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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군산은 제물포, 목포와 함께 '서해 3대 항구'였다. 군산은 임피와 옥구, 너른 평야를 끼고 있는 항구다. 호남의 대도시인 전주와 가깝고,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인 강경과도 가까웠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全群街道)는 1908년 개통했다. '최초의 신작로'로 알려진 이 길은 '수탈'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해 호남과 조선에서 수탈한 쌀이 일본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다.

식량 산지로 조선을 주목했던 일제에게, 군산은 쌀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최적의 항구였다. 조선 시대까지 포구에 불과했던 군산이, 일제강점기에 급속히 성장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군산이 '쌀의 도시'라 불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성보다 더 빨리 문을 연 군산도서관
 
전주와 군산을 잇는 길로, 1908년 10월 개통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최초의 신작로다. '전군도로'로 불렸고, 총 길이는 46.4km다. 1975년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번영로'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26번 국도다.
▲ 전군가도 전주와 군산을 잇는 길로, 1908년 10월 개통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최초의 신작로다. "전군도로"로 불렸고, 총 길이는 46.4km다. 1975년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번영로"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26번 국도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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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도시' 군산을 대표한 지주(地主)가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다. 구마모토는 독특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최대 지주는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총독부는 토지 조사를 시행해서, 소유 관계가 불명확한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대거 전환했다.

구마모토는 전라북도에서 조선총독부 산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사람이다. 1931년 무렵에는 식민지 조선을 통틀어 일곱 번 째로 땅이 많은 대지주였다.

군산은 1899년 개항했다. 개항한 지 13년만인 1912년, 군산에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호남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근대 도서관이다. 군산이 '군산부'로 승격하는 시기는 1914년이다. 부 승격 이전에 도서관이 먼저 문을 열었다.

1931년 발간된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 창간호는, '조선도서관일람'을 통해 당시 조선 도서관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군산도서관보다 더 빨리 문을 연 도서관은, 부산부립도서관(1901년), 사립인천문고(1911년), 순천도서관(1911년), 안성도서관(1912년), 4개뿐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도 1920년대 들어서야 공공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군산은 경성보다 8년 빨리 도서관이 개관했다. 군산에서 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개관 시기만 놓고 보면, 호남에서 순천도서관의 개관이 가장 빨랐다. 다만 순천도서관은 1930년대까지 장서가 500여 권을 넘지 않았다. 군산도서관은 1930년대까지 호남에서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유일한 도서관이었다. 부산부립도서관을 제외하면, 군산도서관이 책이 가장 많았다.

일본인이 지배한 '쌀의 도시' 군산
 
1930년대 군산부 모습이다. 포구에 불과했던 군산이 얼마나 빨리 도시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아키야마 주사부로(秋山忠三郞)는 1899년부터 1934년까지 군산의 역사를 정리해서 <군산부사>(1935년)를 펴냈다.
▲ 일제강점기 군산부 1930년대 군산부 모습이다. 포구에 불과했던 군산이 얼마나 빨리 도시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아키야마 주사부로(秋山忠三郞)는 1899년부터 1934년까지 군산의 역사를 정리해서 <군산부사>(1935년)를 펴냈다.
ⓒ 국역 군산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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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뿐만이 아니다. 전라북도에서 유일한 중학교도 전주가 아닌 군산에 있었다. 군산중학교가 그곳이다. 군산중학교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과 김일성대학 도서관, 중앙도서관, 인민대학습당에서 차례로 일한 석학이 바로 김수경(金壽卿)이다. 김수경은 군산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석학이자 도서관인일 것이다.

일제는 호남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도시를 육성하는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전주나 나주는 조선인이 많이 거주해서, 새롭게 이주한 일본인이 도시의 요지를 차지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에 전주 대신 군산이, 나주 대신 광주가 성장한 배경에는 이런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1933년 당시 군산 인구는 3만5535명이었다. 일본인 수는 조선인보다 적었지만, 소득은 훨씬 높았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목포보다 일본인의 인구 구성비가 더 높았다. 21명의 군산부회 의원 중 일본인은 15명이고, 조선인은 6명이었다. 군산부가 사실상 일본인에 의해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들어 본격적으로 성장한 군산은, 일본 식민도시의 전형적 특징을 지녔다. 일본 식민도시는 성(聖)과 속(俗), 2가지 영역에서 신사(神社)와 유곽(遊廓)을 뒀다. 군산신사와 군산유곽은 그렇게 들어섰다. 1915년 11월 세운 군산신사는 해망굴 근처에 있었고, 신사 광장은 지금의 군산서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군산 '경정유곽'(京町遊廓)은 지금의 군산 명산동(명산시장)에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군산도서관이 군산신사보다 3년이나 빨리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구마모토 리헤이다.

