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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김경수 센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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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그 길을 다녔지만 전혀 몰랐다. 이곳에 '서산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가 있다는 것을. 인터뷰를 위해 주소를 받고 그곳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휠체어를 타고 경사진 언덕을 넘을 것을 생각하니 그냥 아득할 뿐이었다. 

걱정을 뒤로하고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잠시 후 눈에 들어온 승강기 내부는 휠체어 한 대도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괜히 타기가 미안하여 몸을 돌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좁은 복도를 돌아 올라가자 맞은편으로 화장실이 보였다. 센터 문을 열기 전에 먼저 화장실을 살펴봤다. 역시 좁다. 어떻게 이런 곳에 센터가 들어섰을까, 의아했다. 

하지만 '서산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김경수 센터장은 지난 25일 진행한 인터뷰에서 "환경적인 부분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사무국장님"이라며 "서산시 조례가 예전에 만들어져 현재 센터장, 동료상담가, 행정지원가가 일하고 있는데 장애인복지법과 충청남도 조례에는 사무국장 포함 4명으로 되어 있다. 직원 증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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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홍보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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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증장애인들이 생활하는 건물이 2층이면서 휠체어도 마음 놓고 들어가지 못하는 엘리베이터라니요. 시급히 바뀌어야 할 부분이네요. 먼저 '서산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는 어떤 곳인지부터 말씀해 주세요.

"우리 센터와 장애인가족지원센터는 맹정호 시장님의 공약사항으로 취임 초 급하게 진행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옮겨가야겠지요.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센터를 소개하자면 서산시에는 장애로 인해 집에서만 지내고 계신 중증장애인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저희 역할인 셈이죠. 시설에 있는 분들도 다시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요. 일테면 의존적인 삶에서 이제는 좀 더 적극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계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 센터가 하는 일입니다.

장애인분들 중에는 본인이 알아서 자영업을 하거나 일자리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 다양한 곳, 특히 기업에는 장애인 의무 고용제가 있으니까 그런 부분들이 좀 더 확대되기를 바라는데...

글쎄요. 여전히 장애인고용부담금을 내면서까지 고용을 하지 않는 관공서나 기업체가 많은 게 가슴 아픕니다. 하긴, 기업체에도 애로사항은 있어요. 장애인을 고용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중복적으로 대두되는 거죠. 가령 기본적인 시설을 개조해야 하는 것도 기업체가 직접 바꿔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차라리 벌금 내고 만다는 거죠. 이런 부분은 사회가 해줘야 할 부분인데 그게 안 되고 있어요.

어쩌면 지금이 과도기적이라고 봐야 하겠죠. 선진국의 사례를 본다면 외국에서 온 이민자도 후천적 '언어장애인'이라는 접근하에 일상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고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바뀌도록 노력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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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시절 축구선수생활을 했던 김경수 센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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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볼게요. 듣기로는 센터장님께선 후천적 장애를 앓았다고 하던데 무슨 사고였나요?
"저는 사고로 장애인이 된 건 아니고 질병으로 장애인이 됐어요. 서산중학교 2학년 때였죠. 갑자기 고열이 막 나는 거예요. 개인 병원에 다녔는데 감기 치료만 계속 해주더라고요. 그런데도 영 열이 내리지 않아요. 결국 응급으로 서울대병원으로 갔죠. 그곳에만 가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계속 검사만 하더라고요. 결국 '불명열'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불명열이란 적어도 세 차례 이상 체온이 38.3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발열 증상이 3주 이상 지속하고, 1주일 이상 입원해 있는 동안 진단을 위해 여러 가지 검사를 해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경우를 말하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열은 40도 이상 오르는데 약도 없이 그냥 퇴원시켜버리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제가 앓던 병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이었어요. 그때가 70년대이니 의술이 형편없던 시절이었죠. 중학교 때 그렇게 병치레를 하면서도 천안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생활했던 게 치명적이었죠. 그리움과 보고픔도 있었지만 하숙 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입학하고 그해 봄부터 걷지 못했어요. 벚꽃이 흐드러진 봄길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는데 그걸 참아내는 것도 무지 힘들었죠."

- 굉장히 예민한 시기에 아팠으면 몸도 몸이지만 마음고생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마음고생을 하느라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그때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만 안 갔어도 병의 진행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았을 것 같아요. 방학 때 집에 와서 첫날밤 자고 일어나니 바로 못 걷겠더라고요. 갑자기 통증이 얼마나 몰려오던지 정말 제 주위 한 1m만 사람이 접근해도 그때부터 온 뼈마디가 아픈 거예요. 통증이 그 정도로 엄청났어요. 중학생 때도 통증 때문에 결석이 잦았고요.

어쨌든 이래저래 걷지 못하다 보니 한 17년 동안 집에만 가만히 누워있게 됐나 봐요. 무지 억울했죠.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했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어요. 무조건 세상이 싫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시더군요. 어느날 문득 모친의 뒷모습을 보며 자식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봤어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억울했던 시간이 물러나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더군요. 참 이상하죠.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몸을 일으켜 휠체어를 탔어요. 이런 거 보면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아요. 참 간사하죠? 죽을 만큼 힘들다가도 하루아침에 감사기도가 나오니 말이에요."
 
- 역시 어머니의 기도가 센터장님을 살리셨군요. 그 사이 수술도 많이 하셨고, 대학도 졸업하셨어요. 경제적 자립은 어떤 식으로 하셨나요?

