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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4일 오전 11시 1분]
 
검단정미소의 텃밭 모습. 숲과 숲 간에 경계가 흐릿하지만, 이 안은 생태계의 보고라 불릴 만큼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검단정미소의 텃밭 모습. 숲과 숲 간에 경계가 흐릿하지만, 이 안은 생태계의 보고라 불릴 만큼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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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수많은 씨앗이 사라졌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한 세기 지구농작물의 4분의 3이 소실됐다고 추산하고 있다.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경제 논리 속에서 우리 농민들이 예로부터 지어온 토종 종자는 이제 과거의 유산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작물을 보호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이 있다.

검단정미소는 인천 서구에서 토종 작물을 재배하고 이웃들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지난 30년간 농사를 이어왔지만, 본격적으로 토종 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다. 

지난 3일 오전 11시께 토종씨앗지역모임 검단정미소를 방문했다. 700평 남짓한 검단정미소의 작은 텃밭은 빈곤하지만 풍족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 여 종의 작물이 있었다. 고추, 가지, 대박, 호박, 땅콩, 여주, 노각, 여섯 종류의 벼, 세 종류의 깨 등. 일부는 토종이 아니지만 대부분은 토종을 고수하고 있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토종 종자를 보호하고 이를 이웃 농가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다소 투박하고 정돈되지 않아 보이는 이곳은 '생태계의 보고'라 할 만하다. 하늘에는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며 모기를 잡고 있고, 풀과 풀 사이에는 거미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며 해충을 잡는다, 또 땅 속을 터 잡아 사는 지렁이들은 땅을 마구 파헤치며 토양을 떼알 구조로 만들었다.

검단정미소를 운영하는 배현옥 사무장과 심현부 대표는 이곳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자연농법이란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며 농사짓는 방식을 말한다. 전통적인 농사법이라 할 수 있다.

배 사무장은 토종작물은 과거부터 내려온 작물이기 때문에, 옛 방식 그대로 농사를 짓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오히려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먼 옛날에는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검단정미소를 운영하는 심현부 대표. 그는 이곳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검단정미소를 운영하는 심현부 대표. 그는 이곳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 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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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은 대체로 전통 방식으로 자가 채종을 하고 퇴비를 직접 만들어요. 토종작물을 기르시는 어르신들한테 씨앗을 받을 때도 어르신들은 당신만의 농사법을 알려줬어요. 그러다 보니 저희들도 자연스레 전통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됐죠."

물론 전통농법으로 농사짓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견해가 많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아 관리할 것이 많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배 사무장은 처음 땅을 가꿀 때만 고생하면 그다음 농사는 훨씬 순탄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땅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배 사무장은 그 답을 미생물에서 찾는다.
     
"미생물을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쓸 데가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퇴비입니다. 퇴비를 만들려면 우선 미생물을 배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먹이를 미생물에게 줘야 해요. 이전에는 삶은 감자를 줬는데, 지금은 미강을 줍니다. 미강은 쌀을 도정하고 남은 껍질입니다. 감자에 비해 양분이 더 풍부해 미생물을 빨리 증식시키는 데 도움을 줘요. 이렇게 배양된 미생물을 6개월 정도 발효시키면 퇴비가 돼요."

퇴비를 뿌리며 밭을 가꾼 지 1년. 텃밭에는 마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생물은 토양을 부드럽게 해줬고, 부드러워진 토양은 지렁이가 자랄 여건을 마련해줬다. 그리고 지렁이들은 흙을 마구 헤집으며 토양을 떼알 구조로 만들어줬다. 배 사무장은 "덕분에 관리를 많이 하지 않아도 작물들은 잘 자랐다"며 내심 만족감을 드러냈다.

'슬로푸드'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토종작물
 
토종고추 음성초. 일반적인 고추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병충해에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토종고추 음성초. 일반적인 고추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병충해에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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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정미소에 식재된 백여 종의 작물은 각기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700평 남짓한 공간에 이렇게 다양한 작물들이 개성있는 특성을 유지하며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작물 하나 하나의 생태적 관계를 고려하는 전통농법 덕분이다.

산업화된 단작 체계에서는 한 밭에 10종류의 작물을 기르면 많이 기른다고 할 수 있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한 번에 살포하며 기르기에는 소품종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검단정미소에 식재된 토종작물은 각각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 배 사무장은 몇 가지 작물을 소개했다.

"저희가 기르는 토종고추는 '음성초'라고 합니다. 크기는 일반 고추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돼요. 자연농법으로 느리게 길렀기 때문에 그렇죠. 크기는 작지만 매콤하니 맛있습니다."

검단정미소에서 기르는 고추는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병충해 없이 잘 자란다. 고추가 빨갛게 물들어가는 시기에 비가 많이 내리면 발생하는 병이 탄저병이다. 음성초는 장마철이 끝난 뒤에야 빨갛게 물들기 때문에 탄저병에 걸릴 가능성이 적다.
 