빈털터리였던 구마모토가 전북 최대 지주가 된 이유
 
일본 이키섬에서 태어난 구마모토 리헤이는 조선에 일찍부터 진출한 일본인 지주였다. 토지 브로커로 출발한 그는, 1차 세계대전 특수를 거치며 호남의 대지주가 되었다. 자신의 대농장을 기반으로, 1937년 '주식회사 구마모토 농장'을 세웠다.
▲ 구마모토 리헤이 일본 이키섬에서 태어난 구마모토 리헤이는 조선에 일찍부터 진출한 일본인 지주였다. 토지 브로커로 출발한 그는, 1차 세계대전 특수를 거치며 호남의 대지주가 되었다. 자신의 대농장을 기반으로, 1937년 "주식회사 구마모토 농장"을 세웠다.
ⓒ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제공: 이주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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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리헤이는 1879년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이키(壱岐)섬 이시다쵸(石田町)에서 태어났다. 이키섬은 규슈와 쓰시마 사이에 있는 섬이다. 구마모토는 시모노세키상업학교에 다니다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이재과(理財科)에서 공부했다. 게이오의숙은 '탈아입구'(脱亞入歐)를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학교로, 지금의 게이오대학이다. 게이오대학 도서관도 후쿠자와가 기증한 도서로 출발했다.

게이오의숙에 다니던 구마모토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의 전력왕' 마츠나가 야스자에몬(松永安左衛門)이 경영하던 고베(神戶) 후쿠마츠상회(福松商會)에 입사했다. 이 무렵 구마모토는 마츠나가 야스자에몬의 여동생 쿠니코(國子)와 결혼했다.

20대 초반이었던 1901년, 구마모토는 조선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게이오의숙 숙장(塾長)이었던 카마타 에이키치(鎌田榮吉)는 구마모토에게 조선 여행을 권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조선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조선 팔도를 유람하던 구마모토는, 군산 개정(開井)에 이르러 대규모 농장 사업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문제는 구마모토에게 땅을 사들일 돈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이재(理財)에 밝은 구마모토의 영민함이 드러난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오사카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에 조선 농장 사업의 가능성에 대해 기고했다. 글을 읽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모도야마 히코이치(本山彦一) 사장은, 구마모토를 불러 사업 계획을 들었다. 모도야마는 구마모토에게 투자와 토지 관리를 맡기기로 결정하고, 땅을 매입할 자금 3천 엔을 지원했다.

1903년 10월 자금을 마련해 조선으로 다시 건너온 구마모토는, 군산 개정면 땅 5백 정보를 사들였다. 한일 강제병합 7년 전인 1903년에는, 일본인의 조선 토지 소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구마모토의 토지 매입은 위험성이 높은 투자였다.

반면 조선 땅값은 일본 지가의 10% 미만이었고, 소작을 통한 수익성도 높았다. 조선에 발 빠르게 진출한 구마모토는 좋은 농지를 선점했다. 구마모토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도 군산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910년 말 구마모토는 소유한 땅을 1천5백 정보로 늘렸다. 7년 만에 소유 토지가 3배 늘었다. 해마다 그는 소작료로만 1만2천 석 이상을 거둬 들였다고 한다.

군산도서관 운영에 전기를 마련한 구마모토 리헤이
 
우리 근대도서관은 한일 강제병합 전부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문화 시설로 개관했다. 최초의 군산도서관은, 지금의 군산시 금동 2-3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해망굴 동쪽 출구 근처에 자리했다.
▲ 군산도서관 우리 근대도서관은 한일 강제병합 전부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문화 시설로 개관했다. 최초의 군산도서관은, 지금의 군산시 금동 2-3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해망굴 동쪽 출구 근처에 자리했다.
ⓒ 국역 군산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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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군산도서관 이야기를 해보자. 구마모토가 소유 토지를 늘리던 1910년대 초, 군산에서 도서관 설립이 추진된다. 군산도서관은 1912년 2월, 사토 마사지로(佐藤政次郞)와 도서관 설립 준비위원회가 장서 240여 권을 군산교육회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문을 열었다. 1912년 설립된 군산교육회는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강연회, 강습회를 개최했다.

