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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읍 금구리에서 45년 간 옥천합동장의사를 운영해온 박종호·이수희씨
 충북 옥천읍 금구리에서 45년 간 옥천합동장의사를 운영해온 박종호·이수희씨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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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장례지도사나 장례식장이 흔치 않던 시절에는 장례를 치르는 일에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됐다. 수의와 상복을 만드는 일도, 먼 지역까지 부고장을 보내는 일도 이웃이 없다면 불가능할 일.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법한 까마득한 시절의 일처럼 들리겠지만, 채 50년이 되지 않은 일이다.

농번기에 상을 치를 땐 어려움이 더했다. 마을 사람들이 상갓집 일을 거들어야 하니 추수가 늦어지거나 수확에도 차질이 있던 것.

이런 어려움을 알아본 박종호씨는 충북 옥천종합상가에 장의사(葬儀社)를 개업해 마을의 장례를 돕고자 나섰다. 1976년 6월 옥천읍 금구리에 옥천종합상가가 막 생겨날 때의 일이니, 어느덧 박종호씨가 합동장의사를 운영한 지도 45년이 흘렀다.

1976년 6월 합동장의사의 문을 열다

"장례식장이 없던 시절엔 마을에서 상(喪)을 당하면 할 일이 많았어요. 특히 농번기에 상을 치를 땐 고생이 더 했지요. 적어도 5~6명이 종일 상가(喪家) 일을 거들어야 하니 추수가 늦어지고 수확에도 어려움이 있었죠."

우체국에 들러 상주(喪主)를 대신해 상주와 장지‧사망일시 등이 적힌 부고(訃告)를 작성하고, 목재소에 들러 관을 짜고, 조문객을 맞이할 음식을 준비하는 데만도 여러 명. 수의와 상복은 마을 어르신이 직접 만들고, 상여를 준비하는 데도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수의는 수의대로 관은 관대로 상여는 상여대로 전부 따로 해결해야 하니 힘들잖아요. 당시에는 면에서 읍으로 나오는 차편도, 길도 여의치 않아 새벽같이 출발하더라도 어려움을 겪었어요. 필요한 물품들을 한군데 모아놓으면 좀 편리하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대전에서 태어나 학업을 마치고 군 제대 이후 대전과 부산을 오가며 보세품 가게를 운영하던 박종호씨는 장의사를 시작하며 옥천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장례와 매장 등에 필요한 물품을 들여놓고, 좋은 다랭이(목재)를 가져다가 관도 직접 만들었다. 각 마을 이장들에게 엽서를 보내 개업 소식을 알리고, 장날이면 사람들이 오며 가며 구경하기만 두어 달. 새로운 장례 방식에 익숙하지 않던 사람들도 하나둘 가게를 찾기 시작하더니 점차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장날에는 준비한 물건이 일찍이 다 팔려나갔고 첫차가 도착하기 전에 가게 문을 열었는데도 그보다 더 일찍 손님이 찾아오는 일도 빈번했다.

고인의 노고 떠올리며 이어온 장의업
 
수의와 상복을 만들 때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삼베. 왼쪽부터 기계식, 안동포, 손삼베, 중국산 옷감이다.
 수의와 상복을 만들 때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삼베. 왼쪽부터 기계식, 안동포, 손삼베, 중국산 옷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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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희씨와 오랜 친구 재봉틀
 이수희씨와 오랜 친구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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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 팔면 다소 허름한 구석이 보이던 수의(壽衣)와 상복(喪服)도 옷감을 가져다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수의는 적삼, 속바지, 치마저고리와 고깔, 두루마기 등 성별에 따라 다르고 그 종류도 다양한데, 모두 직접 제작했다. 꽃잎 한 장 한 장을 오리고 접어 색을 칠하고 풀을 발라 꽃상여도 제작했다. 박종호씨의 든든한 동반자 이수희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 좋은 옷, 잘된 옷을 입혀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사다가 파는 것보다 섬세하게 만들어서 입혀드리고 싶었거든요. 재봉틀로 효건(孝巾)을 만드는 것부터 하나씩 배웠어요. 대촌리 어르신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고 상여 만드는 걸 배울 땐 금산으로 다니느라 바빴죠."

