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9 19:06최종 업데이트 21.12.1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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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정의당(민정당) 전두환 후보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년도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선에서 손쉽게 승리한 그였다. 그랬던 그가 6개월 뒤의 또 다른 대선에서 90.2% 득표율을 기록하며 가볍게 당선됐다. 민주한국당(민한당) 류치송 후보는 7.7%, 한국국민당 김종철은 1.6%, 민권당 김의택은 0.5%를 기록했다.

1979년과 1980년에 12·12 및 5·17 쿠데타를 연달아 일으킨 전두환은 1980년과 1981년에 연달아 대통령 선거를 열어 2년 연속 당선됐다. 1980년 대선 뒤에 유신체제 하의 제4공화국 헌법을 청산하고 7년 단임제의 제5공화국 헌법 하에서 1981년 대선을 치렀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당선은 보름 전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때 사실상 확정됐다.


선거인단 선거 이틀 뒤에 발행된 1981년 2월 13일 자 <조선일보> 1면 좌단 기사에 따르면, 당선된 선거인 5278명 중에서 69.65%인 3676명이 민정당 소속이었다. 그다음으로 무소속 당선자들이 1123명(21.28%)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민정당 소속으로 간주됐다. 선거운동 기간에 전두환 지지를 표방한 무소속 후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민정당과 무소속을 합하면 90.93%였다. 위 기사는 "25일 실시될 대통령 선거에선 전 후보가 90%에 육박하는 절대적 지지로 당선될 전망이 짙어졌다"라고 전망했다.

민정당은 대통령 투표권을 가진 선거인들에게 '정신교육'이나 '기합'을 주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선거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간담회 명목으로 선거인들이 각지에서 소집됐다. 민정당이 표 단속을 할 기회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2월 16일 자 <동아일보> 3면 상단은 "선거인 선거의 개표 결과가 확정된 다음날인 13일부터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는 선거인 간담회는 전국 각 시·구·군별로 13일 10개 지역, 14일 83개 지역, 15일 6개 지역, 16일 1백21개 지역 등 모두 2백21개 지역에서 끝났으며, 17일의 1개 지역을 마지막으로 모두 완료된다"라고 보도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전두환은 대단한 여유를 보였다. 1월 24일 맨 먼저 후보 등록을 마친 그는 선거운동보다는 해외 방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로널드 레이건 신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신경을 쏟은 것이다.

후보 등록을 마친 날 밤 24시(25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한 그는 28일 미국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갓 취임한 레이건의 첫 정상회담 파트너가 바로 그였다. 그래서 그는 매우 즐거운 상태로 대한민국을 이륙했다.

박정희의 핵개발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던 한국에서 전두환이 등장해 미국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신임 미국 대통령의 '1번 손님'이 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

1월 28일 자 <매일경제> '대통령 각하 안녕히 다녀오십시오'에 따르면, 전두환은 "기쁜 마음으로 귀국 보고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출국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 뒤 2월 3일(워싱턴 시각 2일)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7일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선거인단 선거 4일 전에 귀국했던 것이다.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여유를 보인 것이다.
 

전두환 레이건 정상회담(1981. 2. 3.) ⓒ 국가기록원

 
정주영의 감탄

그처럼 싱겁게 끝났다고 하여 1981년 대선을 소홀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일이 이 대선 때 있었다. 한도 끝도 없이 심화되는 한국 경제의 양극화를 부채질할 요인이 바로 이 선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 요인은 바로 신자유주의다. 재벌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한층 더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에 이 선거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올해 6월 <경제와 사회> 제130호에 실린 박찬종 광운대 교수의 논문 '한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전환은 경제 안정화 조치가 단행된 1979년으로부터 외환위기가 발발한 1997년 직후의 구조조정기에 이르는 2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라고 설명한다.

1979년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전환은 제대로 본격화되기도 전에 그해 10월 박정희 피살이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만약 이 상태에서 '서울의 봄'으로 대표되는 1980년의 민주화 열기가 대한민국 전체를 뒤덮어 대중의 힘이 강해졌다면,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전환이 더디게 진행되거나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을 수도 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정착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 전두환 등장과 1981년 대선이다. 이 대선은 전두환이 신자유주의 국가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가리라는 신호탄이 되었다.

