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00시간 동안 협상했지만 아무 성과가 없는 것이 1분 동안 서로 총을 겨누는 것보다는 낫다."

서독의 전 총리였던 헬무트 슈미트의 격언이다. 평화와 화합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
 
5월 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45회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분단의 비극적인 역사를 딛고 통일에 성공하며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 독일의 이야기가 다뤄졌다. 독일 현대사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섰다.
 
강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에 가져온 베를린 장벽의 조각을 선보였다. 1989년 11월 독일 통일 당시, 세계냉전과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시민들의 힘으로 부순 장면은, 현대사의 기적으로 불리며 독일의 역사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큰 감동을 남긴 순간으로 기억된다.
 
한 나라, 두 화폐... 독일 분단의 시작

나치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승전국인 연합국을 대표하는 미국, 영국, 소련은 1945년 얄타 회담-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프랑스까지 더한 4개국이 독할을 분할 점령하는 데 합의한다. 독일 전역은 물론이고 정치적-상징성 중요성이 큰 도시인 베를린 역시 분할되어 공동으로 관할하는 구역이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승전국들이 합의한 독일 재건의 기본 원칙은 나치 잔재 청산, 민주화, 지방분권 회복, 비무장 원칙이었다. 하지만 불과 3년 뒤 승전국인 연합세력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분열되며 냉전 체제에 돌입하면서 독일의 상황도 급변한다.
 
자유진영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점령지구의 행정을 통합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며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전환을 시도한다. 소련은 이에 맞서 자신들의 점령지역에 '독일경제위원회'를 구성하고 동독 지역에 '동독 마르크' 화폐를 도입한다.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화폐가 통용된다는 것은 실질적인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다.
 
서방 연합국은 공동통치구역에서 자신들의 관할인 서베를린도 서독 지역으로 통합하려했다. 소련은 서방측 점령지구간 모든 육로와 수로를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로 맞섰지만, 미국과 영국은 '베를린 공수작전'을 실시하여 비행기를 이용한 대량 물자 보급으로 봉쇄를 무력화시켰다.
 
1949년 5월 23일, 서독은 기본법이라는 독일 헌법을 발표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한 독일연방공화국이 출범했다. 같은해 10월 동독 지역에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한 독일민주공화국이 세워졌다. 전세계가 냉전체제에 휩쓸리며 동서로 나뉜 독일도 극명한 이념과 체제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서독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서방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를 막는 게 급선무였다. 자유진영의 리더였던 미국은 1948년 마셜플랜을 통하여 2차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서유럽에 대대적인 경제 지원을 통하여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고 미국 상품시장을 넓히려고 했다. 당시 지원 규모는 130억 달러(현재 한화로 약 140조 원)에 이르렀다. 서독 역시 마셜플랜으로 미국의 경제지원에 힘입어 페허를 딛고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반면 동독의 상황은 어땠을까. 소련은 전쟁 피해 배상금 명목으로 동독 지역의 공업 설비 약 40%를 빼앗아가는 등, 약 140억 달러를 받아갔다. 미국의 지원속에 성장한 서독과는 반대의 양상이었다. 동독경제는 침체됐고 동독인들은 기본적인 생필품마저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서독과 동독은 분단 직후에도 한동안은 자유로운 교류를 이어갔으나, 1952년 국경선을 분리하기 위하여 접경지역에 대규모 철조망을 설치하면서 상황은 악화된다. 급진적인 소련화 정책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 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경제활동 인구였기에 동독은 심각한 인구 감소 문제에 직면했다.
 
발터 울브리히트 당시 동독 서기장은 소련을 본받아 계획경제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여 공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불만을 커진 동독인들은 결국 1953년 6월 17일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동독 경찰력으로 상황을 진정시킬 수 없게 되자 배후에 있던 소련이 나서서 2만 명에 이르는 군대와 장갑차를 파병하여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50여 명의 동독 주민이 사망하고 1만 5천 명이 체포된다.

이 사건으로 오히려 서독 탈출을 원하는 동독인들은 더욱 급증했다. 국경지대가 막히자 동독인들은 동베를린을 통하여 자유진영 관찰 구역인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졌다. 불안감을 느낀 울브리히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바로 분단의 상징이 되는 베를린 장벽이었다.

엉성한 철조망으로 시작한 베를린 장벽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초기에는 급조된 엉성한 철조망으로 시작하여 오히려 주민들의 비웃음을 샀고 여전히 탈출행렬이 멈추지 않자 동독 정부는 1961년 보다 견고한 콘크리트 장벽을 쌓아올리기로 결정했다. 세월이 흘러 1970~1980년대에 이르면 외벽과 내벽에 탐조등, 감시탑, 도로 순찰대와 군견까지 추가되며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다.

동독이 일방적으로 건축한 베를린 장벽 때문에 해당 지역 인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마을이 두 개로 갈라지면서 분단과 냉전이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체험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 낙하에서 열기구를 통한 공중 탈출까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유를 찾으려려는 시도 역시 멈추지 않았다.
 
