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기>의 한 장면

<홍천기>의 한 장면 ⓒ SBS


SBS 퓨전 사극 <홍천기>에는 주인공을 보살펴주는 삼신할머니(문숙 분)가 등장한다. 생명의 신인 드라마 속의 삼신은 죽음의 신인 마왕과 대립하는 관계에 있다. 이 삼신은 화가 홍천기(김유정 분)가 출생했을 때는 물론이고 다 큰 뒤에도 계속해서 지켜보며 보호해준다.
 
삼신은 홍천기가 위험에 빠질 것 같으면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해 도움을 베푼다. 산속 길에 앉아, 지나가는 홍천기를 불러 세우며 '잠시 쉬어 가라'고 붙들어두기도 한다.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홍천기를 보호하고자 그랬던 것이다.
 
삼신할머니가 아이의 탄생과 양육을 지켜준다는 관념은, 낯선 할머니가 아이의 탄생과 양육을 지켜주는 내용을 담은 고대 신화와도 연결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편에 따르면, 박혁거세의 왕비가 될 알영이 용의 갈빗대에서 태어난 직후에 아이를 거둔 사람은 노구(老嫗, 연로한 할머니)로 표기된 할머니다.
 
1982년에 <여성문제 연구> 제11권에 수록된 최광식 효성여대 교수의 논문 '삼신할머니의 기원과 성격'은 알영을 거둔 할머니를 삼신할머니의 고대적 형태 중 하나로 해석하면서 "노구의 성격은 신모(神母)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며 "노구는 신모 자신의 현신(現身)이거나 신모가 알영의 양육을 부탁한 보호 신령이라고 파악할 수 있겠다"고 풀이한다.
 
신격을 가진 알영의 어머니가 할머니로 변신해 아이 앞에 나타났거나, 알영의 어머니로부터 양육을 위탁받은 신령이 그 앞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현존 삼신할머니의 성격과 일치"한다는 평가를 덧붙인다.
 
알영 앞에 나타난 여성과 유사한 인물은 탈해왕으로 불리게 될 이방인 석탈해 앞에도 출현했다.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편에 따르면, 동북쪽 해상에서 떠내려 온 갓난아이인 그를 데려다 키운 사람 역시 노모(老母)로 표기된 할머니다.
 
알영과 석탈해의 출현은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됐다. 그렇기 때문에 노구나 노모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신격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위 신화 속의 노구나 노모를 삼신할머니의 원형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알영이나 석탈해 사례와 달리, 세 여성이 나타나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나오는 화랑 김유신 사례가 그것이다. 기이 편은 "칠요(七曜, 일곱 별)의 정기를 받아 등에 칠성 무늬가 있었으며 또 신비한 데가 많았다"며 김유신의 출생을 신비하게 묘사한 뒤 화랑 시절인 만 17세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한다.
 
당시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 중에 백석이 있었다. 백석은 고구려·백제 점령을 꿈꾸는 김유신에게 은밀한 제안을 건넨다. "종놈은 공과 함께 저쪽을 은밀히 사전에 탐색하기를 청하옵니다"라며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할지 도모하소서"라고 말한다. 김유신은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여 한밤중에 백석과 함께 길을 떠난다. 국경 밖으로 정탐을 나간 것이다.
 
김유신과 백석은 도중에 두 여성을 만났다. 고갯길에서 쉬고 있던 두 남자에게 두 여성이 먼저 접근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네 사람이 함께 유숙한 곳이 오늘날의 경북 영천에 있었던 골화천(骨火川)이라고 말한다.
 
잠시 뒤 일행의 숫자는 짝수에서 홀수로 변한다. 또 다른 여성이 합류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김유신이 세 여성과 즐겁게 대화하면서 그들이 주는 과자를 받아먹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세 여성이 김유신에게 은밀히 말을 건넨다. 백석 몰래 우리끼리 숲속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김유신은 의심 없이 따라나섰다.
 
숲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세 여성은 본색을 드러냈다. 인간의 모습을 거두고 신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다. 삼신이 김유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내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化) 세 곳의 호국신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도령을 꾀어 이끌고 있는데도, 도령께서는 이를 모른 채 길을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도령을 붙들고자 여기에 왔습니다."
 
자신들을 경주 낭산 및 경북 청도 오리산과 더불어 영천 금강산의 호국신으로 소개한 세 신령은 백석이 적국의 첩자이니 따라가지 말라고 일러줬다.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은 김유신은 빠트린 서류가 있으니 돌아가서 챙겨오자며 발걸음을 되돌린 뒤, 집으로 돌아가 백석을 문초하고 고구려 첩자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백석의 목적은 김유신을 유인·납치하는 것이었다. 김유신이란 인물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될 것임을 고구려 태왕이 꿈을 통해 알게 되어 그런 일이 계획됐다는 것이었다. 김유신은 백석에게 형벌을 가한 뒤 삼신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온갖 음식을 갖춰 삼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삼신은 세 여성이 되어 김유신 앞에 나타났다. 이들은 소년기와 성년기의 경계선에 있는 김유신의 신변을 지켜줬다. 삼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은 고구려에 억류됐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됐다면 신라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위와 같은 고대 신화들에 나오는 여성 신이나 여성 삼신은 아이의 탄생을 돕거나 아이를 보호한다는 점에서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삼신할머니와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위 신화들 속의 여성들은 나라를 돕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한 일은 호국의 범주에 포함된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삼신할머니가 민간 가정의 수호신처럼 인식되는 것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드라마 <홍천기> 속의 삼신은 두 가지 이미지를 다 갖고 있다. 홍천기 개인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과 더불어, 왕실과 나라를 위협하는 마왕에 맞서는 역할도 하고 있다. 가정의 수호신과 함께 국가의 수호신 역할도 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에는 국가적 차원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던 여성 삼신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민간 가정의 수호신으로 굳어져갔다. 이런 변화의 본질적 원인은 삼신의 신자들이 정치권력을 잃은 것과 무관치 않다.
 
삼신 신앙은 한국 전통의 신앙이다. 이는 무속이나 샤머니즘의 요소도 갖추고 있다. 왕과 귀족들이 신자들일 때는, 이 신앙에서 추앙되는 신들이 호국신의 위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교가 전통 신앙을 밀어내고 왕실 종교로 승격된 뒤에는 전통 신앙의 신들이 호국신의 위상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들이 민간의 수호신으로 전환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물론 불교가 공인된 뒤에도 전통 신앙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됐다. 유교 원리주의자라 할 수 있는 개혁가 조광조가 1516년에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전통 신앙을 한층 더 배척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전통 신앙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이 단번에 호국신 지위를 잃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불교가 확산되고 유교 성리학이 퍼져나감에 따라 삼신은 호국신 지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삼신할머니가 한 집안이나 가정 차원의 신으로 자리매김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불교가 들어온 후 민족신앙인 삼신신앙은 차츰 쇠퇴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그러한 삼신신앙이 면면히 연결되어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간 지배세력은 불교를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기 위해 채용하였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민족 토착신앙이 말살될 수는 없었다."
 
삼신할머니가 호국신 이미지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한민족 정치권력이 석가모니를 받들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삼신할머니는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대중과 더욱 친숙한 존재로 변모해갔다.
 
삼신할머니는 고대에는 왕실이나 국가와 관련된 아이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진 데 비해, 후대에는 일반 대중의 아이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위상의 차이는 있지만, 아이들을 지켜주는 역할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홍천기 삼신할머니 삼신 신앙 김유신과 백석 호국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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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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