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2 15:03최종 업데이트 22.04.1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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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동쪽으로 약 400km 정도 떨어진 트로스트시아네츠 마을에서 청소년들이 부서진 러시아 탱크를 보고 있다. ⓒ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고 논쟁 지점이 다분한 세부 사안이 등장해 호소력 짙던 초기 구호들이 조금씩 색이 바랠 때다. 반면 가려졌던 각국의 움직임과 내부 사정이 드러난다. 나토(NATO), EU, G7, 덩치 큰 세 개의 회의가 하루에 내리 개최된 3월 24일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예상되었던 것이 확정되었다. EU는 공전하던 EU 방위 프로그램(Strategic Compass)을 승인해 자체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작년 9월 아프가니스탄 철수 사태 당시 운을 뗀 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절호의 기회를 잡은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의 정치력이 거둔 성과다(심상찮은 세계정세, 한국도 제대로 된 지도자가 절실하다, http://omn.kr/1xojk). EU는 나토와의 관계 등 세부 사항을 조율해 가면서 일단 병력 규모는 5천 명으로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같은 날 G7 회동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동아시아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큰)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구와 비서구를 넘나들 수 있는 일본의 존재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 공급 문제다. 대 러시아 에너지 독립이 시급한 지금,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에 속도를 붙이느냐 아니면 화석 연료로의 회귀냐의 갈림길에 있다. 개혁과 후퇴, 어느 쪽을 택하든 국내 반발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전쟁 상태이기 때문에, 방향 선택은 지도자의 결정이다. 양자중 영국과 독일은 개혁을 택했다. 하지만, 원자력에 있어서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본 무슨 생각하나
  

2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G7 정상들은 이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향해 생물학, 화학, 핵무기 사용 위협을 하지 말라면서 필요에 따라 추가 조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2022.3.25 ⓒ 연합뉴스

 
3월 24일, 벨기에 브뤼셀을 비춰주는 뉴스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보였다.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즉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G7이니 못 갈 자리는 아니었지만 왠지 부자연스러웠다. 사실상 대서양 질서를 지탱하는 나토, EU, G7은  전 세계적으로는 서구 패권을 상징한다. 셋은 상당히 겹친다. G7 중 세 회의에 모두 참가할 수 있는 나라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다. EU가 아닌 미국, 영국, 캐나다는 나토와 중복된다.

비 대서양인 데가 EU나 나토 둘 모두와 무관한 존재는 일본이 유일하다. 이게 서구와 비 서구에 걸쳐 있는 일본의 위치이고 팽창주의를 지향했을 때 일본이 입맛대로 사용한 논리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는 친서구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서구적이고 가장 근대화되었다는 논리로 아시아 근대화의 맹주를 자임하며 제국주의로 변신했다. 1차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일본은 1920년대 자유주의와 경제 호황을 경험했고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1930년대에는 반 서구로 급속히 전환한다. 근대 서구 질서의 기본 개념인 시장경제와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며, 반 자본주의, 반 민주주의, 반 개인주의를 외쳤다. 대안은 아시아적 가치 즉 가족 공동체, 국가를 위한 충성, 국가의 자본 통제였다. 서구에 대항할 유일한 세력으로 스스로 위치 지우며 반 서구 전선을 짰다. 반 자본주의 및 반 개인주의는 블랙홀이었다. 상당히 역동적이었던 일본의 시민 사회, 극우 민족주의는 물론이고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진영까지 일본 군부 밑으로 집결했다.

경제력은 중국에 역전되었지만 21세기 일본은 여전히 국제 정치에서 서구에 가까운 경제 대국이다. 서구가 대중국 전략을 짤 때 일본을 중심축의 하나로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1월 바이든과 기시다의 온라인 회담은 이를 보여준다.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대통령은 일본 국방비 지출을 늘리겠다는 (기시다의) 결정을 환영했고 그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Readout of President Biden's Meeting with Prime Minister Kishida of Japan).
  

지난 1월 바이든과 기시다의 온라인 회담은 서구가 대중국 전략을 짤 때 일본을 중심축의 하나로 놓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백악관

 
일본 군사력 증가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 진 뒤 두 달 후인 G7 회의에서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발언권이 일본에 유일하게 주어졌다. 중국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기시다 총리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만났을 때 북한을 언급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리고 기시다 총리는 러시아를 최혜국 목록에서 빼고 우크라이나를 위해 1억 달러를 내겠다고 발표했다.

독일과 달리 일본에 대한 불안함은 가시지 않는다. 팽창주의 지향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친 서구 혹은 반 서구는 잣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 역사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대외적으로는 친 서구지만 일본은 반 서구를 표방하며 팽창주의를 지향했던 시기를 정리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친 서구가 중국 견제에 국한될 것일까. 징용 및 '위안부'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가 새롭지는 않지만 일본의 지정학적 지위가 빠르게 변하는 지금 일본이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원자력 놓고 상반된 태도

이번 G7 성명은 대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넣었다. 
 
이번 위기(우크라이나 전쟁)로 파리 협약과 글래스고 협약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더 강해졌다.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청정 에너지로의 전환에 속도를 냄으로써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억제하겠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 정책 전환을 불가피하게 만든 만큼 이를 기회로 삼아 기후 변화 문제 해결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도다. 단기간에 에너지 독립을 이루면서도 화석 연료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공동 목표지만, 영국과 독일은 원자력에서는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영국] 원자력으로 에너지 자급 달성 

에너지 안보 전략. 이제는 앞으로 평이하게 접할 표현이 될 듯하다. 지난 4월 7일 보리스 존슨 총리는 에너지 안보 전략(UK energy security strategy)을 발표했다. 전략에 따르면 원자력 발전소를 매년 한 개씩 2030년까지 8개 더 짓고 2050년에 이르면 전체 에너지 수요의 25%를 원자력에서 충당할 계획이다.  

