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8 16:37최종 업데이트 22.05.0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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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부모 유산 없이 재벌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사회적 지탄까지 받게 되면, 판사를 그만둔 뒤 재벌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유산도 많지 않고 사회적 지탄까지 받았는데도 재벌 기업의 초석을 닦은 판사 출신이 있다. 4·19 혁명 시기인 1960년 3월 23일 시위 진압 책임자인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친일파 홍진기가 바로 그다.


그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내무장관에 홍진기씨'는 그의 일제 치하 경력을 "4273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73년 10월 고문(高文) 사법과 합격, 76년 10월 전주지법 판사"로 소개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1940년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통과해 일제 판사가 된 것이 그의 친일 이력의 출발점이다.

친일판사, 4.19 땐 "국민 살상의 죄"

사법시험 통과와 판사 부임 사이에도 경력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경성지방법원과 이 법원 검사국에서 시보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는 검찰이 법원에 속했기 때문에 법원 검사국 시보는 지금의 검사 시보였다.

그는 일제 패망 5년을 남겨놓고 사회에 진출해 친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기간은 친일행위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1917년에 경기도 고양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판사 재직 당시 20대 중반이었다.

1945년 8·15 해방은 홍진기에게 내려진 '역사의 선고'였다. 28세 때 받은 역사의 선고를 그는 43세 때도 받았다. 1960년 4·19 혁명 때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국민을 살상한 죄"를 지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있은 해인 그해 12월 19일 발행된 <경향신문> 1면 중간 기사는 이승만 정권 부역자인 홍진기·곽영주·유충렬·백남규에 대한 혁명재판소 상소심 결과를 보도하면서 "동(同) 공판에서는 피고인들에게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제5조(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을 살상한 죄)가 적용되었다"라고 전했다. 괄호 속 내용은 신문에 적힌 그대로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초등학생(당시 국민학교)들이 시위에 나선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이 보도에 따르면, 재판부는 "경무대 앞 발포에 앞서 홍진기·곽영주·조인구 3명이 발포 모의를 했다는 사실"은 없지만 "통의동 저지선에서의 발포는 홍진기가 유충렬에게 명령하여 다시 백남규에 하달된 것"이라며 홍진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016년 당시 촛불 시민들은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서쪽 담장 옆을 행진해 청와대로 다가갔다. 서쪽 담장 옆 동네가 바로 통의동이다. 4·19 당시 거기서 시민들을 향해 자행된 총탄 발포의 책임자가 홍진기라는 판결이 나왔던 것이다.

1961년의 이 판결은 군사정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4·19 혁명을 일으킨 당시 국민들의 판단을 상당부분 반영했다. 1945년 해방에 의해 역사로부터 유죄 선고를 받은 홍진기가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또다시 역사로부터 유죄 선고를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판사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이런 선고를 두 번이나 받았다는 점이 이채롭다.

역설의 순간

그런데 그의 인생에는 역설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친일파인 그가 일본의 식민지배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한일회담에 나가 한국 정부를 대표했던 점이다.

제2차 한일회담을 앞두고 발행된 1953년 4월 9일자 <조선일보> '한국 측 대표 결정'은 "정부에서는 오는 15일 개최되는 한일회담의 한국 측 대표로 김용식 주일공사를 수석대표로 하고, 법무부 법무국장 홍진기, 상공부 수산국장 지철근 양씨(兩氏)를 파견하기로 되어 양씨는 9일 출발하리라고 한다"고 보도했다. 일제 판사 출신의 친일파가 한일회담 대표가 되어 일본의 잘잘못을 따지게 됐던 것이다.

또 다른 역설은 친일파인 그가 친일파로부터 사면을 받고 사회로 재진출하게 된 일이다. 1963년 12월 14일 그를 사면시켜준 인물은 윤보선 대통령 하야 이틀 뒤인 1962년 3월 24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에 당선된 뒤 12월 17일 취임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박정희 권한대행이었다.