1914년 6월 구마모토 리헤이는 농사조합사무소로 쓰던 건물과 비품을 군산교육회에 기부했다. 구마모토가 기증한 건물은, 38평 면적의 서양식 목조 2층 건물이었다. 당시 구마모토 리헤이는 조선 농민의 피땀이 어린 소출을 기반으로, 거대한 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미지 개선을 위함이었겠지만, 그의 기부를 계기로 군산도서관 운영은 전환점을 맞았다. 이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상당수 도서관은 일본인 또는 일제에 의해 유사한 과정을 거쳐 문을 열었다. 우리 근대도서관 상당수는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군산도서관은 장서 5천 권을 갖췄고, 예산 500여 엔으로 매월 신간을 구입했다. 회원제로 운영했고, 비회원도 회원의 소개가 있으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군산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해신동 주민센터 자리(군산시 금동 2-3)다. 해망굴 동쪽 출구와 가깝다. 점방산과 장계산, 월명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는 자리다.

이런 지세 때문에 군산신사와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안국사(지금의 흥천사)가 모두 이 근처에 자리했다. 일제강점기 군산의 주요 시설이 이 일대에 있었다. 해망굴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지휘소가 자리하며, 연합군의 폭격을 피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의 시대
 
군산교육회가 운영하던 군산도서관은, 1932년 ‘군산부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도서관은 군산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교육문화시설로 기능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영된 공공도서관이었다.
▲ 군산부립도서관 군산교육회가 운영하던 군산도서관은, 1932년 ‘군산부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도서관은 군산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교육문화시설로 기능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영된 공공도서관이었다.
ⓒ 국역 군산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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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도서관'은 1932년 군산부가 직접 운영을 맡으면서, '군산부립도서관'으로 바뀐다. 도서관 운영 주체가 '민간'(군산교육회)에서 '공공'(군산부)으로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산부는 1932년 8월 도서관을 이전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이 이전한 곳은 군산부청사로 쓰던 건물로, 한일 강제병합 전부터 군산 행정의 중심이었다. 군산부립도서관이 있던 위치는, 지금의 옛 시청광장 자리다.

당시 군산부는 3262원의 예산을 들여 도서관 건물을 이전했다. 군산부립도서관 1층에는 특별관람실과 신문관람실, 서고를 배치하고, 2층에는 남자 열람실과 부인 열람실을 두었다. 도서관 면적은 105.5평이었다. 1933년 무렵 도서관장은 후지타 키쿠지(藤田菊次)다. 그가 조선도서관연구회 회원으로 입회한 기록이 <조선지도서관>에 남아 있다.

군산도서관과 군산부립도서관의 입지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군산 '원도심'에서 도서관이 차지한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당시 도서관은 군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교육문화시설로 기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공공도서관이 도심이 아닌 주변부에 지어진 걸 고려하면, 일제강점기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도서관 입지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접근성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 공공도서관 입지는 일제강점기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

군산부립도서관은 책을 12가지로 분류했고, 1934년 12월 현재 장서량은 8851권이었다. 군산부립도서관 장서는 군산부문고(2619권), 전북문고(824권), 교육회문고(4346권), 오쿠라문고(525권), 일반문고(527권)를 합쳐 출범했다. 군산부립도서관 출범 이전에 군산부에 군산도서관(교육회문고) 뿐 아니라 '작은 도서관'이 여럿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산부립도서관은 '열람 문고'를 설치해서, 먼 지방까지 대출을 했다. 일제강점기 군산도서관은 호남 일대, 나아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서관 중 하나였다.

한편 1910년대 경기가 침체되자, 구마모토에게 농지를 맡겼던 여러 자본가는 그에게 농지를 팔았다. 구마모토는 고리대금업을 통해 돈을 갚지 못하는 조선 농민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토지 브로커'로 출발한 구마모토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특수로, 쌀값과 땅값이 크게 오르자, 전라북도 최대 지주로 부상했다. 구마모토는 전 땅 주인의 빚을 떠안고, 새로 구입한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소유 토지를 늘렸다.

1931년 말 구마모토는 오쿠라지경(大倉地境) 농장으로부터 전북 옥구군 땅을 사들여 3천5백18정보에 달하는 대지주가 됐다. 1천만 평(3천5백여 ha)에 달했다는 그의 땅은, 여의도 면적(75만 평)의 13배에 달했다. '구마모토의 땅을 밟지 않고 군산 일대를 다니기란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이로부터 나왔다. 군산과 정읍에는 지금도 구마모토 농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마모토 농장'(熊本農場)에 소속된 소작인은, 1936년 당시 2687명에 달했다. 구마모토는 49명의 직원과 67명의 사음(마름)을 두고, 피라미드 구조로 소작인을 관리했다. 소작료를 비싸게 책정하고 가혹하게 운영했기 때문에, 그의 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은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었다.

- 2편 '그들의 도서관'은 어떻게 '우리 도서관'이 됐나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구마모토리헤이, #이영춘, #군산시립도서관, #군산간호대학도서관,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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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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