가 인상이 불가피하다. 이런 가운데 올해 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줄줄이 낮아지고 있다. 지난달 19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국내총생산(GDP)을 3.6%로 예측했다. 지난 1월의 전망치였던 4.4%보다 0.8%p 줄었다.

고유가와 고물가, 저성장은 40년 전 석유파동의 세 가지 핵심 요소였다. 물가상승을 수요가 아닌 공급이 이끌고 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실제 지난 1차 석유 파동만으로 좁혀놓고 보면, 1973년부터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전 세계 석유 수출을 5%씩 줄여나갔다. 1974년이 되자 원유 가격은 전년 대비 4배 가까이 오른 12달러까지 폭등했다.
 
<동아일보>는 지난 1979년 7월 17일 석유 파동으로 국민들이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각종 전자제품 사용을 줄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지난 1979년 7월 17일 석유 파동으로 국민들이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각종 전자제품 사용을 줄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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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폭등은 국내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당시 물가를 통제하고 있던 박정희 정부는 1973년 12월을 기점으로 석유류 가격을 30%, 전기 요금을 5% 가량 인상했다. 그 여파로 공산품 가격과 대중교통 요금이 크게 올랐다. 국민들은 석유를 사기 위해 석유통을 들고 주유소를 찾아 몇 미터씩 줄을 서는가 하면 생필품 값이 오를 것을 대비해 미리 화장지, 비누 등을 사재기 했다.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공휴일 승용차 운행을 금지시켰다. 

1·2차 석유파동으로 전 세계에 유례 없는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폴 볼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물가와 전쟁을 벌이며 기준금리를 약 20%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경제성장률은 거꾸로 갔다. 서구권 국가들은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 역시 성장세가 꺾였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닮은꼴을 그리면서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전문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가상자산 투자로 유명한 마이크 노보그라츠 갤럭시 디지털 최고경영자는 지난 6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현재를 "스태그플레이션 과정에 있다"며 "인플레이션이 높아질 대로 높아지면 경기침체를 겪어야만 인플레이션을 멈출 수 있다"고 말했다. 

앤-마리 굴드-울프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 대행 역시 지난달 26일 "(아시아 국가들이) 성장률 전망치는 낮아지고 인플레 전망치는 높아지며 아시아가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에 직면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70년대 오일쇼크와 다른 점들
 
주유소 전경
 주유소 전경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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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과 현재는 닮아 있지만 '판박이'는 아니다. 이번 고물가-저성장 사태의 기저 원인을 들여다보면 과거 석유파동 당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가 인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세계 각국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나서면서 원유 수급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3월부터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수입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일본 등 G7은 최근 러시아로부터 석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거나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러시아는 세계 2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전 세계 석유 수출량의 11%를 담당하고 있다. 공급 감소 때문에 유가와 물가가 동시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40여년 전, 세계를 10여년 간의 침체기로 밀어넣은 석유 파동의 주체는 OPEC이었다. 게다가 OPEC이 세계 석유 공급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0%로 막대한 수준이었다. 물론 최근 러시아는 유럽 일부 국가에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면서 서방 제재에 보복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전체 수출 중 원유와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가깝다. 수출 중단은 러시아에도 큰 손해다. 러시아가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벌인 에너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각국은 이미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체질 개선에 나섰다. 러시아에 41%의 천연가스 수입을 의존하고 있던 EU는 올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량의 3분의 2를 줄이겠다며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초 127달러까지 치솟았던 국제유가의 벤치마크, 브렌트유는 12일 현재 107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90달러대를 기록했던 올 초보단 여전히 높지만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의 정도도 아직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를 기록했던 1970~1980년대 만큼 높지 않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내외 물가 여건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 대외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당분간 물가 상방 압력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통상적 의미의 스태그플레이션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금리 수준도 아직 여유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각국 정부가 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전례없는 부채가 쌓이고 물가 또한 상승했지만 미국 기준금리는 여전히 1.00% 수준이다. 국내 기준금리도 1.50%다. 당시 금리는 20%에 육박했다. 또 세계 경제는 그 '폭'이 줄었을 뿐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과거의 '역성장'과도 차이가 있는 셈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세계 경기가 침체 국면에 들어선 건 맞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스태그플레이션과는 다르다"며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엔 인플레이션율이 20%대에 육박했던 데다 경제가 역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경기가 침체돼도 한국과 미국 모두 앞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 같지 않다"며 "다만 높은 물가상승 국면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물가 상승은 억제되겠지만 경기침체가 우려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영익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1분기 미국 GDP의 역성장을 볼 때 현재 세계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문제는 지금보다 상황이 악화될 것인지 여부인데 물가는 잡힐 걸로 보인다. 현재 주식·채권 시장의 거품이 붕괴되고 있고 곧 부동산 시장 거품까지 빠질 것이기 때문"이라며 "오히려 내년부터 세계는 디플레이션을 걱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그:#스태그플레이션, #인플레이션, #금리인상, #기준금리,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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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류승연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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