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7 07:23최종 업데이트 21.11.1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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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가을이 오면, 잎이 물들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사색이 깊어진다. 어떤 이들은 잎이 소멸하는 모습에 가을을 타고, 고독을 느낀다. 또 한껏 건조해지는 피부로 인해 각질이 일다 보니, 가을엔 어느 계절보다 빨리 늙어간다고 느낀다.
    

벚나무 단풍 낙엽 밟기도 미안할 만큼 아름다운 색채를 자아내는 낙엽들 ⓒ 최수경

 

단풍들어 떨어진 가로수 잎새들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도 가을의 소리이다. 낙엽 밟으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이 없듯,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 최수경

 
식물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잎이 물들고 지는 등 잎의 생애 주기를 매년 반복하며 계절의 변화를 반영한다. 최근엔 기후변화 영향으로 식생 변화가 앞당겨져 봄꽃이 일찍 피거나 개화 순서가 다른 꽃들이 동시에 피어난다. 또 가을 단풍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잎은 단풍이 들었건만 철 모르고 핀 철쭉 최근 이상기후로 인해 봄꽃이 가을에 피어나는 사례가 빈번하다 ⓒ 최수경

 
단풍은 토양, 유전, 질병, 기후 등 다양한 환경적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특히 기온과 빛의 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상청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의 단풍시작일을 기록하는데, 각 지점별로 관측 표준목을 지정해 나무를 통해 관측한다.
  

충남 금산군 행정리 은행나무 수령 300년으로 수형이 아름답다. 너른 들판에 한그루 우뚝 서 있는 모습이라 단풍 경관이 특히 아름답다. ⓒ 최수경

 
올해 설악산의 단풍시작일은 9월 30일로 평년의 9월 28일보다 이틀 늦었다. 설악산 단풍은 10월 26일 경 절정에 달해 평년인 10월 17일보다 9일이나 늦었다. 국립수목원은 현장 관측을 시작한 2009년 이후 우리나라 단풍 절정이 연평균 0.4일씩 늦어져 왔다고 밝혔다. 또 여름 기온이 1도 올라갈 때마다 단풍 절정이 1.5일 늦어진 것도 확인했다.  
 

단풍 든 단풍나무 신나무를 단풍나무라고 부른다. 가을에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나무이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속성을 대신하는 것이다. ⓒ 최수경

 
단풍은 나무가 겨울 채비를 시작하는 신호다. 잎이 물드는 것은 식물내의 색소체에 의해 발현되는 것으로 녹색은 엽록소에 의해, 노란색은 카르티노이드에 의해 드러난다. 엽록소의 분자들과 결합되어 있던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는데, 분해된 아미노산은 줄기나 뿌리에 옮겨져 보관된다. 이는 다음 해를 위한 저축인 셈이다.
 

충북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제 223호 은행나무. ⓒ 최수경

 
단풍이 붉은 색을 띠는 것은 안토시안이라는 색소 때문이다. 자고 나면 단풍색이 더 짙어지는 이유는 가을철 차가운 밤 기온의 영향이다. 찬 기온이 당분의 흐름을 가로막아 안토시안 생성을 쉽게 한다. 또 가을 햇빛도 당분의 합성과 안토시안의 전환을 촉진한다.
 

도봉산의 단풍 일반적으로 단풍은 계곡부의 단풍이 더 수려한 색을 발산한다. 다양한 수종이 혼재한 가운데 다양한 색채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 최수경

 
단풍은 잎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자, 단풍나무의 준말이기도 하다. '단풍이 들다'는 '물이 들다'라는 뜻이고, '단풍이 지다'는 '단풍이 나타나다'라는 뜻이다. 잎이 곱게 물드는 현상을 단풍이라 하다보니, 가을에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신나무를 단풍나무라 부른다. 
 

햇살에 반짝이는 단풍 충남 금산군 보석사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로 유명하지만, 가을 단풍도 찾는 이 많다 ⓒ 최수경

 
단풍 명산 중 하나인 전남 장성의 내장산을 찾았다. 단풍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평일인데도 인산인해였다. 붉은 단풍이 백양사 사찰 경내를 휘두르며 만다라 세계의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단풍에 열광하는 이유는 인위적인 색이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자연의 색이기 때문이다. 그 색의 변화무쌍함과 다양함은 인위적인 색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장산 백양사 단풍 단풍 명산 가운데 하나인 내장산은 중부 이남에서 손꼽히는 단풍관광지다 ⓒ 최수경

 
단풍은 가을철 특유의 색감과 화려한 미관으로 관광객을 모을 수 있는 경관자원이다. 색은 시각적으로 쉽게 지각될 뿐더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색채와 연결된 기억을 쌓는다. 색채에 대한 연상을 통해 일어나는 저마다의 고유한 감정을 갖게 된다.

