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 포스터 영화 메인 포스터 이미지

▲ "자마" 포스터 영화 메인 포스터 이미지 ⓒ 엠엔엠 인터내셔널

 
1_이미지로 풀어내는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배의 풍경
 
<자마>는 영화 내내 헤어나기 힘든 수렁으로 빠져드는 스페인 식민제국 현지 중간관리자 디에고 드 자마의 일대기다. 이 영화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스페인 제국의 라틴아메리카 식민통치체제에 대한 감각적·학구적 이해가 일정부분 요구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 역사서를 쌓아놓고 씨름할 필요까지는 아니다. 그저 사전지식이 조금 갖춰져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좋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쏟아질 궁금증과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극장 문을 나선 뒤 꼼꼼히 참고자료를 검색해보면 해결 가능한 문제다. 영화는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의 중첩들로 주제의식을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저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을 알아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될 일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선두를 달리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뒤를 따른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의 식민제국 초창기를 다룬 영화들은 적지 않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1492 콜럼버스>와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 있다. 그리고 <자마>와 가장 근접한 구성과 전개를 가진 작품으로는 역시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를 들 수 있겠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라 통칭되는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정복 시기, "콩키스타도르(정복자)"라 불렸던 정복자들의 시대를 다룬 <아귀레, 신의 분노>가 탐욕에 눈이 먼 모험가들의 광기와 파멸을 다뤘다면, <자마>는 일정하게 초창기 정복시대가 마무리된 이후, 스페인 본국의 행정체계가 자리를 잡은 상대적 안정기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2_정복자의 전설 대신 행정 관료의 고단한 일상
 
"자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자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 인터내셔널

 
남아메리카 어느 구석진 스페인 식민지의 행정관 디에고 드 자마는 "페닌술라르", 즉 본국에서 파견 나온 스페인 본토 출신의 중간관료다. 그는 낯선 식민지에서 고단한 장기복무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근무지에서 자마는 국왕의 대리인 총독과 징세를 맡은 재무관 다음 위치로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고 있지만, 그의 재량과 권위는 딱 중간관리자의 그것에 머문다.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많고 조율해야 할 몫은 넘쳐나는데 실무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장기간의 외지 근무 때문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의 관계도 좋지 못한 상태다.
 
자마는 그가 처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출을 거듭 요청했지만 바라마지 않는 인사이동은 관료주의에 막혀 지지부진하다. 그런 권태로움을 그는 엽색행각으로 풀면서 근근이 버티는 중이다. 하지만 갈수록 이마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 원주민 여성이건, 흑인 여자노예건, "크리올(식민지 현지 태생)" 평민이건, 동료의 부인이건, 여인들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분거리는 추파에도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유혹을 던져보지만 여인들은 그의 애간장을 태우거나 자신의 페이스로 그를 상대하고 이용하며 이득을 취할 뿐이다.
 
자마는 중간관료로서 적절히 문제가 커지지 않는 선에서 이권을 취하려 시도하지만, 상급자건 하급자건 그를 존중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영화 내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관에겐 계속 지연되는 전출에 대해 스스로의 본분을 잊어버릴 정도로 짜증 섞인 요구를 거듭하고, 부하들에겐 비교적 적당히 대하지만 제대로 통제하거나 문제가 안 생기도록 고삐를 조이지도 못한다. 예전의 업무 의욕이 사라지고 자포자기해버린 자마의 현실인식과 느슨한 일처리는 점점 그를 고립시켜간다.
 
