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7 18:30최종 업데이트 21.11.2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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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 호미곶 ' 상생의 손'. ⓒ 권우성

 
달리는 호랑이 꼬리에 올라탄 듯했다. 포항 일월사당에서 호미곶까지 21km 구간. 오부장골을 넘으면서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에 올랐고, 언나무재를 넘으니 술미재, 울기재... 왕복 2차선 929번 도로는 '업힐'의 연속이었다.

사실 호미곶은 자전거 내비게이션으로 동해안 종주코스를 입력하면 건너뛰는 구간이다. 포항에서 호랑이 꼬리를 뚝 잘라내듯이 31번 국도와 상정천변길을 타고 모포항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을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두 바퀴로 호랑이 꼬리를 밟고 그리듯이 해변에 딱 붙어서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했다.


"아이고, 1200m 오르막이네."

혼잣말로 한탄하면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서 고개 정상에 오르면 '1200m 내리막' 표지판이 피곤해진 내 허벅지 근육을 달랬다. 페달을 거의 구르지 않고 내리막을 질주하면 나타나는 항구마을과 해수욕장이 반가웠다. 해변마을 길을 달리면 어김없이 작은 하천이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났다. 이렇듯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에선 물고기와 사람, 길이 한데 모였다. 페달 속도를 늦추면 그곳의 문화도 엿볼 수 있다. 거리에 늘어선 간판은 그 동네 해안에서 잡히는 해산물의 메뉴이다. 마을길에 그려진 벽화는 대대로 그 지역을 지킨 사람들의 삶의 초상이자 역사였다.
 

페달을 거의 구르지 않고 내리막을 질주하면 나타나는 항구마을과 해수욕장이 반가웠다. 해변마을 길을 달리면 어김없이 작은 하천이 흘렀다. ⓒ 김병기

 
[호미곶] "백두산은 '코', 이곳은 '꼬리'에 해당한다"

호미곶면 구만리 마을회관 앞 아담한 2층 건물 앞에 서니 커다란 현수막이 나붙었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그윽한 향기를 온몸으로 지니면서,/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사명을 다 마친 듯이/고요히 머리를 숙이고/성자인양 기도를 드린다.(한흑구 수필 '보리' 중에서)

'한흑구 문학관'. 이것도 뜻밖의 만남이었다. 흑구 한세광 선생은 서정적 문장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하늘' '바다' '갈매기' '흙' 등의 작품을 남긴 그가 1939년 '흥사단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됐었고, 일제의 모진 회유와 협박에도 친일을 거부했던 12명의 작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았다.

구만리 보리밭 주변에 세워진 문학관의 문은 코로나19로 인해 잠겨 있었다. 입구 계단에 걸터앉아 자전거 음료수 거치대에서 텀블러를 꺼냈다. 흑구 선생이 그토록 예찬했던 보리를 달달 볶아서 끊는 물에 울이듯이...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면서 들이켰다. 부드러운 게 강한 것이다. 그는 부드러웠기에 지금껏 살아남았다.
 

‘한흑구 문학관’. 이것도 뜻밖의 만남이었다. 흑구 한세광 선생은 서정적 문장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 김병기

경북 포항 호미곶 '상생의 손'. ⓒ 권우성


호미곶은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일곱 번이나 답사해 측정한 뒤 우리나라 최동단일 것이라고 확인했다는 곳이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는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면서 명당으로 꼽았던 곳이다.

해맞이광장으로 자전거를 몰아 해변쪽으로 가니 호미곶 상징인 '상생의 손'이 동해를 배경으로 솟구쳐 있었다. 청동조각상을 하얗게 변색시킨 범인은 아마 엄지와 검지 끝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일 것이다. 해변에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의외였지만, 먹장구름을 떠받치는 육중한 청동조각은 이런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수면 위로 불쑥 솟은 청동상은 '난 살아 있다'는 간절한 외침 같았다. 그 깃발은 거친 파도에도 젖지 않았다. 홀로인 듯한 이 조각상에 '상생'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 그게 궁금했는데, 현장에 와서 알았다. 바다쪽 조각상은 1999년에 설치한 8.5m 높이에 무게 18톤이나 나가는 오른손이다. 왼손은 맞은편 해맞이공원에 설치돼 있었다.

