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6 18:31최종 업데이트 22.04.2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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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튼 칼리지는 지난 3월 "(잉글랜드) 북쪽의 이튼"을 세우겠다며 더들리(Dudley), 올덤(Oldham), 미들즈브러(Middlesbrough)를 선정했다. ⓒ etoncollege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게 보통인 세태에 권력을 순하게 쓰고자 하는 이가 있다. 사이먼 핸더슨(Simon Henderson),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고등학교일 영국 이튼(Eton)의 교장은 몇 년 전 그렇게 눈에 띄었다. 이름값 하는지라 이튼은 종종 구설수에 오르지만, 그때마다 그의 언어는 쉽고 단순 명료하다. 하지만 교육 기관으로서의 이튼의 위치, 이튼을 바라보는 영국 사회의 시선 변화, 그리고 변화하는 조건 속에 이튼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이 보인다.

그런 그가 지난 3월, "(잉글랜드) 북쪽의 이튼"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더들리(Dudley), 올덤(Oldham), 미들즈브러(Middlesbrough)를 선정했다. 세 곳 모두 섬유, 철강 등 산업 도시로, 제조업이 쇠퇴함에 따라 지역 경제도 함께 쇠락하는 지역이다. 노동자 도시로 진출하는 '귀족' 학교 이튼. 연간 학비가 6-7천 만 원에 달하는 런던의 이튼과 달리, 세 학교의 학비는 0이다. 교장이 내세우는 "이튼 근대화"의 한 축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고등학교

이튼을 수식하는 언어는 많다. 1440년에 설립된 600년의 역사. 윌리엄 왕세손과 그의 동생 해리 왕자 등 최상류층이 다니는 귀족 학교. 현 총리인 보리스 존슨을 포함, 역대 총리 55명중 20명을 배출한 "영국을 지배하는" 학교. 최근에는 1930-1940년대 독일 히틀러가 엘리트 장교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NAPOLA(National Political Institute of Education)가 지도자 "성격 형성"에 있어 영국의 이튼과 해로우(Harrow)를 모델로 삼았다는 책도 나왔다.

이튼이 가진 '저 세상' 이미지를 확실하게 만든 것은 2016년 크렘린 방문이었다. 2016년 8월, 11명의 이튼 학생이 러시아 푸틴과의 만남을 성사시켜 크렘린 스테이트 룸(외국 정상들과 회담하는 방)에서 약 2시간동안 만남을 가졌다. 각종 정상 회담에서 지각 대장으로 악명 높은 푸틴이지만 이들과의 만남에는 늦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앞)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영국 사립 기숙학교인 이튼 칼리지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2016.8.25 ⓒ 연합뉴스


당시 영국은 브렉시트 투표 이후 총리는 테레사 메이로, 외무 장관은 보리스 존슨으로 개편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총리와 외무 장관보다 이튼 학생들이 한 발 먼저 푸틴을 만났다는 사실에 정계는 적잖이 당황했다. 학교 측은 "학교가 관여한 바 전혀 없으며, 전적으로 학생들이 주도한 만남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푸틴과 만나기 위해 약 10개월 동안 천여 통이 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하니 이들에게도 쉽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이튼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크렘린도 열린다는 사실은 당시 충격이었다.  

개혁 교장 사이먼 핸더슨

이튼 교장이 나오는 기사를 꼬박 꼬박 읽게 된 계기는 그의 입시 스캔들 처리 방식을 보고서다. 2017년 8월, 이튼은 대입의 경제학 시험 부정에 휩싸였다. 영국은 입시를 교육부가 전적으로 관할하는 구조가 아니다. 고교 커리큘럼 및 시험까지도 각 학교가 선택할 수 있는데, 이튼은 케임브리지 대학이 운영하는 Pre-U 과정을 선택하고 있었다.

시험 방식은 좀 놀랍다. 회사 측과 학교 측이 확고한 신뢰 하에 시험지를 시험 전날 학교 측에 전달한다. 학교 선생님의 감독 하에 시험을 본 후 시험지를 전달하면 회사 측이 채점한다. 시험은 서술 시험으로 6개의 질문에서 3개를 골라 2시간 내에 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7년, 경제학과의 한 선생이 시험지를 미리 열어보고 학생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습시킨 후 시험을 치르게 했다.
  

사이먼 핸더슨(Simon Henderson) 이튼 칼리지 교장 ⓒ etoncollege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내부 고발이었다. 보고 받은 교장은 회사 측에 부정행위 발생을 보고했고, 부정행위 교사를 전국교사심의회에 넘겼다. 언론에 사건이 알려지게 된 건 학교가 이미 기본적 조치를 취한 이후였다. 교장은 교육부 감사 위원회에 출두, 증언했다. 회사 측은 이튼 학생들의 점수를 전원 무효 처리했다. 이튼 역시 이 결정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학부모에게 보낸 교장의 편지는 언론에도 공개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학생들 잘못은 아니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였다. 사회적 공분으로 확산될 틈도 없이 스캔들은 마무리되었다.


덮으려는 시도도, 변명도, 선처 요구도 없는 교장 모습에 "저 사람 누구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언론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사이먼 핸더슨은 2015년 39세에 이튼 교장으로 채용된, 역사상 가장 젊은 교장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 이튼에서 8년간 역사를 가르친 후 다른 학교 부교장으로 갔다가 교장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튼 이사회와 인터뷰 당시, 이튼의 "근대화"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이튼 근대화"와 "이튼 폐지하라"

이튼의 근대화는 무엇일까. 근대화하면 떠오르는 경제 개발을 이튼이 외칠 리는 없고 남녀 공학으로의 전환? 18-19세기 식 모자와 양복 입기를 그만두는 교복의 근대화?