대중과 자본가의 대결은 68 혁명과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전자 쪽으로 다소 기우는 움직임을 보였다. 두 사건은 미국과 유럽의 거대 자본가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방세계의 거대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질서 재편을 추구했고 1980년대 초반에는 공산권을 제외한 주요 국가들에서 이 이념이 정착됐다.

그런 세계적 흐름에 맞춰 전두환은 관치 주도형 경제에서 민간 주도형 경제로의 전환을 개시했다. 제12대 대선 운동을 앞둔 1981년 1월 12일 '새해 국정연설'에서 "경제는 원칙적으로 민간 주도에 의하여 운영되어야 할 것"이라며 "그렇게 해야만 기업의 체질이 강화될 뿐 아니라 창의력도 높아져서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겨나갈 수 있는 저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는 경제전략의 일대 전환을 선언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간 주도'가 '가계 주도'나 '노동자 주도'가 아닌 '재벌 주도'라는 점은 대선운동 기간에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 보인 반응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전두환을 수행해 미국에 가서 한미경제협의회 리셉션에 참가한 정주영 회장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전두환을 칭송했다.

'두터운 벽이 헐리고 새 장(章)이 <1>'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민간 주도 경제'에 대한 감동을 표시한 2월 5일 자 <매일경제> 기사는 정주영의 리셥센 연설 한 대목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 대통령은 6·25 이후의 참담한 한국 경제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성장 과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한국 경제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점을 실감나게 설명했지요. 특히 기업인의 창의력을 존중, 민간 주도 자유경제체제를 지켜나가겠다는 부분은 미국 실업인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주영 자신과 한국 재벌들이 품은 환영의 뜻을 '미국 실업인들이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는 말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비슷한 칭송은 대선운동 기간의 언론 보도들에서도 나타난다. 1월 27일 자 <조선일보> 칼럼 '민 주도 경제로 가는 길'은 이승만 시대의 경제에 대해서는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다고 평가하고 박정희 시대의 경제에 대해서는 "부익부·빈익빈·환경오염·과밀도시 등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혹평했다.

그런 뒤 "이제 새 시대를 전망하면서 과거의 비리를 청산하고 경제는 민간 주도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라며 "앞으로는 혼합경제 하에서 관의 명령에 의한 조절 기능이 줄어들고 시장에 의한 기능의 폭이 넓어지고 민간경제 활동의 이니시어티브와 자유가 보다 존중될 것이라고 본다"라고 다가올 전두환 시대를 전망했다.

전두환 시대의 경제가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경제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전망을 자신 있게 내놓은 것이다. 언론 통제가 극심했으므로 그렇게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재벌 대기업의 진심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자유'가 아닌 '재벌의 자유'를 존중하는 경제체제에 대한 기대감이 이런 성급한 전망을 낳은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에 더해 경제까지 사악

이렇게 1981년 대선은 전두환의 새로운 7년 임기를 보장한 선거였다는 점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경제전략을 본격화한 선거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는 재벌의 자율성을 더욱 증대해 대중과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을 한층 배가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영호남 지역갈등 이상으로 대한민국을 더욱 분열시키게 될 매머드급 양극화의 제도적 기반이 이 선거를 계기로 본격 정착됐던 것이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 전환은 전두환 정권이 재벌 대기업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이 정권이 미국 거대 자본가들의 환심을 사는 기회도 제공했다. 정통성이 약했던 전두환 정권이 국내외의 우군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명확해졌다는 점에서 제12대 대선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쿠데타와 5·18만 빼고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호남에도 많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과 달리 전두환은 쿠데타와 5·18뿐 아니라 정치도 사악했다.

그에 더해 경제 역시 사악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3저 호황을 잘 활용해서 경제가 망가지지 않도록, 경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은 성과"라며 전두환 시절의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노동자를 탄압해 임금인상을 억제함으로써 3저 호황의 효과가 일반 대중에게 가는 것을 차단했다.

게다가, 국가가 대중과 재벌 사이에서 공정한 중립자가 되지 못하고 더욱더 노골적으로 재벌 편을 들도록 만들었다. 그런 문제적 인간을 7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이 1981년 대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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