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한다. 지난 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서 독일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인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와 과거 청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쳤다.
 
나치 독일에 의하여 대량학살된 유대인 희생자의 숫자는 약 600만 이상으로 알려졌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은 익히 알려진 대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다. 하지만 전진성 교수는 "이런 대량학살은 한 두사람의 의지만으로 관철될 수 없다"면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대중적 동의와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유지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나치 전범과 부역자들은 정권의 흥망성쇠와 함께 사라졌지만, 단지 그들이 사라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전 교수는 '600만을 학살한 나치 전범들의 최후'라는 주제로 당시 독일에서 이러한 끔찍한 범죄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악이란 무엇인지'와 '과거의 청산과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하여 고찰했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 뉘른베르크에는 1920-30년대 나치 전당대회장인 체펠린 필드가 위치하여 나치즘의 거대 선전장이 되었다. 2차대전 이후에는 나치 전범재판이 열린 뉘른베르크 법원이 위치한 애증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치는 어떻게 집권에 성공했는가. 당시 독일은 1차대전 패망과 항복 이후, 짓밟힌 민족적 자존심과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까지 겹쳐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한 국민적 불만과 혼란을 등에 업고 등장한 것이 바로 나치당, 원래 이름은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었다.
 
이들은 게르만 민족 공동체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갔다. 나치는 "우리가 전쟁으로 힘들어할 때 이익을 본 건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
 
전진성 교수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살인의 산업화"로 비유하며 설명했다. 산업기술이 발달했던 독일은 치밀한 공정을 바탕으로 시간낭비없는 효율적인 학살을 기획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데는 선전과 선동(프로파간다)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제국선전부(RMVP)라는 조직이었다. 제국선전부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나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그 장관이 바로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선동의 대가'로 꼽히는 요제프 괴벨스였다.
 
괴벨스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홀로코스트와 전쟁의 당위성을 선동했다. '선동은 사랑과 같다.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 과정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거리를 정복할 수 있다면, 대중은 정복할 수 있다. 대중을 정복할 수 있다면 국가를 정복할 수 있다'라는 유명한 어록들을 남겼다. 유대인에 대해서는 '세계의 적, 문화의 파괴자, 인류의 기생충, 혼돈의 자식, 악마의 화신, 부패의 효소, 인류를 멸망시킬 탈을 쓴 악마'로 묘사하며 저주와 증오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나치는 '쇼맨십'에 능했다. 나치의 전당대회는 항상 하나의 거대한 공연처럼 치밀하게 연출되었다. 사람들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수 있는 밤에 열렸고 조명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띄웠으며 모든 하이라이트의 중심에는 항상 히틀러의 연설이 있었다.
 
특히 TV가 아직 상용화되기 전 나치가 영화라는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가장 유력한 선전수단으로 삼은 것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치는 극장을 통폐합하고 모든 영화 제작진을 일일이 지시 감독했다. 나치는 레니 리펜슈탈이 연출한 '의지의 승리'같은 작품들을 통하여 히틀러를 현대적 메시아로 신격화했다.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점령지역에 강제로 유대인들을 따로 격리하는 게토(Ghetto)를 설치했다. 철조망으로 봉쇄된 게토에서 유대인들은 사실상의 감옥생활을 했으며 식량마저 제한하여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속출했다.
 
하지만 게토는 시작에 불과했고, 나치는 1941년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며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모조리 제거한다는 유대인 말살정책을 제시했다. 다하우, 아우슈비츠 등 여러 강제 수용시설들을 건립하여 유대인과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강제노역과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됐다.
 
나치는 친위대 예하 기동학살부대(아인자츠그루펜)을 신설하여 유대인 사냥에 나섰다. 초기에는 숲속에서 유대인들을 단체로 살해하거나,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하고 총살했다. 후에는 트럭화물칸에 배기가스를 연결한 가스차를 발명하여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량학살법을 마련했다. 희생자들은 머리카락을 강제로 잘렸고, 죽은 뒤에는 금니까지 뽑혀 화장된 재는 비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더 끔찍한 것은 나치가 '존더코만도'라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어 동족에게 동족을 살해하고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3.4개월마다 똑같이 학살당하며 대원들은 교체됐다. 같은 유대인들에게 학살의 책임을 전가하려던 나치의 악랄한 계략이었다.
 