"뭣 하러 그런 이야기까지 꺼내느냐"고 말하는 박종호씨지만, 그도 일에 있어 누구보다 마음을 다했다. 마을마다 염습(殮襲)하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절차에 따라 처리하기 어려웠던 시절, 충청북도에서 주관한 장례교육을 수료하면서 염습 봉사를 자처한 것이다.

"무섭다고 생각해 못 할 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생전 고인의 노고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아요. 죽은 사람을 두고 '눈은 있어도 볼 수가 없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입이 있어도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죽은'보다 '사람'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됐습니다."

염습(殮襲)이란, 시체를 목욕시켜 수의를 입히고 관에 넣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중 습(襲) 이란 시신을 깨끗이 닦는 일을 뜻한다. 이후에는 시신의 입과 귀와 코를 막아 수의를 입히고 이불과 옷으로 시신을 감싸 끈으로 묶어 입관하는 염(殮)의 절차를 거친다. 지금처럼 장례식장이나 장례지도사가 흔치 않고, 가정집에서 상을 치르던 시절에는 이 절차를 체계적으로 맡아 처리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고인을 태운 상여를 마을 사람들과 지인들이 장지까지 함께 운반하는 운구(運柩)도 중요한 절차였다. 마을에 지나는 운구 행렬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쓸쓸함과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을 터. 이에 박종호씨와 이수희씨는 꽃상여를 제작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환히 밝혀주고자 했다.

운구 행렬의 가장 앞에는 대나무에 깃발을 달아 고인을 추모하는 문구를 적은 만장을 들고 고인의 관직과 성씨 등을 기록한 명정을 들었는데, 박종호씨가 붓을 들어 만장을 쓰고 꽃상여를 만들기도 했으니 그의 손이 장례 절차 곳곳에 닿아 있었다.

잊을 수도 없는, 지워지지도 않는
 
충북 옥천읍 금구리에서 45년 간 옥천합동장의사를 운영해온 박종호·이수희씨의 가게
 충북 옥천읍 금구리에서 45년 간 옥천합동장의사를 운영해온 박종호·이수희씨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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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온 동네 사람이 나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저도 특별한 마음은 없었어요. 그저 돌아가신 분을 위하고 유족에게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했지요. 그래도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일을 겪고 많은 것들을 보게 됩니다. 기억에 남는 고인도 몇 분 있지요."

성가를 불러줄 수 있겠냐는 요청에 한 곡을 다 불렀을 때 앉은 그 모습 그대로 숨을 거두었던 어르신도, 군서면 월전리 노부부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사연이다. 장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근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수습하러 간 젊은이의 쓸쓸한 모습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르고, 어린이가 죽어 아주 작은 관을 만들던 일은 영영 잊을 수 없을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무서움이나 기분 나쁜 감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누군가는 꿈에 나올까 무섭다고 하는데, 나는 오랜 기간 이 일을 하면서 꿈에 나온 적 한번 없었고... 아마 잘 때만큼이라도 편하게 잠들라고 누군가가 나를 돌봐주는 것도 같아요."

천주교 신자인 부부지만, 잊을 때면 찾아오는 행운은 누군가 두 사람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자식을 돌볼 새도 없이 바빴던 때, 두 아들이 속 썩이는 일 한번 없이 의젓하게 자라 의사가 된 것도, 자식들의 등록금을 낼 때가 오면 유독 바쁘게 일하게 된 일도 그렇지만, 2019년 12월 아들의 제안으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의 일은 좀 더 특별하다.

"아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들렀는데 오신 김에 건강검진이나 한번 받아보라고 그래요. 검진이 끝났는데, 아들 표정이 썩 좋지가 않아요. 식도에서 암이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식도암은 전이가 잘되고 생존율이 낮다고 해요. 그 말을 듣는데 하는 일이 이래서 그런지 나는 그냥 덤덤하더라고요."

