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3 05:54최종 업데이트 22.05.13 05:54
  • 본문듣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돼 있다. ⓒ 연합뉴스 [공동취재]

 
작년 11월 23일 전두환 사망을 계기로 주춤해지기는 했지만, 세상은 전두환을 향해 '왜 참회하지 않느냐?'고 외쳤다. 이 외침에 대해 살아생전의 전두환은 '이거 왜 이래?' 정도의 메시지밖에 내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유족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발산되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다. '유해를 최전방에 묻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그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사망 당일부터 언론에 보도됐다. 그날 서울 연희동 전두환 자택 앞에서 처조카인 이용택 전 국회의원이 했던 발언도 언론에 보도됐다. 이용택 전 의원은 "생전에 국립묘지에는 안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며 "옛날에 나한테도 고향 선영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말한 뒤 "그런데 오늘은 고향에도 안 가고 화장을 해서 휴전선 가까운 쪽에 안장을 했으면 한다고 했다"라고 취재진에게 밝혔다.

전두환 최전방에 묻고 싶다는 유족

전두환의 유골은 11월 27일 화장 뒤 연희동 집에 안치됐다. 그 뒤 '장지를 못 구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전두환이 회고록을 통해 최전방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코로나 확산 우려와 날씨 문제로 인해 장지를 물색하지 못했다는 보도가 지난겨울에 있었다. 일례로, 2월 20일자 <파이낸셜뉴스> 기사 '장지 못 구한 전두환 전 대통령 가족... 유해 두 달 넘게 자택 안치'를 들 수 있다.
 

12일 오전 5시경에 캡처한 구글 화면. ⓒ 구글 뉴스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부인 이순자씨가 참석한 뒤에는 관련 보도가 부쩍 많아졌다. 12일 오전 5시경에는 이에 관한 조·중·동 세 신문의 보도가 포털 화면에 나란히 뜨기도 했다.
   
<조선일보> 기사 제목은 "전두환 유해, 6개월째 연희동 자택에 안치 중이라는데"이고, <중앙일보> 제목은 "전두환 유해 6개월째 연희동 자택에.. '장지 못 구했다'"이고, <동아일보>는 "장지 못 구한 전두환 유해... 반년째 연희동 안치"다. 단어의 배열순서만 다를 뿐, '전두환', '유해', '연희동 자택'. '6개월째'라는 단어는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11일 발행된 위 <조선일보> 기사는 전두환 최측근인 민정기 전 대통령공보비서관이 언론매체들과의 통화에서 "장지를 구하지 못했다"고 말한 사실을 보도했다. 이순자 측이 민정기 전 비서관을 창구로 내세워 장지 문제에 관한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휴전선 근방에 전두환 장지를 조성하는 데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고자 그런 방식의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자 측은 <전두환 회고록>을 근거로 전두환이 통일의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휴전선 부근에 안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휴전선 부근에 안치되는 것이 전두환의 '사실상의 유언'이라는 것이다. 작년 11월 23일자 <국민일보> "전두환 회고록에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파' 유언"은 회고록에 적힌 해당 부분을 '사실상의 유서'로 볼 수 있다는 민정기 비서관의 언급을 내보냈다.

사실상의 유언? 회고록 보니

<전두환 회고록> 제3권 끝부분에 '글을 마치며'라는 부분이 있다. 2페이지 반 분량인 이 부분에서 전두환이 중점적으로 언급한 것은 5·18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지내놓고 돌아보니 조국이 걸어온 길도 그랬고, 나의 삶도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말한 그는 "나라의 처지가 어렵고 세월이 힘겨웠던 만큼 위기를 수습하고 국정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떠맡은 나의 일하는 방식이 거칠었던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런 식의 서술을 이어가던 그는 "나는 오직 역사적 진실이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나는 그러한 진실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일하는 방식이 거칠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역사에 죄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다.

그런 다음, "이제 육신은 시들고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며 자신의 생애가 다 끝나간다고 서술하다가 장지 문제로 비칠 만한 발언을 아래와 같이 했다.
 
"문득 내 가슴속에 평생을 지녀온 염원과 작은 소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저 반민족·반역사적·반문명적 집단인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감격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날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 건강한 눈으로 맑은 정신으로 통일을 이룬 빛나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
 
일하는 방식이 거칠었다, 역사의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등등의 말로 세상이 다 아는 학살 범죄를 감추려 했다. 그런 다음, '전방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을 한 직후에 통일의 염원을 운운했던 것이다.

전두환 집권기의 실상

이전 시기에 비해 전두환 집권기인 1980~1988년에 남북간 긴장이 다소 이완됐던 것은 사실이다. 전두환이 북한을 향해 다가서는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5·18 학살 직후라 나라가 어지러울 때인 1981년 1월 12일 있었던 신년 국정연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연설에서 그는 김일성을 주석으로 지칭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김일성 주석이 아무런 부담과 조건 없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초청한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평화통일 주도 내외에 천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전두환의 대북 제의는 평화통일의 의지로 언론에 선전됐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장악한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두환 측이 자신들을 평화통일 의지와 연관시키고 싶어 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의 평화통일 의지가 가식에 불과했다는 점은 민간 통일운동을 극도로 탄압한 사실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정부의 힘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정권은 민간 통일운동 진영과 협력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전두환 시기에 통일운동이 억압을 받은 사실은 전두환이 통일과 거리가 멀었음을 증명한다.

민간의 통일 논의를 억제하고 정부 차원에서 창구를 단일화 하고자 통일운동을 억압했다고 말하는 것도 변명에 불과하다. 통일을 소중히 여긴다면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소중히 여기게 될 수밖에 없다.

전두환 집권기인 1985년 7월 18일 대검찰청 공안부가 전국학생총연합 삼민투쟁위원회 학생 63명을 검거하고 56명을 구속하고 조사한 것에 대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검찰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전면 수사를 벌였다'고 발언했다. '삼민투위 학생 56명 구속'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날짜 <동아일보> 기사에서 그 발언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운동을 국가안보의 적으로 대하는 전두환 정권의 정서를 반영하는 발언이었다.

전두환 시기에 통일운동이 핍박을 받았다는 점은 문익환·백기완 두 인물이 통일운동권에서 크게 부각된 사실로도 반증된다. 전두환의 폭압에 맞서 통일운동권을 지켜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두 인물을 크게 부각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1986년 10월 14일 신민당 소속인 유성환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전두환이 통일의 염원을 갖고 있었다면, 바로 다음날 서울지검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전두환의 뜻을 마치 복사기처럼 그대로 집행하던 당시 검찰이 현역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그처럼 신속히 청구한 것은 '청와대의 뜻'이 아니고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와 아들 전재국 씨가 10일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전두환이 남긴 가장 큰 흔적

<삼국유사> 기이 편은 왜병을 진압하려는 열의를 가졌던 신라 문무왕의 유골이 대왕암에 보관돼 있다고 말한다. 일본군을 막고자 하는 문무왕의 의지가 대왕암을 통해 반영됐던 것이다.

전두환과 관련해서는 이런 흔적을 남길 이유가 없다. 남북통일에 대한 그의 유지를 받들어 최전방에 유골을 안치하겠다는 것은 그가 통일운동을 탄압한 사실과 명백히 배치된다.

전두환이 남긴 가장 큰 흔적은 5·18 학살이다. 굳이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면 학살을 참회하고 반성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라도 이순자 측은 "왜 참회하지 않느냐?"라는 외침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답은 내놓지 않고 '남편을 휴전선 근처에 묻어줄 수 있겠는지'를 탐색하는 것은 파렴치한 동문서답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