또다른 만행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이었다. 친위대 소속이었던 '악마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는 우생학을 맹신했던 히틀러과 나치의 비위에 맞춰 독일 혈통의 쌍둥이 출생률을 높이기 위하여 수용소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자행했다. 죽을 때까지 뽑을 수 있는 혈액의 양을 체크하거나 쌍둥이의 혈관과 기관을 붙여서 샴쌍둥이를 만드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생체 실험을 위하여 희생된 쌍둥이의 숫자만 약 1500명에 이른다고. 이처럼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들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동참과 치밀한 움직임속에 자행되었던 것이다.
 
나치 독일에게도 최후의 순간은 다가왔다. 연합군의 승리와 히틀러의 사망으로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히틀러의 측근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괴벨스와 힘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에 대한 인정도 반성도 없이 죽음으로 도피했다.
 
살아남은 나치 고위인사들은 1945년 11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전진성 교수는 여기서 전범들에게 내려진 죄목중 '반인도적 범죄'라는 항목에 주목했다. 패전국의 인사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잘못을 넘어 최초로 '도덕적 잘못'에 대한 처벌을 시도한 것이다.
 
대부분의 나치 전범들은 범행을 부정하거나 시켜서 한 일이라고 책임을 넘겼다. 살아남은 전범중 최고위 인사였던 괴링은 유일하게 범행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전쟁중 일어날 수 있는 일 앞에 누구도 떳떳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사과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괴링이 유일하게 유감을 표명했던 것은 유대인 학살이었다. "유대인 말살은 나의 기사도 원칙에 위배된다. 나는 여성을 존중하여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기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여성과 어린이가 아니면 유대인을 살해한 것은 아무 문제없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오른 전범 24명중 괴링을 포함한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교수형을 거부하던 괴링은 자살로 먼저 생을 마감했다. 1946년 10월 나치 전범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전진성 교수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역사적 의미로 "평화주의-민주주의-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나치전범을 처벌한,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로 규정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승전국이 패전국을 처벌하는 구도이기에 '독일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소수의 나치 전범들만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치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재판이었기에 인도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할 유대인 학살사건이 심도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살아남은 많은 나치 전범들은 남미 국가로 도피했다. 여기에는 생체실험을 주도했던 멩겔레도 포함돼 있었다. 멩겔레는 1979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수영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멩겔레의 유해는 브라질의 한 대학에 법의학적 표본으로 사용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가 죽은 뒤에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치 친위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도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여 피생활을 이어갔으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의하여 결국 15년 만에 체포됐다. 아이히만은 법정에 섰지만 자신은 공무원으로 시킨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사형산고를 받을 때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이자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바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라는 책을 집필했다. 여기서 등장하여 유명해진 키워드가 바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아렌트는 "악이란 뿔달린 악마처럼 괴기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명령(대학살)에 저항하지 않은 아이히만이 유죄라면, 악행을 방조한 당시 독일 국민들은 모두 공범일까? 아이히만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범죄행위를 저지른 인물이기에 유죄이며,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괴물이 아닌 광대"라고 평가했다. 전진성 교수는 여기서 'Banality'라는 단어에는 천박함, 저속함, 속물적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하며 아렌트의 제시한 개념은 '악의 천박함, 저속함'에 가깝다고 해석했다.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
 
아렌트는 평범한 독일인들이 모두 죄인은 아니지만, '책임'은 느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인 중에서도 안톤 슈미트처럼 나치 독일 치하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유대인들을 돕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한 양심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인 판단을 할 자유가 있으며, 슈미트는 맹목적인 애국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독일은 늦었지만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과거 청산에 나섰다. 종전과 동서분리 이후 독일 사회는 '68운동'을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과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사뱌를 방문하여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과거의 악행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후로도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전범 기업들의 반성, 강제노역에 착취당한 피해자들의 집단손해보상소송, 1979년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전범들의 공소시효 폐지 등 독일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은 21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나치와 유대인 홀로코스트만이 아닌 그 이전 독일제국에서 자행된 나마-헤레로 대학살 등의 범죄들도 새롭게 조명받으며 사실인정과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과거의 불의를 망각하고 반성하지 않는 사회는 결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가 될수 없다. 우리가 칭송하는 독일의 과거 극복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고 구현하려는 데서 비롯됐다.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은 과거에 발목이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과거를 해방해야 미래도 해방될 수 있다. 
벌거벗은세계사 홀로코스트 과거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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