"비디오 가게를 했어요. 매형이 하던 걸 이어 받았죠. 사실 그때까지도 장애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온전히 다 받아들인 건 아닌가 봐요. 문득 저를 돌아볼 때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다시 슬픔 속으로 빠져들 때가 많았거든요. 비디오 가게가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가게를 정리하고 운전면허를 땄어요. 면허를 빨리 따야 혼자 서울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을 수 있잖아요. 여섯 번이나 대수술했어요. 무릎관절과 고관절을 잘라내고 인공관절을 끼우는 수술이었죠. 수술하기 전에 걸을 수 있냐는 제 물음에 의사 선생님이 해봐야 알겠다고 하시대요. 본인도 거기까지밖에 대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면서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죠.

물론 그동안 병원에 다니면서 늘상 듣던 대답이었는데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병원에서 퇴원할 때마다 화장실에 들러 실컷 울다 나왔었는데 그 소리에 또 무너지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래도 물러설 곳이 없잖아요. 그때 용기를 주신 분이 바로 재활의학과 이강우 선생님이셨어요. 미국에서 스카우트 해오신 분이신데 아주 유능하셨죠. "의지가 있으니 열심히 재활하면 너는 반드시 걸을 수 있어"라고 확신을 주는 거예요. 그분께 1년 이상을 치료받았어요. 물론 인공관절 수술도 했고요.

그 선생님 덕분에 조금 불편하지만 지금은 걸을 수 있어요. 하늘을 다 얻은 기분이었죠. 그러면서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서대학교 컴퓨터통신공학과를 입학했어요. 불편한 몸으로 4년을 다닌다는 것은 보통 정신으로는 힘들어요. 그래도 늦깎이 대학생이 농땡이 피면 안 되잖아요.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과수석으로 졸업했어요. 그때가 제 나이 마흔 살이었죠. 무슨 용기로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했는지 모르겠어요."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IL진영당사자 인사 참여시키고 당사자성 반영한 탈시설 로드맵을 구축하라'는 피켓을 들고 길거리로 나섰을 때의 모습
▲ 서산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시위 모습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IL진영당사자 인사 참여시키고 당사자성 반영한 탈시설 로드맵을 구축하라"는 피켓을 들고 길거리로 나섰을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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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거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보니까 손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컴퓨터통신공학과를 선택하게 됐을까요?
"이게 다 우리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이에요. 집에 가만히 누워있을 당시는 286컴퓨터가 나올 시점이었어요. 아버지가 어느날 아주 비싼 컴퓨터를 사 오신 거예요. 어차피 컴퓨터라는 게 독학으로 배우는 거잖아요. 또 학원도 당시에는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을 때고. 있다손 치더라도 몸도 성하지 않은 저로서는 배우러 간다는 게 그림의 떡이었지요. 책을 보면서 혼자 공부해 나갔어요. 그러면서 이런저런 자격증도 땄고. 그때는 사실 대학교 갈 생각은 아니었어요. 여건 되면 학원 가서 애들 가르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공부했죠.

그리고 강사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을 때 제 자신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저 같은 장애인은 취업도 맘 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을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취업은 포기하고 대학에 들어간 게 컴퓨터계열이었죠.
대학 생활도 신나게 했어요. 그리고 젊은 장애인들과 함께 봉사 모임을 만들었고요. 그렇게 활동하면서 어린이집에 근무하던 지금의 제 아내를 만났어요. 저는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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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프로그래머로 아내는 유치원 교사로 바쁘게 보냈던 시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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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터장님 말씀처럼 중도 장애를 입으면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겠어요. 그런 데다 제도적인 장치도 안 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어떤가요. 
"심적으로 큰 충격과 함께 환경적인 부분이 연동이 안 되니까 몇 배나 더 힘이 들죠. 실제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복지 제도가 아직은 너무 미흡해요. 특히 중도 장애를 입으면 이 분이 치료하고 재활해서 기존의 일터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요. 저는 그래요. 병원에서 장애 진단을 받으면 일상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치료-재활'에 낭비되는 시간이 엄청 많아요.

선진국은 장애를 가지게 된 분이 휠체어를 탄다면 화장실을 이용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개조해 주고, 휠체어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문지방을 낮춰주고, 경사로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고쳐주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바로 이어지는 게 너무 부럽습니다. 그것도 참 빨리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겠어요?
"옛날과 비교하면 복지는 상당히 좋아졌어요. 하지만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은 많습니다. 가령 이런 거예요. 장애인 연금은 기초급여가 30만 원 정도예요. 그리고 이것저것 지원되는 게 있잖아요. 고궁 입장료나 고속도로 통행료 및 주차요금 할인 같은 거요. 지역 장애인들이 이용을 많이 할까요?

차라리 할인해 주지 말고 장애인 연금을 좀 더 올려주고 그 돈으로 장애인들이 떳떳하게 돈 내고 들어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보완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중요한 게 장애인 인식 개선인데요. 관공서나 일반회사에서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 교육이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그러지 말고 중증장애인이 강사로 참여하여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장애이해교육에서도 장애인이 강사로 참여하는 교육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바로 시행되지는 못하겠지만 서서히 바뀔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서산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김경수 센터장, #장애인 권리보로, #장애인이 억울하지 않은 세상, #장애인 권익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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