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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댜문형무소 수감때 김용원 선생(1930년 4월 15일)
 서댜문형무소 수감때 김용원 선생(1930년 4월 15일)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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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역 대표적 항일운동가' 

강산 김용원(1892~1934) 선생의 이름 앞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는 대전 서구 원정동 출신으로 4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휘문의숙(1913 입학)에 다닐 때부터 나라 잃은 울분을 토하며 독립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학생 때 쓴 여러 글에 "애통하고 애통하다", "아프고 통탄스럽다"며 나라 잃은 아픔을 표현했다. 그가 1915년 쓴 글에서는 "청년의 뇌수에 국혼을 쏟아 붓고 심신에 국성을 새겨 넣어 협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겉으로는 학업을 하는 유학생이었으나, 속으로는 국체를 회복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항상 학도들 가운데 뜻이 맞는 친구를 취하여 깊은 교제를 하였다. 간혹 충의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자주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고 격렬한 언동을 하였기 때문에 왜경들로부터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김유희, <강산 김용원 선생 사실기>, 1934년 7월)

선생은 휘문의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에는 일본으로 들어가 일왕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해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이어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군자금 모금 운동에 나섰다. 그는 1921년 상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의 후임으로 임시정부 경무국장(지금의 경찰청장)에 임명됐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다.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식 모습(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식 모습( 1921년 1월 1일)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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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임시의정원 상임의원을 맡았다. 그는 상임의원을 사임한 이후에는 중국의 무관학교(운남군관학교)에 입학해 무장활동을 통한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독립운동 중 병을 얻은 그는 고향인 대전으로 귀향해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하다 1924년 체포됐다. 

이후 김용원 선생의 옥살이를 살펴보면 일경이 얼마나 선생을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생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이 재발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병세가 좋아지자 안동지방 등지에서 동지를 모아 독립운동을 꾀했다. 그러자 일제는 1927년 1월 형집행정지를 취소하고 다시 체포, 공주형무소에 구속했다. 이후 강도교사죄를 추가해 2년 6개월로 형량을 늘렸다.

선생은 감옥 생활 중 다시 병이 재발했다. 이에 일제는 1927년 3월 병보석으로 석방했으나, 감시를 철저히 했다. 병이 조금 나아지자 1928년 11월 또다시 체포됐다. 이후 압송되던 중 일경을 때려눕힌 후 탈출했다. 논산에서 은신하며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본 경찰의 습격으로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선생은 수감된 지 5년 2개월 만인 1934년 2월에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하지만 그해 6월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용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전지역 내 상징적인 그의 독립운동사는 '짝퉁' 독립 운동가를 양산하기도 했다.

선생의 애초 묘소는 고향인 대전 서구 원정동 선산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덕군수가 새겨 만든 선생의 묘소 앞 공적비의 비문 원판을 누군가 통째로 떼어내 공적 내용에 '이돈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추가해 설치했다. 김용원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공적 내용을 뒤 바꾼 것이다. 이돈직은 당시 계룡건설 이인구 명예회장의 조부로 독립운동 행적이 증명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결국 이돈직 기념비 등은 모두 철거되었다. 
 
2019년 대전지방경찰청이 대전경찰청 별관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용원 애국지사 추모식'에 앞서 '김용원 홀' 현판 제막식을 개최하고 있다. 대전지방경찰청은 별관 대강당 이름을 기존 '무궁화 홀'에서 '김용원 홀'로 교체했다.
 2019년 대전지방경찰청이 대전경찰청 별관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용원 애국지사 추모식"에 앞서 "김용원 홀" 현판 제막식을 개최하고 있다. 대전지방경찰청은 별관 대강당 이름을 기존 "무궁화 홀"에서 "김용원 홀"로 교체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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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선생의 이름 앞에 새로운 접두사가 붙었다. 대전지방경찰청이 김용원 선생에게 '대전 경찰의 표상'이라며 행사를 마련했다. 당시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전경찰청 내 별관 강당 '무궁화홀'을 '김용원 홀'로 이름을 바꿨다. 

황 청장은 이날 추모식에서 "김용원 지사는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맡는 등 삶이 다하는 날까지 흔들림 없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다"며 "선생을 대전 경찰의 표상으로 삼아 얼을 기리고 숭고한 삶을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고향인 원정동 선산에 안장돼 있던 선생의 유해는 지난 2014년 6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묘비번호 525)으로 이장했다. 대전현충원에는 경찰 출신 애국지사 36위가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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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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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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