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SNS에서 몸이 아파 유치원에 나오지 못했던 '흑인' '남자' '아이'가 오랜만에 등원하자 '백인' '여자' '아이'가 달려가 꼬옥 안아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주 짧은 영상이었는데, 난 그 영상을 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동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감동을 받았던 것도, 감동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것도 모두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몸이 아파 오랜만에 유치원에 나온 친구를 안아준 게 과연 감동받을 일이었을까? 아마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나의 편견이 그 당연한 장면을 감동으로 인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편견의 정체

그렇다면 우리의 한쪽 눈을 멀게 만드는 편견의 정체는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편견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사실 공정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공정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은 가진 자들이 원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과 차별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한 장면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한 장면 ⓒ SBS

 
편견은 '경험'과 '시간'이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낸 하나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편견도 자신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체계처럼 그 시작점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불에 크게 덴 적이 있는 사람이 불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수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편견이 시작된 애초의 이유는 사라지고 권력만 남게 된다. 아이들은 편견을 가질만한 경험과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에 어른에 비해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편견의 세상 위에서 편견과 함께 성장한다.

사회의 무게 중심이 구심력에 있던 시대에는 편견이 권력을 통해 유지되거나, 권력에 의해 소멸되었다. 장유유서, 가부장제, 전체주의 등은 편견이 권력을 통해 유지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심력이 구심력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시대엔 다양한 편견이 충돌하며 사회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뉴 노멀"을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의 브런치에서 "모더니즘" 다음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듯, "노멀" 다음은 "포스트 노멀"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편견이 권력과 결탁해 기준이 되고, 정상이 되는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우월해진 개인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주장한 결과 집단을 위해 존재해 왔던 기준과 정상은 빠르게 소멸되어가고 있다.
 
 Normal과 Post Normal의 영역

Normal과 Post Normal의 영역 ⓒ 채희태

 
편견과 편견의 경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슈퍼밴드2>를 보느냐고 물어본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유튜브도 <슈퍼밴드2>를 보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난 경쟁을 앞세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몹시 싫어한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리기 때문이다. 내가 <슈퍼밴드2>를 멀리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사실 출연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슈퍼밴드2>를 멀리하기 위해 유튜브까지 멀리할 수 없었던 나는 유튜브를 들락거리다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린지, 정나영, 은나경이 부른 "Don't look back"

린지, 정나영, 은나경이 부른 "Don't look back" ⓒ JTBC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웃고 있는 내 모습이잖아 / 굳이 착해빠질 필요는 없지 / you know this is a real me /  I'll say what I want to say / Everybody sing out loud / 들려줄게 나에 대해 / I'll do what I want to do / Everybody sing out loud / 들려줄게 나에 대해 / Don't look back (Don't look back 가사 중)

난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와~ 미친 거 아냐?" 20대의 어린 아티스트들은 미디어가 짜 놓은 경쟁의 무대 위해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편견의 시대에 굳이 착해빠질 필요는 없으며 자신의 얘기를 들어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린지의 거친 노래가, 그 거친 목소리 위에 얹혀진 가사가 나를 매료시켰다.

난 본방을 무시하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난 누가 더 재능이 있느냐가 아니라, 각각 다른 재능을 가지고 참석한 참가자들의 조합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전통적인 밴드 조합인 기타, 보컬, 드럼, 베이스, 키보드뿐만 아니라 밴드와는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DJ 프로듀서, 나아가 밴드와는 전혀 무관하게 존재해 왔던 클래식 피아니스트 오은철과 바이올리니스트 대니구, 클래식 기타로 이미 유명세를 얻고 있는 장하은과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인 거문고를 들고 나온 박다울까지... 단단한 찻잔 속에서 휘몰아치던 회오리들이 마침내 다른 찻잔 속의 회오리들과 어우러지기 위해 편견을 넘어 찻잔 밖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다울, 장하은, 오은철, 대니구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다울, 장하은, 오은철, 대니구 ⓒ JTBC

 
그들은 음악의 천재들일까?

