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6 05:54최종 업데이트 22.05.16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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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지금 자리가 없어요."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린 난민센터. 시리아 난민이 임시 거처를 찾지만 자리가 없다. 그때 우크라이나 난민이 환영을 받으며 들어간다. 어색해지는 공기.


"아쉽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 난민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들은 푸틴의 포격으로부터 도망쳐 왔거든요."

센터를 찾아온 중년 백인 남성이 '젊고, 예쁘고, 날씬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집과 침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난민을 위한 친절한 연대에 감동 받는 (백인) 봉사자들.

인종주의를 지적하자 자원봉사자들은 펄쩍 뛰며 항변한다.

"인종주의라뇨! 우리는 여기 우크라이나 난민과의 연대가 가장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문화적으로 가깝기도 하고요. 그들은 우리와 같아요. 기독교인이죠."

시리아 난민도 기독교인이라고 하자 다시 "지리적 근접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때 우크라이나에서 공부하던 흑인 교환학생이 나타나고, 방금 도착했던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이 센터를 떠난다.

"이제 자리 있는 거죠?"

자원봉사자들은 한참을 눈치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한다.

"독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최근 독일 공영방송 온라인 채널 풍크가 공개한 3분짜리 풍자영상 '좋은 난민, 나쁜 난민'의 장면들이다.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연대에서 보이는 독일의 '이중 잣대'에 대한 풍자다. 
 

독일 난민 인식을 풍자하는 '좋은 난민, 나쁜 난민' 한 장면 캡쳐. 궁지에 몰린(?) 자원봉사자가 마지못해 비유럽 난민을 환영하고 있다. ⓒ Funk/Browser ballett

 
독일,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지원 '총력'

61만 명.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금까지 독일로 피난 온 난민의 수다. 그 중 80%는 여성, 40%는 아이들이다. 이는 공식 접수된 수치로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독일 정부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펼치는 중이다. 독일의 시스템 전체가 움직인다. 독일이 이렇게 빨랐던 적을 본 적이 없다.

난민 지원은 독일 밖에서부터 시작됐다. 전쟁 발발 직후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오는 기차를 특별 운행했다. 우크라이나 신분증이나 여권이 티켓을 대신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기차. 1천여 명의 환영 인파가 중앙역을 메웠다. 난민들을 위한 빈 방이 있다는 피켓을 든 시민들도 많았다. 베를린 중앙역 곳곳에 우크라이나 국기와 우크라이나어 안내문이 붙었다. 이들은 난민 환영(접수)센터에서 등록을 하고 임시 숙소로 향했다.
  

독일 베를린 중앙역 곳곳에 붙어있는 우크라이나어 안내 문구 ⓒ 이유진

 
우크라이나 난민의 의식주와 심리적 지원을 위한 센터가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난민을 위한 물품 기부는 물량이 넘쳐 자제를 요청하는 공지가 떴다. 우크라이나 신분증은 지금도 독일 대중교통 티켓을 대신한다.

독일 사회의 거의 모든 공공기관이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독일 주요 정부 및 관공서 웹사이트 대부분 우크라이나어로 정보를 제공한다. 공영방송도 우크라이나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체류와 일, 학업 등 신속하게 독일에 정착할 수 있는 정책도 속속 결정됐다. 독일은 특별법을 통해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임시 보호를 위한 체류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난민법이 아닌 사회법상 의식주 및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보편적인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독일에서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모든 분야에서 독일 취업 및 창업, 프리랜서 업무가 가능하고 직업훈련도 가능하다. 노동 시장은 '우크라이나 난민 패스트 트랙' 일자리를 내 놓는 중이다. 우크라이나어 구직 페이지도 따로 생겼다.

지난 4월 20일 독일 주정부 교육문화장관협의체(KMK)는 대학 진학을 앞둔 우크라이나 난민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도 대학 입학을 허용한다고 결정했다.

시민사회 동력도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에 쏠렸다. 문화 예술 분야 지원이 이어졌고, 난민들은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를 꾸려 공연을 개최한다. 지금도 주말마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자선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5 vs. 2022

'이렇게까지?'

독일 사회의 연대를 보며 놀라움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다. 유럽 연대의 단단함 만큼, 비유럽인에 대한 배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2015년 유럽의 난민 위기 당시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일례로 당시 중동 지역에서 온 난민들은 휴대전화를 소지했다고 '사치스럽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지금은 어떨까?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무료 심카드를 받을 수 있다. 단순하지만 그때와 지금, 전쟁 난민을 대하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크라 피란민 만나는 독일 외무장관 안나레나 배어복(가운데) 독일 외무장관이 20일(현지시간) 독일 북부 하노버 박람회장에 마련된 우크라이나 피란민 수용소를 찾아 피란민들과 대화하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고 난민 수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2022.3.21 ⓒ 연합뉴스

당시에도 독일 정부는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받았다.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고 사회 통합을 위한 정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사회의 분위기는 나뉘었다. 난민 지원을 위한 연대도 물론 컸지만, 배제와 차별, 혐오도 컸다. 난민과 이슬람 혐오를 동력 삼아 극우세력이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다른 외양과 문화를 가진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다른 건 본능적인 일일 테다. 우크라이나 전쟁 피난민 사이에서도 인종에 근거한 차별 사례가 보고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체류하던 아프리카 국적의 교환학생들이 폴란드 국경을 넘지 못하고 격리된 것이다. 유럽 난민과 비유럽 난민 간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분법적 접근에 유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2015년과 2022년, 독일 현지에서 난민 지원과 연구를 수행한 독일 정치+문화연구소장 이진 박사는 "지금 독일 사회의 강한 연대는 비유럽과 유럽 난민의 차별보다는 침략 전쟁을 막고 명백한 피해자 편에 서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 의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민주주의 및 전후 질서에 대한 권위주의의 도전이 유럽 안팎까지 뒤흔들자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진영을 넘는 공감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동시에 "2015년 경험의 장점은 살리면서 당시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독일 사회의 움직임은 평가할 만하다. 이런 논쟁을 해야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사회의 갈등능력과 문화적 감수성이 자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중 잣대에 대한 자성

이중잣대(Doppelmoral)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는 독일 사회에서 스스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난민 지원 정책은 물론 옳다. 하지만 2015년과의 차이점, 난민 대우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논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풍자 영상도 독일 공영방송의 온라인 콘텐츠다. 영상 아래에 달린 댓글에는 '슬프지만 진실', '핵심을 지적했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 대학 입학을 허가한 교육 당국의 결정에 베를린 시의원 마르셸 홉은 "그건 전적으로 옳은 결정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모든 난민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며 "구조적 불평등은 법적으로도 의문스럽고, 의도치 않았더라도 차별적인 절차를 강화한다"고 지적했다.

독일과 유럽 사회는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에 대처하며 지금까지의 난민 정책을 되돌아 볼 기회로 삼고 있다. 이진 박사는 "우크라이나 피난민 중 스스로 난민이라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도움 받아야 하는 상황에 난처해하며 한시라도 빨리 자립하고자 하는 이들이 일상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찾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난민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최근에는 전쟁 난민뿐 아니라 기후난민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다양한 환경의 난민을 받아들이며 독일 사회는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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