그 뒤 그가 일군 중앙그룹은 중앙일보와 JTBC를 보유한 유력 재벌로 성장했다. 일제 부역행위에 뒤이어 이승만 정권 부역행위를 했음에도 비교적 순탄하게 재벌로 거듭났다.

20세기 한국 재벌들은 삼성그룹 이병철처럼 집안 재산을 기초로 일어선 뒤 정경유착을 통해 거대 재벌로 성장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현대그룹 정주영처럼 억척같은 노력을 발판으로 일어선 뒤 정경유착을 통해 거대 재벌이 됐다.

홍진기는 둘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중앙그룹의 성장은 그런 면에서 특이하다.

홍진기가 재벌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은 삼성그룹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지원 하에 급성장했다가 4·19 혁명을 계기로 사회적 지탄에 노출된 삼성그룹 이병철을 측면 지원하는 데에 그의 역할이 필요했다. 이것이 그를 되살리는 원동력이 됐다.

삼성 이병철의 러브콜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나는 생애에서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며 "4·19와 5·16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 무렵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병철은 얼마 뒤 생각을 바꾸었다. "1년여를 두고 숙려한 끝에 정치가의 길은 단념했다"고 한 뒤 "정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종합매스컴 창설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이때 이병철이 주목한 인물이 홍진기다. 두뇌가 명석하고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인맥을 두고 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홍진기가 이병철의 시선을 받았다. 2002년 1월 발행된 <중앙시사매거진> '부(富)와 부, 부와 권력이 결합해 쌓은 성(城)'에 이런 설명이 있다.
 
"이병철­, 홍진기 두 사람의 교분이 시작된 것은 4·19 이후.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와 관련, 옥고를 치를 때였다.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낸 홍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산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이병철 회장에게 홍씨를 천거, 이 회장이 직접 형무소로 면회를 가고, 또 집으로 찾아가 가족들을 위로한 것이 인연이 됐다. 홍씨는 출감 후 삼성에 몸담게 됐고, 삼성이 1965년 동양방송의 전신인 라디오 서울을 개국하면서 그 경영을 맡았던 것."

홍진기의 아들인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은 2016년에 쓴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에서 "아버지가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발아시키고 있던 씨앗에 물을 주신 분이 바로 호암 이병철 회장"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병철 회장의 지원 하에 홍진기는 1965년에 동양방송 사장, 1968년에 <중앙일보> 사장, 1980년에 <중앙일보> 회장이 됐다. 홍진기가 운영하는 <중앙일보>가 삼성그룹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기에 처한 삼성을 돕는 방법으로 홍진기는 성공적으로 부활했고 재벌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
  

이병철(왼쪽)과 홍진기.

 
홍진기가 이병철로부터 받은 지원은 언론 분야에 그치지 않았다. 컬러텔레비전 보급이 한창이던 1983년에는 TV 브라운관을 납품하는 역할도 맡게 됐다. 주식회사 보광이 이 사업을 맡았다. 이는 홍진기의 기업이 언론재벌뿐 아니라 산업재벌로도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1999년 4월 1일에 <중앙일보>와 보광그룹이 삼성그룹에서 독립한 뒤 발행된 그해 9월 18일자 <동아일보> '보광 어떤 회사인가'는 "㈜보광은 설립 당시 삼성코닝의 주식 관리를 위한 지주회사 성격으로 출발했지만, 90년대 들어 본래의 목적보다는 스키장과 골프장 건설 등의 종합 레저 사업과 편의점 업계 진출 등 유통사업 광고대행업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에 잇따라 진출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고 설명한다.

홍진기가 친일로 벌어들인 재산은 시보 생활 및 판사 생활 때 받은 봉급 정도로만 확인된다. 독립적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일제 패망 뒤에 축적할 수 있는 재산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친일파 대통령의 사면을 받아 무기징역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뒤이어 삼성그룹을 도와 언론 기업을 경영하고 1980년대에 산업 재벌로 성장했다. 일반적인 친일파들과는 전혀 다른 경로로 재벌급의 재산을 축적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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