검단정미소의 토종가지는 일반적인 가지와는 다르게 노란빛을 띤다. 처음에는 보라색이었다가 익으면서 알알이 노란색으로 여문다.
 검단정미소의 토종가지는 일반적인 가지와는 다르게 노란빛을 띤다. 처음에는 보라색이었다가 익으면서 알알이 노란색으로 여문다.
ⓒ 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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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작물이 과연 현대인들에게도 맞을까. 일반적으로 '슬로푸드'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토종작물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토종작물이 그런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비잡이콩이다.

"선비잡이콩은 물렁한 느낌이 있어 오래 불릴 필요가 없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잘 맞는 작물이라 할 수 있죠. 실제로 부드러우면서 달달한 맛도 나서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지요."

토종가지 역시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뽐냈다. 마트에서 볼 수 있는 가지는 모두 보라색이다. 그러나 검단정미소의 토종가지는 일반적인 가지와는 다르게 노란빛을 띤다. 처음에는 보라색이었다가 익으면서 알알이 노란색으로 여문다. 과피는 단단하며 산도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      

토종씨앗과 전통농업으로 생명 지키고 이웃과 나누려는 토종씨드림
 
700평 남짓한 텃밭에는 6종류의 벼가 심어져 있다. 모두 토종벼다. 토종벼를 도정하고 남은 미강은 미생물을 배양하는 데 활용된다.
 700평 남짓한 텃밭에는 6종류의 벼가 심어져 있다. 모두 토종벼다. 토종벼를 도정하고 남은 미강은 미생물을 배양하는 데 활용된다.
ⓒ 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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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씨앗은 구입하는 것이 아닌, 옛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거나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비료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인분이나 축분을 활용해 직접 퇴비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종자의 소유권은 농민들이 아닌 몇몇 거대 종자회사에게로 넘어갔다. 특히 세계 최대 종자 회사인 몬산토는 전 세계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의 90%에 대해 특허권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종자 시장의 1/4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문제는 거대 회사에서 개발된 개량종은 국내 기후환경과 맞지 않아 화학비료와 농약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개량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1970년부터 2013년에 이르기까지 국내 농약 사용량은 7배, 화학비료 사용량은 1.5배 가까이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종자 회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1대 잡종(F1) 품종은 우수한 종자끼리 교배해서 만들어진 잡종강세 종자지만 그 우수한 형질은 유전되지 않아 매번 새로운 씨앗을 구입해야 한다.

그 결과 과거에는 토지만 있으면 가족의 노동력으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던 농민들은 어느 순간 비료, 농약, 종자 등의 외부 투입재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농민들의 생산비 부담으로 이어졌다.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송원규 부소장은 그가 공저자로 참여한 저서 <한국의 먹거리와 농업>에서 "농민들의 직접 생산비 중 외부투입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30%에 달한다"며 농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지적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가 바로 '토종씨드림'이다. 토종씨드림은 토종씨앗과 전통농업으로 생명을 지키고 이웃과 나누려는 사람들이 2008년 결성한 비영리민간단체다. 후원 회원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이곳은 수집하고 증식한 씨앗을 매년 2회(봄/가을) 후원 회원에게 나누어준다.

2012년부터는 토종학교를 운영하면서 토종씨앗 재배법 및 전통농법, 채종, 육종, 종자 보존법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검단정미소는 토종씨앗지역모임으로서 토종씨드림과 연대한다.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서 수익성 좋은 작물을 전하고 싶어"
 
검단정미소에서 기르는 토종 땅콩. 당도가 매우 높아 현대인들의 입맛에 잘 맞는다.
 검단정미소에서 기르는 토종 땅콩. 당도가 매우 높아 현대인들의 입맛에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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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종자를 기르고 보존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토종종자를 널리 보급하는 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품종 자체가 전통농법에 더 잘 맞기 때문에 작물 생육을 빠르게 하는 화학비료나 영양제 등은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개량종처럼 '다수확'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소위 말해 느리게 키우는 품종이기도 하다. 즉, 토종작물은 수익을 얻기에 적합한 품종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토종작물 생산자들은 자급자족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배 사무장은 그런 와중에 어떻게 하면 토종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토종 작물을 고수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를 통해 수익을 얻기는 쉽지 않죠. 검단정미소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토종 품종을 선별해 실험재배 후 농부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합니다. 처음에 관심이 없던 농가들도 입소문을 타고 서서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검단정미소가 보급하는 종자들은 상품성의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토종고추 음성초는 크기는 작지만 영양가가 풍부하고 탄저병에 잘 걸리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토종 땅콩은 당도가 매우 높아 현대인들의 입맛에 잘 맞는다. 자주감자의 경우 로컬 푸드 매장에 출하되자마자 동이 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토종 종자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생업으로 하시는 분들까지 그걸 강요할 수는 없어요. 검단정미소는 토종 종자 중에서도 최대한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서 수익성이 좋은 작물을 농부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판매 목적으로 농사짓는 분들도 토종작물을 기르게 되기 때문이죠."

누군가에게 토종종자는 역사와 문화가 담긴 인류 공동의 유산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토종종자는 여러 종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기르는 종자가 토종종자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적당히 수익을 낼 수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안정적인 생산을 확보할 수 있는 토종씨앗을 건네준다면? 게다가 맛도 좋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일이기까지 하다면? 굳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검단정미소는 양자 간에 타협점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태그:#토종종자, #토종씨앗, #토종씨드림, #음식, #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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