해맞이 명소에서 하루 밤을 묶었지만, 다음날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해맞이광장을 나와 호미곶항으로 갔더니 입구부터 부산했다. '00수산'이라고 적힌 차들이 연신 항구를 나섰다. 배에 탄 어부 2~3명은 잰 손놀림으로 물고기를 골라냈고, 용기를 건네받은 사람들은 어선 옆에 바짝 댄 활어차 트럭에 실었다. 이들도 협력했고 상생했다.

"오케~~"

은갈치를 트럭에 수북하게 실은 한 외국인 털보 운전자는 해맑게 웃으면서 항구를 떠났다.

[구룡포] 일본인 이름 시멘트로 덮고 비석 거꾸로 세워
 

경북 포항 구룡포항. ⓒ 권우성

 
구룡포로 출발하면서 입맛부터 다셨다. 갓 잡은 신선한 꽁치를 섭씨 영하 10도의 냉동상태로 두었다가 겨울철에 바깥에 내다걸어서 냉동과 해동을 거듭하면서 말린 과메기. 다시마 토막으로 싸서 초고추장을 찍어먹으면 단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힘들게 도착한 본고장에서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과메기철이 아니어서였을까? 강구항 영덕대게처럼 구룡포 과메기 간판을 내건 가게는 많지 않았다. 대게집, 전복집, 국수집 등 다양한 메뉴가 거리에 나붙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라고 적힌 근대문화 역사거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낡은 지붕과 붉은 벽돌, 뻥뚫린 나무창살... 좁은 골목에선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가옥들이 남아 있었다.
 

경북 포항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 권우성

경북 포항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 권우성

경북 포항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 권우성

 

경북 포항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 권우성

 
가파른 돌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구룡포공원으로 오르는 길이다. 계단 양쪽 옆에 세워진 120개 비석에 붉은 글씨로 새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이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하는 충혼각을 세울 때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당초 비석에는 이곳에 집단거주하면서 공원을 조성했던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고 한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떠나자 주민들은 시멘트로 그 이름을 덮어버린 뒤 비석을 거꾸로 세웠단다. 그 뒤인 1960년에 구룡포 주민들의 이름으로 다시 바꾼 것이다. 역사는 덮는다고 사라지진 않는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게 바로 세우는 길이다. 구룡포 주민들은 바로 세운 역사의 거리를 관광 상품으로 판매했다.

과메기집을 찾다가 포기하고 일본인가옥거리의 한 식당에 들어가 불고기백반을 시켜먹었다. 과메기 몇 점이라도 밑반찬으로도 나오지 않을까? 나를 실망시킨 식당 주인은 내 행색을 보고 "어디서부터 자전거를 탄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왜 구룡포일까?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포"라고 말했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감이 각 마을을 순찰하는데 사라리 마을을 지날 때 별안간 천둥과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때 앞바다에서 열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데 한 마리가 떨어졌고, 나머지 아홉 마리만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는 이름을 붙었다고 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장중한 위세 앞에 오금이 저렸다"

식당에서 나오자 진흥왕 때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과 번개로 하늘이 두 쪽 나는 줄 알았다. 우비로 칭칭 싸맨 가방 속만 빼고 모든 게 흠뻑 젖었다. 바람은 많이 불었고 파도도 높았다. 손가락은 목욕탕에서 본 것처럼 비에 젖어 퉁퉁 불었다. 퍼붓는 비 때문에 안경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질 무렵, 31번 국도 고갯길을 오르는데 '구포휴게소' 간판이 보였다.

'커피와 토스트'.

간판 아래쪽 팻말에 적힌 글귀가 너무 반가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몸을 말리고 싶었다. 휴게소 벤치에 앉아 계란 한 개, 슬라이스 치즈와 햄 한 장이 끼어 있는 버터로 구운 식빵을 먹으며 커피를 마셨다. 온몸의 세포에 짜릿한 온기가 전해졌다. 몸은 금세 달걀 반숙이 된 것처럼 노근 노근해졌다.
 

구룡포에서 나와 해변도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도로 곳곳에 물 폭탄이 투하됐다. 방파제에 부딪친 파도가 솟구쳐서 도로를 덮쳤다. ⓒ 김병기

 
해변도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도로 곳곳에 물 폭탄이 투하됐다. 방파제에 부딪친 파도가 솟구쳐서 도로를 덮쳤다. 더 이상 젖을 데가 없는 나는 한번 지나간 곳을 두 세 차례 반복하면서 일부러 물 폭탄을 맞았다. 자전거를 타고 이런 길을 갈 수 있는 행운이 또다시 찾아올까? 파도와 비를 함께 뒤집어쓰면서 기뻐했다. 속으로 외쳤다.