동독은 소련의 KGB를 본딴 '슈타지'라는 비밀정보기구를 만들어 국민들을 더욱 감시 통제하고 사찰한다. 슈타지의 이야기는 영화 <타인의 삶>의 소재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감시 대상자에 대한 거짓 소문, 협박편지, 인간관계 파탄, 감금과 고문까지 슈타지의 악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다.
 
동서독 관계가 악화되면서 초기의 서독은 '할슈타인 원칙'을 수립하여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이고 동독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동독 고립 정책을 제시했지만, 동독이 굳건하게 공산주의 체제를 강화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
 
동서독 관계의 전환점이 된 것은 빌리 브란트의 등장이었다. 1969년 서독의 4대 총리가된 브란트는 '현실적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경제적 어려움이 동독 정권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동독과의 긴장이 커진다면 그것이 분단을 심화시킨다"라고 주장했다. 브란트는 동독과 동유럽과의 화래를 표방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브란트 정권은 아데나워 정권부터 시작된 '프라이카우프' 사업을 확대하여 동독의 정치범들을 금전적 가치가 있는 물품과 교환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3만 명이 넘는 정치범들을 구제했다. 또한 동서독은 통행 협정을 체결하여 서독과 서베를린을 무비자로 이동가능하게 되며 경제-사회적 교류를 확대됐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통하여 양측은 동등한 권리를 바탕으로 이웃관계를 수립하는 데 합의한다. 독립-자치-영토 보존-모든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의 원칙을 수립하면서 이는 훗날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됐다.
 
그런데 동방정책을 뚝심있게 추진해오던 브란트는 1974년 돌연 사임한다. 그의 보좌관이었던 귄터 기욤이 동독 슈타지의 비밀 공작원이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기욤은 브란트의 여성편력 등 지저분한 사적인 치부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브란트의 불명예 사임에도 불구하고 동방정책은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등 후임자들에 의하여 중단없이 계속됐다. 이는 총리들의 의지만이 아니라 서독인들과 정치계의 광범위한 공감대와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무렵에는 이미 동방정책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진보와 보수 진영을 가리지않고 동방정책을 반대할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속되는 동독 탈출로 동독 정권은 물론이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난민을 감당해야 하는 서독 정권 역시 난감한 입장에 놓였다. 1989년에는 체코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에 수천명의 동독인들이 진입하여 망명을 신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유럽은 공산주의 정권들이 줄줄이 무너지고있는 추세였고 체코 역시 동독 정권의 피난민 송환 요구를 거부한다. 동방정책을 계승한 헬무트 콜 총리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과 담판을 짓고 피난민들을 서독으로 받아들이는 데 합의한다. 이는 동독인들에게 동유럽 국가를 통한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해줬고, 베를린 장벽 무용론이 확대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동독 공산당 대변인, 세기의 말실수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남은 동독 주민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1989년 10월 한 달 내내 동독에서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체제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됐다. 동독 정부는 시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여기서 동독 공산당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는 세기의 말실수를 저지른다. '여행 자유화 조치가 언제부터 시행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당장부터"라고 대답한 것.
 
동독의 여행법 개정안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외부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샤보브스키가 내용을 정확하게 숙지하지 못하고 기자회견에 나섰다는 것. 샤보브스키의 말은 TV를 통하여 속보로 동서독을 포함한 전세계로 퍼졌다.

동서독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베를린 장벽 앞으로 집결했고 경비병들은 처음엔 저지하려고 했으나 감당못할 인파가 쏟아지자 결국 검문소를 전면 개방한다. 장벽으로 몰린 시민들은 분단의 상징인 장벽을 자신들의 손으로 무너뜨리고 환호했다. 헤어진 동서독의 가족들이 재회하여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전세계에 큰 감동을 안겨줬다.
 
샤보브스키의 (고의 혹은 실수로 인한) 발언이 시기를 앞당기기는 했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동서독과 2차대전 승전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들은 1990년 '2+4 회담'을 열고 독일의 통일에 합의한다.
 
관련국 모두가 독일 통일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특히 당시 영국 수상 마가릿 대처는 미국의 유럽 전략 동반자가 영국에서 독일로 바뀔 것을 경계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미국은 적극적으로 통일을 지지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대통령은 바로 독일 서베를린 연설에서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시오, 이 문을 허무십시오"라는 브란덴부르크 메시지로 큰 박수를 받았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은 역사가 결정할 것"이라는 답을 남기며 우회적으로 통일에 동의했다.
 
2+4 회담을 통하여 최종합의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며 마지막 관문을 넘긴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에 성공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썼다. 기나긴 분단의 시대를 끝낸 독일 국민들은 새 독일 국기를 게양하고 함께 환호하며 기쁨을 나눴다.
 
독일 통일은 분단 국가인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는가. 1960년대부터 서독의 정치인들은 신뢰 회복의 평화 정치를 실험했다. 냉전과 분단을 힘의 대결과 협박으로 해결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주의자로 취급받았다.
 
독일은 평화의 의지를 명확히 전달하고 천천히 대화하고 계속 협상하면서, 서로 적으로 봤던 상대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상대의 요구와 주장을 듣는 상호 이해와 소통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통일은 그 자체의 목적을 넘어서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이동기 교수는 "평화와 화해는, 얼마든지 실험하고 모험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서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을 정의했다.
독일통일 벌거벗은세계사 베를린장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