그의 인사권을 쥔 총독은 결국 그토록 원하던 자마의 전출명령 대신 자기만 훌쩍 떠나버린다. 신임 총독은 부임 직후라 그런지 하급자를 휘어잡기 위해 꼬투리를 잡아 행정관을 들볶는다. 자마가 한몫 이득을 보려고 뒤를 봐주던 상인은 전염병으로 느닷없이 죽어버려 그의 골머리만 아프게 한다. 이제 부하인 서기의 허물을 감싸주려다 상급자의 눈 밖에 난 그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마침내 반쯤은 도피, 반쯤은 발악적 시도로 공을 세워 전출, 아니 탈출하기 위해 자마는 악명 높은 도적 '비쿠냐 포르토' 토벌대에 참여하지만, 아마존 오지로 들어갔던 엘도라도 원정대들의 선례처럼 이제 자마 또한 그가 속해있던 유럽 식민통치 체제로부터 완전히 이탈하는 말로를 맞이하게 될 뿐이다. 영화 초반에 주변의 실제 평가가 어떻건 간에 식민제국의 통치를 실행하는 행정관이자 판사로서 위신을 상징하는 가발과 검을 착용한 채 허세를 부리던 자마는 결말이 다가올수록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3_한 식민지 관료를 통해 보여주려는 역사의 단면
 
"자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자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 인터내셔널

 
감독은 디에고 드 자마의 권태와 몰락 과정을 통해 스페인 식민제국의 안정기 시대상을 형상화하려 시도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탈식민주의 관점이 구현된 묘사의 형태로. 콜럼버스, 코르테스, 피사로 같은 역사책에 이름(어쩌면 악명)을 남긴 정복자들의 공로로 대영제국에 앞서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고, 비유럽 세계에 대한 서구의 "First Imfact"를 상징하게 된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침략 역사는 실로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불러왔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상상하듯 절대적인 힘의 우위도 차지하지 못했다.
 
물론 원주민 대학살과 금은보화 약탈만으로도 유럽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식민지배는 여전히 중세 봉건제의 변형에 가까웠다. 당시의 행정과 기술력으로는 지나치게 광대한 지배영역 때문에 겪는 애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숙제였다.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식민지는 주요 거점을 잇는 점과 선만 겨우 확보한 상황이었다. 그 장악력 바깥에 펼쳐진 광대한 면은 여전히 미 개척된 원시의 땅, 식민 지배자들에게 불가사의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자마가 겪게 되는 고난의 여정은 당시 스페인 식민 지배자들이 품고 있던 식민지의 어두운 그림자를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우화'로 기능한다.
 
거대한 식민제국은 그럭저럭 작동하면서 유럽의 변방이던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제국들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넘치는 부와 자국의 전성기를 가져다 줬지만, 그 과정에서 도구로 투입된 군인과 관료, 개척민들의 고초는 (식민 지배자에게 학대받은 원주민과 흑인 노예에 감히 비길 순 없겠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현지인들과의 무력 충돌과 풍토병 등으로 사망률은 엄청나게 높았다. 말단 행정관 자마가 처한 질식할 것 같은 업무환경은 바로 그런 딜레마의 종합 판이었던 셈이다. 대서양을 건너야하는 본국과의 교통은,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가장 선진적 관료제를 수립했던 스페인 제국의 방대한 행정업무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지체되고 관성화되기 일쑤였다. 누차에 걸친 말단 관료의 전출 청원 하나조차 신속한 개선이나 유연한 일처리가 이뤄지지 않는 영화 속 풍경은 오늘날 우리가 관공서에서 겪는 고충으론 감히 상상하기 힘든 수준일 테다.
 
반면,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식민지 현지의 사정은 실로 복잡다단하다. 식민개척자의 후예들은 "크리올"이라는 독자적 집단이 되어 식민지 사회에서 주류가 된 상태였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이권과 자치를 요구하며 중앙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 게다가 식민지 정부는 아직 오지에 남은 원주민들을 온전히 정복하는 것도 불가능했다(브라질 밀림 속으로 도망친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공동체나 칠레 최남단 마푸체 족의 영역은 식민제국 시절에는 끝내 정복되지 못했다). 영화 내내 마치 조선시대 그 실체가 모호했던 장길산이나 홍길동 같은 전설적 도적처럼 언급되는, '비쿠냐 포르토'의 존재는 그런 토착화된 백인 무법자들, 훗날 시몬 볼리바르나 호세 산마르틴 같은 크리올 백인 봉기의 지도자이자 독립을 쟁취한 라틴아메리카 개별 국가들에서 '해방자'로 불리는 이들의 원초적 형태에 가깝게 보인다.
 
