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1984년 개봉된 영화 <킬링 필드(Killing Fields)>는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고발한 영화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이 중립국이었던 인접국 캄보디아로 번지면서 1972년 미 공군은 크메르군에 폭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미 공군의 실수로 인해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뉴욕타임스> 특파원 일행이 이듬해 여름에 프놈펜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들은 <뉴욕타임스> 현지 채용 기자인 '디스 프란'의 통역 도움을 받으며 함께 취재한다.

그곳은 이미 캄보디아 정부군과 크메르루즈 반군 사이에 치열한 전쟁터였는데, 상황은 정부군에 불리한 쪽으로 급변하여 프놈펜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점령된다. 디스 프란의 가족과 다른 기자 일행은 프놈펜에서 모두 탈출하지만 여권 위조에 실패한 프란만 남게 된다. 그는 거기서 강제 노동수용소로 끌려간 후 기적적으로 킬링필드를 통과하여 미국으로 탈출한다.

'킬링필드'는 보통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극을 말한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들판에 수많은 해골이 흩어져 있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이 시기는 악명 높은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가 미국의 하수인이었던 론놀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했던 때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모방했던 크메르루즈의 극악한 잔혹함으로 인해 대략 80만에서 10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영화는 언뜻 보면 바로 이러한 크메르루즈의 대학살을 고발한 영화다. 그러나 그것이 이 영화가 왜곡하는 실상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이러한 학살극도 없었을지 모른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를 미국이 떠맡은 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놀 정부군은 캄보디아 농부들을 상대로 이미 무자비한 폭정을 벌였다. 1970년대 초에 캄보디아인들은 미국의 대대적인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론놀 정부에 등을 돌렸었다.

미 공군의 B52 폭격기가 캄보디아를 공습한 것은 미국이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 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후 5년 정도 지난 1969년부터다. 그해 봄과 여름 다섯 달 동안만 해도 캄보디아에 미군이 투하한 포탄의 양은 54만 톤에 이른다. 이것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16만 톤의 세 배가 넘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49만5000톤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 불법 폭격과 론놀 정부군의 무자비한 학살극으로 인해 이미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제1기 킬링필드'다.

영화 <킬링필드>가 보여주고자 했던 학살 현장은 크메르루즈가 장악한 시기에 발생한 '제2기 킬링필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집중하면 그에 앞선 제1기 킬링필드가 잊힌다. 바로 그것이 영화 <킬링필드>가 의도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 시작 부분에서 크메르루즈 점령 이전에 캄보디아가 평화로운 땅이었다고 서술하는 것은 '완전 거짓'이다. 다만 영화가 고발하는 (제국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의 잔혹성과 학살 참상은 진실이다.
 
지난 16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국외 탈출을 위해 주민들이 담을 넘어 공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아프간의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정권 재장악을 선언하자 카불 국제공항에는 외국으로 탈출하려는 군중이 몰려들었으며 결국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공항은 마비됐다.
 지난 16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국외 탈출을 위해 주민들이 담을 넘어 공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아프간의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정권 재장악을 선언하자 카불 국제공항에는 외국으로 탈출하려는 군중이 몰려들었으며 결국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공항은 마비됐다.
ⓒ 연합뉴스=EPA

관련사진보기

 
2.

최근 미군 철수 이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까지 점령하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 직원들과 미군을 도와주었던 사람들까지 공항으로 몰려서 탈출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고 있으려니, 1975년 사이공에서 벌어졌던 긴박했던 미군 철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20년이나 개입한 아프가니스탄에도 미군을 도와주었던 통역관 및 '부역자'들이 있을 것이고, 탈레반이 없는 세상에서 직장을 잡고 사회활동을 했던 여성들이 있다.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미국에서는 미군을 도와주었던 수천 명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얼마 전만 해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철수는 베트남에서 철수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했다. 북베트남군이 시시각각 다가오던 시점에 사이공에서 급하게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쳤던 경험이 카불에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바이든은 말했다.

그러나 비행기 형태만 헬리콥터에서 군 수송기로 달라졌을 뿐 카불에서 촌각을 다투면서 도망나오는 것은 마찬가지 모습이어서 미국과 바이든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남베트남 정부군에게 무기를 주고 훈련을 시켰던 것처럼, 미국은 아프간 정부군에게도 똑같이 무기를 주고 훈련을 시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베트남전쟁보다 훨씬 더 긴 20년간이나 전쟁을 벌였으며, 훨씬 더 많은 돈과 무기를 투입했다.

그러나 미군 철수가 개시된 이후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을 만나기도 전에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고 스스로 궤멸했다. 그들은 무기를 모두 가지고 도망갈 수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남겨진 무기는 모두 탈레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무기력은 그들의 스승인 미국의 오점이기도 하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미국은 베트남에 이어 치욕적인 전쟁 패배의 오명을 안게 됐다.

미국이 '세계 경찰'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노력은 참으로 허망해 보인다. 수만 명의 미군과 수조 달러의 자금을 투입한 이후 미국이 이처럼 카불에서 급하게 도망나와야 하는 것은 제국의 권위와 위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하게 한다.

이런 일을 두고 엉뚱하게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는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프가니스탄과 대한민국을 그렇게 미국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머리 나쁜 사람들을 이해하고 설명해주기는 결코 쉽지 않다.
 
17일(미국 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 로스앤젤레스 연방빌딩 앞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지지 시위 중 아프가니스탄 국기 위에서 울고 있는 한 여성의 눈이 그려진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17일(미국 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 로스앤젤레스 연방빌딩 앞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지지 시위 중 아프가니스탄 국기 위에서 울고 있는 한 여성의 눈이 그려진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 연합뉴스=EPA

관련사진보기

 
3.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현재 20여 년 전에 전국을 장악했을 때와 같은 여성 차별 정책을 더 이상 실시하지 않을 것처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 여성들이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20여 년 전에 탈레반은 극단적인 샤리아법을 표방하면서 8세 이상의 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금지시켰었다. 또한 여성이 직장을 갖고 일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사회 활동을 금지했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 예전에도 이렇게 여성 차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77년에 아프가니스탄 의회에서 여성의원은 15%를 차지했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교사의 70%, 공무원의 50%, 의사의 40%가 여성이었다.

소련이 철수한 이후 내전에 들어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은 다시 취업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남편을 잃은 5만여 명은 구걸과 도움으로 연명해야했다. 그들은 부르카를 입고도 집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여성의 운전은 금지되었고, 남성을 동반하지 않은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몸이 아파도 옷을 입은 채로 남자 의사의 진료만 받을 수 있었으므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여성이 늘어났었다.

원래 이슬람 경전인 꾸란은 알라 앞에서 남녀 차별을 규정한 것이 아니고, 남녀가 가정과 사회를 공동으로 책임지도록 했다고 한다. 탈레반이 주장하는 '샤리아'는 이슬람의 제1경전인 꾸란을 중심으로, 이슬람교 창시자이자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를 더하여 알라의 뜻에 따라 사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샤리아를 고정된 법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 국가들마다 여성의 권리가 다른 것을 보면 샤리아가 각 지역에서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이슬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이슬람교 고유의 성격으로만 바라보거나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만 해도 1970년대에는 여성들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자유롭게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집권층의 성격에 따라 이슬람 여성의 지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하고 믿기 어렵기는 하지만, 현재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예전처럼 여성을 억압하지 않을 것임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두고 볼 일이다.

태그:#킬링필드, #탈레반, #샤리아법, #베트남전쟁, #캄보디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맨해턴 옆에서 조용히 사는 사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