그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모차르트의 환생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스며든다. 저들이 저 길 위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21살 정나영의 신들린 듯한 기타와 23살 은아경의 다이나믹한 드럼과 25살 린지의 절규하는 샤우팅을 들으며 그 아이들의 부모님이 느꼈을 불안함이 내 마음으로 전해졌다. 맘껏 자신의 재능의 펼쳐 보이는 현재의 모습은 부럽지만, 그러기 위해 겪었던 지난한 과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난 모차르트를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재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사람인데, 하늘이 내려준 그 어떠한 재능도 현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21세기(시간), 대한민국(장소)에서 음악을 접할 수 없는 집(환경)에서 태어났어도 그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어쩌면 대부분의 모차르트는 이 시대가 만든 편견 속에서 질식사했을지도 모른다. 슈퍼밴드 2에서 미친 듯이 연주하고, 신나게 두드리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 모차르트들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행히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부의 수직적 양극화와 복잡한 전문성의 수평적 분화는 강력한 편견이 되어 하늘이 모든 아이들에게 내려준 재능을 끊임없이 표준화된 감옥에 가두고 있다.

미디어의 새로운 실험, 경계의 파괴

미디어는 늘 대중들을 홀리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한다. 과거에는 소정의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미디어에 등장할 수 있었다. 안방 TV에 얼굴을 내비치기 위해선 방송사의 공채 시스템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연예인이라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현재에 대중들을 홀릴 재료가 없으면 과거에 있었던 것을 다시 끄집어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과거의 유행이 현재에 반복되는 복고, 영어로 레트로(retro)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미디어 권력이 공중파에서 지상파로, 지상파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미디어 권력의 영광을 다시 누리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일반 대중들에게 연예인이 되는 지름길을 열어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마치 콜로세움에서 경쟁하는 검투사를 지켜보는 로마시대 시민들처럼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아이들의 처절한 생존 게임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그 잔인함으로 인해 대중들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조금씩 멀리하게 되자, 미디어는 새로운 실험을 선보였다. 바로 편견이 만들어 놓은 단단한 경계를 파괴하는 실험이다. <슈퍼밴드2>에는 별 희한한 조합의 밴드들이 등장한다. 밴드라는 요건이 될 수 없는 조합이 기존의 편견을 깨고 더 밴드답게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심사위원 윤종신은 "이것도 밴드죠"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가 경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편견 때문이다. 경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쉽게 경계를 넘을 수 있다. 해방 이후 강대국 간에 펼쳐졌던 신념의 대립이 3•8선이라는 경계를 만들었고, 그 경계는 현재 서로를 두려워하는 편견으로 축적되고 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의 경계, 디지털 음악과 언플러그드 음악의 경계도 권력화 된 편견이 서로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그어졌고 지켜져 왔을 것이다. 그 편견의 경계가 편견에 의해 억압받아 왔던 20대 아티스트들에 의해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그렇게 무너진 경계의 폐허 위에서 편견을 깨고 나온 다양한 재능들이 만나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고 있다.
   
 기타 4대로만 밴드를 구성한 제이유나(어쿠스틱 기타와 보컬), 김진산(어쿠스틱 기타), 장하은(클래식 기타), 정민혁(일렉 기타).

기타 4대로만 밴드를 구성한 제이유나(어쿠스틱 기타와 보컬), 김진산(어쿠스틱 기타), 장하은(클래식 기타), 정민혁(일렉 기타). ⓒ JTBC


지금은 정보 빅뱅의 시대다. 강산을 변하게 했던 10년이라는 시간은 갈수록 '찰나'에 수렴되어 가고 있다. 정보의 무게 중심이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에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함의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타협하는 지점 안에 있었던 정보의 쓸모가 없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원심력에 의해 확장되는 정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보의 재료는 대부분, 아니 모두 이미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이다.

편견 안에 갇혀 있던 다양한 정보들이 경계 위에서 만나면 새로운 정보를 창조하는 재료가 된다. 그 재료에 갇히면 현실을 과거에 꿰어 맞추려 하는 교조주의자가 된다. 기준과 정상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는 포스트 노멀 시대에 편견의 이익을 누려온 기성세대가 해야 할 역할은 편견의 이익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편견과 편견 사이에 있는 경계의 벽을 허물어 주는 것이다. 그도 아니면 자신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들의 용기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거나.
슈퍼밴드2 편견 포스트 노멀 코로나 서바이벌 오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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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사회 현상의 본질을 넘어 그 이면에 주목하고 싶은 양시론자(兩是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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