12월 30일에 식도암 확진을 받은 박종호씨는 1월 17일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같은 것도, 아들의 대학 동기인 것도 그저 우연이라기엔 참 신기한 일이다.

"지금은 깨끗하대요. 1월 17일에 수술을 하고 항암 한번 없이 2월 8일에 퇴원을 했으니 발견부터 퇴원까지 두 달이 채 안 걸린 거지요. 퇴원하고 보니 마침 작년이 딱 윤년이라지 뭐예요? 윤년에는 산을 다스리는 신이 쉰다고 해서 산소(山所) 일을 많이 보거든요. 퇴원하자마자 바쁘게 일을 또 하게 된 거예요. 환자라는 생각 한번 못해보고 건강을 되찾았지요." 

장례,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이 핵심
 
박종호씨가 옥천군 유튜브 촬영에 임하는 모습
 박종호씨가 옥천군 유튜브 촬영에 임하는 모습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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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씨는 생소하고 멀게 느껴지는 장례 문화에 관해 젊은이들도 조금씩 배워나갔으면 한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준비 없이 상을 당할 경우, '마지막으로 고인을 위하는 일'이라는 업자들의 말에 휘둘려 큰 지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의 종류나 관을 짜는 나무 종류, 장례 절차 등은 천차만별이기에 미리 알아보고 상의해 준비한다면 비용에 따른 부담감보다 위로와 추모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것.

"갑작스레 일이 닥치면 너무 큰 비용 때문에 돈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조금 아끼려는 마음이 죄책감을 불러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간을 갖고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준비해두면 걱정도 줄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지요."

사람이 사는 공간과 사람이 묻힌 공간을 동시에 바라보는 직업을 가진 박종호씨는 대청댐 수몰에 대해서도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가게 매출은 '이례적인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우리 지역의 아픈 역사 대청댐 수몰이 벌어진 때다.

"사람이 살던 자리도 물속에 잠겼지만, 묘지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효(孝)를 중요시하던 때이니 묘지 이장은 당시 아주 큰 문제였을 테지요. 많은 주민이 이장으로 인한 많은 고민을 갖고 가게를 찾아왔어요."

이장에 필요한 칠성판은 장이 돌아오는 주기인 5일 만에 20~30개 이상씩 팔려나갔다. 물건을 넉넉히 들여도 팔 물건이 부족한 날도 있었다. 매출은 흑자를 거듭했고,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기였지만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직접 겪으며 박종호씨는 봉사하는 삶을 살리란 생각을 굳혔다. 이웃의 덕으로 수완을 올린 만큼 지역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품은 것이다.

1980년부터 활동한 라이온스클럽에서는 지대위원장과 회장을 거쳤고 30년 가까이 활동한 의용소방대 소방 대장도 역임했다. 몇 차례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걸 지켜보면서 보다 안전한 곳으로 가스 시설을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지역 교육을 위한 지역 현안 토론회 등에서도 활발한 목소리를 내왔다. 2004년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을 때에는 원활한 전자상거래를 위해 홈페이지를 제작·운영하는 상가번영회 IT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 장례식장이 늘어나고 장례지도사라는 직종도 새롭게 생겨나며 자연스레 일이 줄었다. 가게를 가득 채웠던 물건도 점차 비어가고 올여름부터는 상여 판매도 그만두었다. 요즘 박종호씨가 하는 일은 주로 이장(移葬) 혹은 개장(改葬)과 관련된 일. 관리가 어려워진 조상의 묘지를 납골당 등으로 옮기거나 연고 없는 묘지를 처리하는 것을 돕는다.

"자리는 그대로지만, 제 몫도 세월과 문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있다고 믿어요. 이제 일은 조금씩 내려놓고 여유를 배우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장례 문화도 바뀌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전처럼 많진 않을 테지요. 아마 전과 같은 호시절은 오지 않을 겁니다. 나는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지역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을 내 몫이라 여기고 살아갈 겁니다." 

월간옥이네 통권 54호(2021년 12월호)
글‧사진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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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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