"이게 바로 우중 라이딩의 맛이야!"

앞만 보고 질주하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그간 보아왔던 동해 해변이 아니었다. 흰색이 아닌 검은색, 모래사장이 아닌 검은 몽돌해변이 드러났다. 척사항, 감포항, 나정항을 지나 경주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직행하지 않고 감은사지삼층석탑 방향으로 틀었다. 비는 잦아들었다. 바람은 넓은 들판에 서 있는 벼 잎사귀의 빗방울을 우수수 쓸고 지나갔다.
 

경북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 권우성

 

경북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 권우성

 
대종천을 건너지 않고 우측 929번 도로로 접어들자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위용을 드러냈다. 흡사 푸른 산과 먹구름을 위아래로 반반씩 걸친 거대한 도화지 위에 웅장한 탑 두 개가 솟아오른 듯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니 석탑 꼭대기에서 1300년 넘게 버텨온 3m 높이의 철제 철간(쇠로 만든 기둥)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저 장중한 위세 앞에 주눅이 들어 오금에 힘을 쓸 수가 없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 쌍탑을 묘사했던 한 문장은 감탄사였다. 책 표지로 썼던 장면이다. 유 교수는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 삼층석탑에 투영됐다면서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다"고 적었다.

국보 제112호. 이 석탑은 감은사지 금당터 앞에 있는 쌍탑이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뒤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고 동해 바다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감은사를 세웠다. 그 뒤 신문왕 2년(682년)에 완성된 탑이다. 두 탑은 이후에 조성되는 신라 석탑에 양식적 토대를 제공한 한국 석탑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코로나 이전엔 학생들이 버스 대절해서 개미떼처럼 몰려왔는데..."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한 농부의 말이다. 그는 삼층석탑 앞의 도로 한편에 경운기를 세워놓고 삽을 들고 논두렁길로 들어섰다.

[문무대왕릉] 모래와 뒤섞여 구르는 검은 몽돌
 

경북 경주 문무대왕릉. ⓒ 권우성

경북 경주 문무대왕릉. ⓒ 권우성

  
대종교를 지나 고개를 오른 뒤 봉길대왕암 해변에 도착했다. 파도는 모래와 몽돌이 뒤섞여 구르면서 황토 빛을 띠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자글자글한 몽돌 위를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 밟는 소리가 났다. 해변을 따라 200여m 걸어가니 문무대왕 수중릉이 보였다. 바다쪽으로 200m정도 떨어져 있는 바위섬이다.

문무왕은 통일을 한 뒤에 자신의 유해를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했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외 정치상황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이곳에 재만 뿌렸는지, 유골함을 모셔놓은 건지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잠시 해변에 앉아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신령스러운 햇살이 문무왕 수중릉을 비추더니 오색 무지개가 떴다.

"차르르~ 차르르~"

거센 파도가 몽돌 속으로 스며들면서 소리를 냈다. 손으로 몽돌을 한 줌 쥐어 바닥에 쏟았더니 비슷한 소리를 냈다. 폭우를 뚫고 달려온 두 발을 물속에 담그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빈둥거리며 해찰했다.
 

호미곶 '업힐', 두 바퀴로 호랑이 꼬리 밟았다 해안선 1만리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첫 행선지는 동해안 고성부터 부산까지. 이 영상은 9편으로 영덕해맞이공원부터 포항 일월사당까지 두 바퀴 인문학 여정을 담았다. 관련기사를 보시려면 “호미곶 ‘업힐’, 두 바퀴로 호랑이 꼬리 밟았다” 기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김병기

 
[내가 간 길]
일월사당-호미곶-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감은사지삼층석탑-문무대왕수중릉

[인문·경관 길]
호미곶 : 한반도의 최동단,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에 있다. 일출 명소로 유명하며, 상생의 손은 사람의 양손을 청동으로 만들어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다.

구룡포항 : 일제강점기인 1923년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항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과메기로 유명하며, 일본인가옥거리가 조성돼 있다.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 국보 제 112호로 경주시 양북면 감은사 터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 신라 신문왕 때 완공된 것으로 두 개의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로 이루어졌다.

문무왕 수중릉 :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맞은 편 동해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신라 문무왕의 왕릉으로 유명하다.

[사진 한 장]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추천, 두 바퀴 길]
포항에서 호미곶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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