나는 사계절 자연과 함께 하지만, 가을에 비로소 꽃이 아닌 나뭇잎이 만드는 색채의 향연을 통해 자연이 발산하는 매력에 빠진다. 오색은 적색, 황색, 청색, 백색, 흑색 섞임 없는 순수한 기본색을 말한다. 하지만, 이 색들을 기초로 창작되는 무궁무진한 색의 잔치이자 예술작품이기에 오색단풍이라 칭했을 것이다.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담양 소쇄원 가는 길 소쇄원 내 다양한 수목이 대나무와 어우러져 가을 단풍이 드니 대나무의 초록색과 어울려 조화롭다 ⓒ 최수경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봄 가을이 오면 봄꽃놀이와 단풍놀이를 다닌다. 이를 굳이 놀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동이 커서 감흥에 겨워 즐기고 논다는 뜻이다.
 

세종시 연기 세종리(구 양화리) 은행나무 고려 장군 임난수의 숭모각 앞에 있는 600년 수령의 구 양화리 은행나무(세종시 기념물 제8호) 암수 두그루. 세종시민들의 나들이 장소이자 나무 탐방을 위한 장소로 사랑받는다. ⓒ 최수경

 
우리 민족은 서리가 내리는 10월 23일 상강(霜降)이면 가을걷이를 끝낸다. 이후 단풍전선을 따라 전 국토에서는 단풍놀이가 한동안 이어진다. 상강 절기식으로 추어탕과 국화전을 해 먹고, 국화주를 마시며, 가무를 즐긴다. 코로나로 잠시 주춤하지만, 단풍철이면 팔도의 단풍 명산에는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주차장에서는 가무와 술판이 난무한다. 

이즈음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자체는 앞다투어 단풍을 즐길 명소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왕 명소를 찾을 때, 그 절정일을 알면 더 좋을 일이다. 메타세쿼이아,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이 밀집되어 있는 산림이나 가로수의 경우, 그 시기를 체계적으로 관측하고 변화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10월까지 초록으로 물들어 그늘을 제공하는 가로수경관이다 ⓒ 최수경

 
단풍 경관은 지역적 이미지를 결정한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길, 예산의 은행나무길, 내장산의 단풍은 가을철이면 으레 사람들이 찾는다. 산림과 가로수 외에도 시기별로 단풍이 드는 나무를 알고 식재해 관리할 수도 있다. 9월에 단풍이 드는 화살나무, 담쟁이 덩굴, 10월에 단풍이 드는 느티나무, 단풍나무, 오동나무, 11월 메타세쿼이아, 용버들 등은 단풍 절정일에 즈음해 또 다른 얼굴로 감동을 준다.
  

대전 우명동 느티나무 10월에 단풍이 드는 느티나무는 노거수일수록 수형이 반듯해 마을 어귀에서 눈길을 끈다 ⓒ 최수경

 

단풍이 든 담쟁이덩굴 건물에 녹색커튼 역할을 하는 담쟁이덩굴은 9월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 최수경

 
단풍 색은 지역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갖게 한다. 단풍이 매력있는 경관 자원이 되면 그곳은 문화공간이자 소통의 장이 되어 하나의 브랜드로 표현된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이 메타세쿼이아길을 통해 또 다른 브랜드를 갖게 된 예가 그것이다. 사찰의 가람배치부터 도시 계획까지 주변 경관이 부각될 수 있는 생태적 경관 활용이 권장되어야 한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대나무의 고장 담양이지만,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성장을 거듭할 수록 이 길이 문화와 소통의 길로 조명받으며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 송 국

 
단풍시기가 늦어지는 것은 기후변화가 식생의 생장리듬을 바꾸고 있음을 증명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단풍 놀이의 기회가 점차 줄고 있다는 말이다. 옛 사람들처럼 전통창살 한지에 단풍을 끼워 오래 감상할 창호도 더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다.
 

상주 구수천 옛길 백화산과 구수천을 따라 가는 트레킹 코스에 가을 단풍이 들었다 ⓒ 최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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