역사에서 종종 발견하는 아이러니라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식민제국 중앙정부는 일차 정복이 끝난 후에는 봉건적 의무로 원주민을 (자국 주민으로 취급해) 일정부분 보호하고 무리한 추가 정복 시도는 비용문제를 고려해 자제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지화 된 백인들, "크리올"은 (본국의 봉건제도에서 유래된) 엔코미엔다 제도 아래서 중세 영주처럼 대농장 등의 특권을 누리려 했고, 이를 가로막는 본국의 행정조치를 틈만 나면 거부하며 무력화를 획책한다.

디에고 드 자마는 그런 시대상 아래 골치를 썩이던 중간관료의 전형인 셈이다. 본국에서 파견된 소수의 엘리트들은 그런 험난한 과업을 떠맡은 대신에 귀족의 특권을 수여받지만 낯선 땅에서는 온전히 그 수혜를 누리지도 못할뿐더러, 현지 백인들과의 대립만 격화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그 후과는 결국 식민지 백인의 본국 백인에 대한 독립투쟁을 촉발하는 붕괴의 서막을 앞당기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그 이후의 역사가 진정한 식민지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자명하다. 독립을 쟁취한 크리올 계층은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에겐 더 가혹한 억압을 일삼았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남미 각국의 (사실상 봉건영주의 현대화라 할) 대토지 소유 유력가문의 과두지배라는 대동소이한 사회체제의 기원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 점을 우리는 세계사 공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4_상징과 암시에 함축된 탈식민주의 담론
 
<자마>는 그런 식민제국의 균열을 행정관 자마의 몰락으로 그려내는 거대한 풍경화의 형태를 취한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세계는, 도식적인 제국 vs 억압받는 식민지 구도와는 꽤나 다르다. 실제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종종 발견되는, (기본 지배/피지배 체제 아래) 무한히 발견할 수 있는 예외적 사례들을 이 매력적인 우화에서는 마치 표본 추출하듯 등장한다. 물론 자마로 상징되는 스페인 식민제국 통치의 딜레마가 원주민과 노예들을 위한 시원통쾌한 해방과 자립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런 억지 전개는 실제 역사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감독은 한편으로는 식민제국의 최전성기에도 완전하지 못했던 통치 균열과 위기의 전조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묘사하려 애쓴다. 제국의 허세를 상징하는 자마가 영화 내내 식민지를 은유하는 다양한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이용대상으로 전락하는 블랙 유머는 겉으로 드러난 식민제국의 강대함 대신에 그 이면의 모순을 상상하게 해준다. 영화에서 명백한 설명 없이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순간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들, 정복되지 않은 원 주민이나 뜻 모를 예언을 던지는 어린아이, 현지 토착종 생물들의 등장과 퇴장은 감당도 이해도 온전히 불가능한 식민지의 광활함에 삼켜진 소수의 식민 지배자들의 심리를 은유하는 식이다.
 
영화는 명확한 해설이나 정돈된 원인과 결과 전개 대신에 찝찝하고 불유쾌하면서도 다채로운 변주를 즐겨 활용한다. 평화로운 일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스펙터클한 변화와 충격이 넘쳐나던 당시의 실제 시대상을 시청각적으로 재기 넘치게 구현하는 감독의 노력은 영화 내내 흥미로운 장치들을 가득 깔아놓는다. 그리고 관객이 이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통해 역사적 통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스스로 찾아가게끔 유도한다. 이 지적 여정은 다른 영화들에서 쉽게 보기 힘든 매혹의 순간이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자마>는 탈식민주의 담론을 모범적으로 구현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과거가 어떻게 현재의 모순으로 연속되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흥미로운 모험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썩 훌륭한 길잡이다.
 
<작품정보>
 
자마 Zama
2017|아르헨티나|드라마
2021.08.26. 개봉|115분|15세 관람가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
주연 다니엘 지메네스 카초, 로라 두에나스, 마데우스 나츠테르가엘레, 후안 미누힌
출연 라파엘 스프레겔버드, 다니엘 베로네스
수입 및 배급 엠엔엠 인터내셔널
 
2018 로테르담국제영화제 KNF상
자마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 엠엔엠 인터내셔널 다니엘 지메네스 카초 탈식민주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