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찰스 다윈은 1839년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고서 그 즉시 자연선택 개념을 떠올렸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학식이 높았던 시골 교구 신부인 토머스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는 인구 증가 속도와 식량 생산의 불균형을 논의한 저서로 당대의 지식인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사람수가 식량이 늘어나는 속도를 초과하면 전쟁과 기근, 질병, 죽음이라는 네 재앙이 발생하여 평형을 이룬다고 믿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응(변화에 적응)에 성공한 종만이 세대를 이어나갈 수 있다. 이것이 자연선택이요 진화의 핵심 개념이다. 사실, 이러한 관념은 다윈의 할아버지와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 어슴프레 형성되기 시작한 생각이었다. 젊은 시절의 다윈은 평범한 신부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식물학 교수 존 헨슬로(John Stevens Henslow)가 준 기회를 잡으면서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다윈은 남아메리카 해안지도를 작성하려는 목적으로 출항한 영국 해군의 비글호에 승선했다. 5년 간의 탐험을 다룬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한 뒤에 다윈은 종의 기원을 완성한다. 그러나 20년 동안이나 출판을 미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따개비 연구에 몰두하면서 자연선택의 증거물을 수집하고 있었다. 

비글호 항해기는 헨리 베이츠(Henry Walter Bates)와 앨프리드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두 청년은 의기투합하여 아마존으로 탐사를 가며 다윈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의견을 나누었다. 베이츠는 이때의 채집과 관찰을 바탕으로 곤충 의태(흉내내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베이츠 의태를 정립한다. 다윈은 베이츠가 수집한 증거와 논문이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는 명백한 결과라며 몹시 기뻐했다. 이후 흉내내기 연구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뮐러(Fritz Muller) 의태를 낳게 된다. 
 
방어 수단이 없으므로 흉내내기가 정교하다. 보통 사람은 구별할 수 없음.
▲ 말벌을 복사한 듯한 일본노린내등에. 방어 수단이 없으므로 흉내내기가 정교하다. 보통 사람은 구별할 수 없음.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베이츠 의태(Batesian mimicry)를 보이는 종은 화려한 경계색을 띠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변변한 독침이나 무기가 없어서 허풍쟁이에 불과하다. 발각되면 생명이 위험해지므로 진짜를 쏙 빼 닮는다. 가짜가 성행하면 진짜는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만약, 어떤 포식자가 가짜를 잡아먹고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면 나중에 진짜를 사냥하게 되므로 진짜는 가짜와 구별이 쉽도록 진화가 일어난다.
 
깡충거미의 한 종으로 개미가 흔들어대는 더듬이 흉내까지 완벽히 모방함.
▲ 파리를 먹고 있는 불개미거미. 깡충거미의 한 종으로 개미가 흔들어대는 더듬이 흉내까지 완벽히 모방함.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한편, 뮐러(Mullerian mimicry) 의태는 여러 종이 흉내내기를 하고 있어서 베이츠 의태와 차이가 난다. 뮐러 의태는 끼리끼리 닮는 것을 말하는데 진짜나 흉내쟁이나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포식자는 학습을 통해 비슷한 종을 사냥하지 않게 되므로 둘다 살아남을 확률이 커진다. 자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수렴진화의 예가 뮐러 의태다. 가령 노랑 바탕에 검은 줄무늬는 벌을 흉내낸 곤충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빨갛고 검은줄 패턴은 독사에게서 종종 관찰할 수 있다. 

월리스는 다시 수년 후 말레이 반도 탐험을 통해서 종의 기원과 거의 똑같은 논문을 다윈에게 보낸다. 월리스에게 다윈은 존경하는 멘토였기 때문에 그가 살펴봐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윈은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는 한참을 고뇌했다고 전해진다. 누가 먼저 논문을 발표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월리스의 논문을 가로챘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다윈의 연구를 알고 있었던 친구들이 해결책을 내놨으니 다윈과 월리스는 공동으로 종의 기원을 발표한다. 다윈은 여러 인물들과 교류했는데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Joseph Dalton Hooker) 등은 종의 기원 출판을 원조했다. 곤충기로 이름난 파브르와는 바다를 건너 교류를 이어갔으며 좋은 관계로 남아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다.

미리엄, 벼룩숙녀이자 마지막 자연주의자

시간이 흘러 세계 2차 대전 후에 진화론과 의태는 미리엄 로스차일드로 하여금 과학과 시를 융합하게 만들었다. 본 연재 39화에서 살펴본 미리엄은 대학이나 특정한 기업에 소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시켜온 인물이다. 이 오랜 전통을 이어온 사람들이 찰스 다윈,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기압계와 함께 바로미터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신학자),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수소를 발견한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등이다.

미리엄은 부유한 가문의 딸이었으므로 고리타분한 학계에 몸 담을 필요가 없었으며 기업에 딸려 연구의 자유를 제한당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런던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여 정규 교육을 마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이의 연구 성과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와 같은 유명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게 만들었으며 1999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다.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이니그마 프로젝트(독일군 암호 해독)에 참여해 활약했으며 나치로부터 여러 아이들과 동족을 구했다. 미리엄은 평생 동안 350편이 넘는 과학 논문을 발표했지만 스스로를 과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19세기의 마지막 자연주의자라고 여겼다.

덧붙이는 글 | 해당 기사의 사진은 글쓴이의 초접사 사진집 <로봇 아닙니다. 곤충입니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찰스 다윈, #앨프리스 월리스, #토머스 맬서스, #미리엄 로스차일드, #헨리 베이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