자신의 근대화를 펼치기 전에 교장은 2019년 "이튼을 폐지하라"는 노동당의 총선 구호와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튼은 상징적 존재이고 사립학교 폐지안이다. 영국의 교육 시스템이 계층 이동을 촉진시키기보다 사회 계층을 더 공고화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극작가인 앨런 베넷(Alan Bennet)은 "사립 교육은 공평치 않다. 사립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안다. 사립 교육을 위해 돈을 쓰는 사람도 안다. 희생되는 사람들도 안다. 그리고 사립 교육을 받는 사람(학생)도 안다, 아니면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당시 이튼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사건이 연달아 있었다. 보리스 존슨의 '거친 입'에 제이컵 리스모그(Jacob Rees-Mogg)가 기름을 부었다. 그는 하원 토론 때 똑바로 앉지 않고 비스듬히 길게 드러누워 당시 동료 의원들로부터 "베개를 갖다 줘야 할 것 같다"는 지적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언론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보수당의 제이컵 리스모그는 당시 영국 하원 대표 (Leader of the House of Commons)로 이튼 출신이다.
 

2019년 9월, 보수당 제이컵 리스모그 당시 영국 하원대표는 하원 토론 때 똑바로 앉지 않고 비스듬히 길게 드러누워 당시 동료 의원들로부터 "베개를 갖다 줘야 할 것 같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이튼 출신이다. ⓒ BBC 화면캡처

 
이같은 일회성 사건들은 사립 (독립)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불을 지폈다. 이는 코미디언이자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미첼 (David Mitchell)의 발언에 잘 나타난다. 사립학교 출신인 그는 청소년때 '사립 학교의 지도자격인' 이튼을 선망했다고 한다. 1990년대 영국 사회가 평등을 향해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때문이었다.  진보하는 사회 속에서 이튼이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 예상, 과거로 사라질 것에 대한 향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전후로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신념이 사라지면서 이튼을 좋아하는 마음도 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오른쪽)와 그의 아내 다이애나 왕세자비(왼쪽 두 번째)가 런던 이튼 칼리지에서 자녀들인 해리(오른쪽 세 번째)와 윌리엄 왕자와 서있다. 1995.9.6 ⓒ 연합뉴스

 
"이튼을 폐지하라"가 발표된 이후, 이튼 교장은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조만간 사립 교육 기관을 둘러싼 전쟁이 다가올 것이라며 노동당의 지적대로 현재 교육 시스템이 불공정함을 인정,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튼을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는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오히려 이튼의 우수함까지 없애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수함이란, 이튼이 세계 지성사에 기여한 바다. 수없이 많은 유명 동문이 있지만 이튼을 대표하는 동문은 권력을 지닌 정치인, 부를 지닌 경제인, 귀족과 같은 특권층이 아니다. <동물농장> < 1984 >의 조지 오웰과 거시 경제학의 케인즈다.

이 둘은 모두 학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이튼이 이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교육시켰다. 케인즈는 이튼에서도 수학과 고전 (그리스와 로마), 두 과목에서 탁월했다고 한다. 반면, 이튼에서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를 선생으로 만났던 조지 오웰은 공부보다는 클럽 활동에 열중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장학금을 받을 성적이 되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조지 오웰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이튼은 조지 오웰이 거친 마지막 교육기관이다.

교장은 이튼이 문제 발생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해결책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역제안 한다. 교장이 내세운 "이튼 근대화"와 노동당의 "이튼을 폐지하라"가 만나는 지점이다. 실제로 교장은 매년 650만 파운드 (100억 원 정도)를 장학금으로 지출, 전액 장학생을 70명에서 2019년에는 90명까지 늘려가고 있었다. 교장의 "이튼의 근대화"는 특권, 권력, 부와 연결되는 이튼의 모습을 지우고 사회적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2022년 "북쪽의 이튼"

2019년 노동당의 총선 패배로 이튼은 "이튼 폐지"라는 큰 폭풍을 피했다. 그리고 3년 후인 2022년, 교장은 북쪽 노동자 도시에 등록금 없는 이튼을 짓겠다고 발표하고 개교 시점은 빠르면 2025년이라고 밝혔다.  

이튼이 최종 선택한 세 지역은 모두 중학교 때까지 성취도가 높다가 고등학교 때 갑자기 떨어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교장은 높은 중학교 학업 성취도를 대학 진학 때까지 유지시켜 저소득 계층의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고자 한다. 입학의 우선권은 학업 성취도가 좋은 저소득층 학생이다.

이번 결정의 목표는 영국의 두 가지 고질적 문제, 즉 런던과 비 런던간의 지역 차와 계층 격차 완화에 이튼이 일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튼 교장은 이를 "기본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순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가진 이튼의 움직임이 순할 수만은 없다.
  

이튼 칼리지 ⓒ etoncollege

 
당장 예상되는 것이 제도의 악용이다. 교장은 주변 지역 중산층에게 "북쪽의 이튼"을 두고 게임할 생각을 하지 말라며, 이 학교는 철저히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고 대단히 엄격한 서류검사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튼의 진출이 주변 지역 교육 생태계에 자극이 될지 파괴시킬지도 확실치 않다.   

잡음은 있겠지만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선하게 사용하겠다는 이튼의 결정은 파격적이다. 동시에 현명하다. 좀 더 멀리 보면, "이튼의 근대화"가 성공해야 "이튼 폐지"를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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