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05 05:59최종 업데이트 22.01.05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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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네트워크 넥스트 브릿지(Next Bridge)는 지식경제, 기후, 디지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등 전환의 시대를 직면하여 비전과 정책과제를 연구하는 포스트 386 세대(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서 90년대생 청년) 중심의 연구자·정책 전문가의 네트워크다. 넥스트 브릿지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회 지향과 정책과제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이 가능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정책담론을 위한 대중적인 소통을 희망하며 다양한 분야의 정책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의 정책과제를 가지고 매주 정책 칼럼을 연재한다.[편집자말]
내 둘째 딸은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저녁 문득 '왜 학교를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많은 말로 설득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목적 없는 '책가방 심부름'을 왜 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딸의 마음을 돌려세울 말을 찾지 못했다.

그 한 해 동안 딸은 요리학원, 요가학원, 체조, 바리스타, 미용사, 제빵, 제과 등등의 직업 세계를 탐색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게 수많은 질문을 하고 의견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한 끝에 그해 12월 다시 중2로 돌아가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그 후로 학교가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딸의 학교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고 이후 고교까지 무사히 졸업했다. 어느 날 문득 내 둘째 딸에게 찾아온 그 질문은 모든 청소년들이 묻고 싶은 물음이 아니었을까?

통계로 살펴보자면 우리 청소년들에게 비슷한 시기에 닥치는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삶의 에너지가 가장 끓어오르고 친구들과 함께 뛰어노는 일이 최고로 즐거운 시기인 청소년기에 아이들이 학교와 친구들을 떠나거나 심지어 세상을 등진다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세계 자살예방의 날인 10일 서울 한강 한강대교 보도 난간에 '누군가 내 곁에 있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020.9.10 ⓒ 연합뉴스


관련 통계에 따르면 매년 전국에서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이 5만 명이 넘고, 서울에서만 매년 1만 2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학교를 떠난다. 더 심각한 것은 매년 3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 세상을 이별한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코로나19로 학교가 전면 원격수업을 단행했던 2020년은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 이전 5년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신체적·심리적·사회적 격변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긴장과 스트레스, 불안과 방황을 경험하는데, 우리 학교는 이들을 더욱 각박한 경쟁과 끝을 알 수 없는 쳇바퀴 돌기 학습에 몰아넣는다. 자살과 학업중단뿐만 아니라 우울감, 자살 충동, 자해 및 폭력 등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예외적이지 않음을 여러 조사들은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답하는 교육 정책으로 우리 사회와 학교에 한국형 갭이어(Gap Year) 도입을 제안한다.

갭이어를 제안하는 이유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도입하고 2016년 전면 시행된 자유학기제는 우리 사회에서 중2병이라는 말을 어느새 사라지게 했다. 자유학기제는 한 학기 혹은 1년간 중학생들이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돌아보고, 다양한 직업세계와 삶의 현장을 경험해 자신의 관심과 소질을 탐색하게 했다. 이로써 단순히 학습동기 찾기를 넘어 자기 삶의 주체로, 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나라만의 성공 사례는 아니다. 아일랜드에서는 1974년 도입된 전환학년제를 통해 그리고 덴마크에서는 하나의 전통이 된 에프터스콜레(efterskole)를 통해 학생들이 중학교에서 고교 초기 기간에 1년 동안 자기 탐색, 직업체험, 진로설계 등의 시간을 가지고 친구, 사회 구성원과의 다양한 접촉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생활할 수 있는 힘과 태도를 기른다. 또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학습과 학교 생활을 원만히 수행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전환적 탐색의 기간을 갭이어(gap year)라고 지칭하고 있다.

내가 한국형 갭이어를 제안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중학교 자유학년제를 이어받는 고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중학교 자유학기제·학년제는 낮은 수준의 자기탐색과 진로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고교생들은 진학과 취업이라는 진로선택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탐색과 체험이 필요하다. 중학교 졸업 이후의 갭이어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자유학기제의 성과를 심화시켜 진학과 취업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탐색과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충분한 정보와 증거에 기반한 진로선택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갭이어 프로그램은 방학 기간을 활용한 2~6주 프로그램부터 한 학년을 지속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공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학생과 학부모는 보다 적실하게 진학과 취업 등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행복한 삶을 위한 다양한 경험과 탐색을 지원함으로써 청소년들이 함께 사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여러 연구에서 한국 청소년의 행복감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학업과 관계에서 오는 압박과 불안에서 벗어나 스스로 기획하고 경험하고 새롭게 만나고 관계 맺는 경험을 통해 삶의 의미와 생활의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주고 전환의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어른들의 의무

그렇다면 한국형 갭이어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한국형 갭이어는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졸업 사이에 다양한 기간별로 가능하도록 한다. 그리고 고교학점제와 연계하여 정규 교육과정으로 편입, 일정한 학점을 부여한다. 다만 대학입시 자료에서는 제외해 불필요한 경쟁과 오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갭이어는 진로교육센터, 진로체험지원센터, 각종 청소년 상담센터나 청소년 수련관 등의 공공 기관에서 설계하여 제공할 수도 있고, 학생이 스스로 기획하여 학교나 교육기관의 인정을 받아 수행할 수도 있다. 갭이어는 간단한 직업 체험, 여행이나 개인 프로젝트, 각종 사회단체 활동 및 기업 인턴십, 대안교육 이수, 각종 직업기술교육 이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기간별로 2주당 3학점 정도를 부여하여, 방학 중 6주 갭이어는 9학점, 한 학기 갭이어는 18학점 정도를 부여한다. 갭이어 가이드 한 명이 3~5명의 참여자를 모니터링하고 멘토링과 상담을 제공한다.

갭이어 수행에 필요한 경비는 일정한 한도에서 공공재원으로 지원한다. 한 학생에게 지원되는 평균 학교운영비가 연간 1천만 원 정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갭이어 참여 학생에게 한 주당 10만 원 정도, 한 학기당 150만 원 정도의 활동지원비를 지급해도 재정적으로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국내 최초의 고교 자유 학년제 학교인 오디세이학교 1기 학생들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독 도서관 잔디밭에서 함께 모여 있다. 2015.5.28 ⓒ 이희훈


우리나라와 같이 입시경쟁이 치열하고 사교육 시장이 과도하게 팽창된 사회에서 고교 시기에 이렇게 한가한 갭이어가 수용될 것인가 의구심을 가질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두 참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도 시행 후 여러 해 동안 겨우 1~2%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현재는 70~80%의 학생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나는 한국형 갭이어로 학업 중단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대신에 잠깐 학교를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계획을 세워보는 계기를 갖기를 바란다. 극단적인 선택에 몰리는 청소년들이 잠깐의 돌아보기와 새로운 자리에 서보기를 통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보듬어주는 공간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더불어 기존 체제의 쳇바퀴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많은 학생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아들, 딸들이 가슴 한 구석에 항상 담고 있는 이 질문 '왜 학교를 가야 하는가?'에 어른들의 설득과 훈계가 아니라, 청소년 스스로 묻고 탐색하고 답하고 체험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과 미래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하는 어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필자 소개 : 최승복은 교육부 공직자로, 현재 서울시교육청 기획조정실장으로 근무중이다. 플로리다주립대(FSU)에서 '차터스쿨이 공립학교의 학업성취도 및 인종분리에 미치는 영향 분석'으로 공공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순천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2015)했고, 숙명여대 및 광주교대 등에서 교육정책론과 진로교육론 등을 강의했다. 저서로 <교육을 교육답게, 우리 교육 다시 세우기>(2018), <포노사피엔스 학교의 탄생>(2020), 공역서 <교육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는가>(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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