보리스 존슨은 이번 전략의 궁극적 목표가 "에너지 자급자족"에 있다고 밝혔다. 영국이 조절할 수 없는 국제 에너지 가격과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러시아의 협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뜻이다. 러시아 가스·석유 의존도가 아주 낮은 덕에 러시아로부터 직접적 압박은 없지만 국제 에너지 가격 인상은 피할 수 없다. 현재 영국의 난방 비용은 54% 인상된 상태로 경고등이 켜져 있다.

8개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안은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예산을 마련해야 하는 재무부 장관이 난색을 표하고 있다. 기후 변화를 믿지 않는 보수당 일부는 더 쉬운 쪽이라며 '탄소 중립'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반면 환경론자들은 원전이 아니라 육상 풍력 쪽으로 더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전을 환영할 지역 사회가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가동 중단 앞둔 독일 최후의 원전 독일 RWE가 링엔에서 운영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18일(현지시간) 촬영한 사진. 독일은 올해말까지 링엔 원전을 포함해 남은 3개 원전의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다. 2022.3.20 ⓒ 연합뉴스

 
[독일] 에너지 주권 그러나 원자력은 아니다

24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대 러시아 에너지 독립은) 큰 문제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며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 밝혔다. 그리고 "(러시아 에너지 사용의) 즉각적 금지에 반대한다. 러시아보다 유럽에 타격이 더 클 것이다"라고 밝혔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부 장관에 따르면 현재 독일은 "미친 속도(insane pace)"로 에너지 독립에 총력을 쏟고 있다. 석유는 2022년 말, 가스는 2024년 중반까지 독립한다는 게 대략적 목표다. 표현 수위를 "에너지 주권"으로까지 올리며 3월 초 2026년까지 무려 2200억 달러(약 250조 원)를 산업 및 에너지 구조 전환에 쏟아붓는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은 왜 '에너지 주권'을 러시아에 넘겨주었던 것일까. 미 독립 탐사매체 <프로퍼블리카>의 알렉 맥길리스 기자는 이것이 독일의 안일한 판단이 아닌 계산된 외교 전략의 일부였다고 설명한다. 공허한 언어가 아닌 파이프라는 구체적 실물로 러시아를 유럽 경제에 깊숙이 연결해 놓음으로써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60년대 말 시작된 독일의 '러시아 끌어안기'는 성공적이었다. 미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도 서독은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로 구동독과 구소련을 대했다. 이 접근은 2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냉전 질서 붕괴 때 빛을 본다. 한국이 넘지 못한 벽을 독일은 무리 없이 외교적으로 넘어 통일을 이뤘다.

이후 신자유주의에서 통일 독일은 유럽의 맹주로 성장했다. 특히 메르켈은 유일하게 푸틴을 상대할 수 있었고 친난민 정책으로 도덕적 지도력까지 확보했다. 지난 2월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했을 때 아무도 나치를 떠올리는 이가 없었다. 국제적 환영 속에 독일은 2차 대전과 냉전, 독일이 안고 있던 역사적 한계에서 벗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의 실용주의가 놓친 부분이라면 에너지 의존도를 과도하게 높였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원자력 포기를 선언한 이후다. 즉각 러시아와 단절해야 한다는 국제 사회의 압박에 원전 회귀를 잠시 고려했다는 말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원전 포기를 고수하고 있다. 대신 전기차 충전 기술, 수소 에너지, 액화천연가스, 열펌프 난방기 보급 등에 집중하고 있다.

문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지난주 영국 보리스 존슨은 대러 강경파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온건파 숄츠 독일 총리를 초대해서 러시아 에너지 사용 종료 시점에 대한 합의점을 찾으려 했다. 두다 대통령은 즉각적 중지를, 숄츠 총리는 점진적 중지를 원했다. 숄츠 총리가 구체적인 날짜를 내놓지 못함으로써 성과 없이 끝났다. 

영국과 폴란드의 부상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 오른쪽)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4월 9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내에서 회담을 하는 동안 걷고 있다. ⓒ AP=연합뉴스

 
3월의 유럽은 흥미롭다. 독일이 에너지 문제로 움츠려 들어 있고 프랑스가 대선으로 정신없는 동안 EU와 사이가 '나쁜' 영국과 폴란드가 부상했다. EU와 통상 갈등 중인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 9일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폐허가 된 키이우 거리를 살피는 모습을 전 세계로 보냈다. 이로써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고립된 이미지와 위축된 반경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폴란드는 더 극적이다. '반민주주의적' 정책으로 EU 제재를 받고 있는 데다 작년 G20에서 통과된 다국적 기업 최저 세율 15% 적용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져 EU 차원의 개혁에 발목을 잡고 있다. 하지만 전쟁 후 250만 명의 난민을 수용해 '우파 포퓰리즘 정권'에서 인도주의적 정권으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3월의 유럽은 한국에도 두 가지 시사점을 주었다. 하나는 "주권"이나 "자급자족"의 개념과 결합하는 자원 문제로, 한국도 늦지 않게 대중 의존도가 높은 자원을 점검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움직이기 시작한 일본에 대해 주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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