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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국민의힘 최재형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지난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에 마련된 캠프기자실에서 경제 분야 정책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국민의힘 최재형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지난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에 마련된 캠프기자실에서 경제 분야 정책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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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전 감사원장) 측이 최 예비후보의 조부 고 최병규씨가 일제 강점기 '국방헌금'을 납부한 이유를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반박하고 있다. 앞서 <오마이뉴스>가 당시 신문기사(<매일신보> 1938.6.30)를 근거로 "최병규가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했다"고 검증한 데 대한 해명이자 반박이다.

최 예비후보의 '열린 캠프'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시 일제에 살았던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내면서라도 그렇게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협조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보복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8일 최 예비후보 본인도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 "민족문제연구소도 일제가 어떻게 조선민중들에게 국방헌납을 강요했는지에 대해서 그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면서 "그러면(국방헌금을 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면) 어쩔 수 없이 국방헌금을 한 그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다 친일파라는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정말 최재형의 조부는 생존을 위해 '억지로' 국방헌금을 냈을까?

강제적 헌납? 자발적 헌납? 

최 예비후보 측의 언급처럼 일제강점기 국방헌금은 자발성보다는 강제성이 컸다. 일제는 쌀이나 놋그릇, 생활 도구까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했다. '국방헌납(헌금)'도 강요됐다. 헌납의 사전적 의미는 자발적 봉사나 희사이지만, 실제로는 떡판 돈 헌납한 행상인, 소나 돼지를 헌납한 농부, 산채나 물고기 판 돈 헌납, 폐품 판돈 헌납 등처럼 헌납을 가장한 수탈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동의대 김인호의 학술논문 '침략전쟁 시기(1937~1945) 조선에서의 국방헌납 실태'는 "헌납은 자발이 아니라 총독부의 작품이었다"면서도 "대자본가의 경우 막대한 헌납은 막대한 수주를 의미했고, 조선인 지식인층에게는 당시 추진되던 조선의 자치와 제국의회 조선의원 파견, 징병제, 의무교육제 등의 현안과 연계해 헌납을 통한 정치적 모색의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정리하면, 국방헌금에도 있는 자들의 현실적 이익을 위한 자발적 헌납과 조선인 일반의 강제적 헌납이 있다.

그렇다면 최재형의 조부 최병규는 자발적 헌납에 가까울까, 강제적 헌납에 가까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산계급의 자발적 헌납 가능성이 커보인다.

먼저 최 후보 일가의 당시 지위다. 증조부 최승현은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강 공립소학교 부교원, 191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평강분국장, 1918년 3월부터는 최소 17년 이상 평강군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강원도에서 관변단체인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

조부 최병규도 1935년(27세)에 유진면 면협의원을 맡았다. 최병규의 형 최병렬도 고삽면 면협의원에 당선됐다. 아버지 최승현은 유진면 면장, 형 최병렬은 고삽면 면협의원, 최병규는 유진면 면협의원을 맡은 유력 집안이었다.

당시 면장과 면협의원은 어떤 지위였을까? 일제는 조선의 전통적인 자치제도도 파괴했다. 1906년에는 종래 면민의 선거 또는 장로의 추천에 의한 면장 임용제도와 자치적인 면회(面會)를 폐지하고 군수가 면장을 임명했다. 1930년에는 지방단체의 의결기관으로 도회, 부회, 교육부회, 읍회, 면협의회를 설치했다. 때문에 대다수 면장과 면협의원은 주로 면내 유력 동족 마을 대표자, 토지 재산과 사회 활동 능력을 갖춘 자, 당국의 신뢰를 받거나 사회적 인망이 있는 면내 유지급들이었다.

조선일보 '평강지역 각계 중요 인물'로 소개된 '최승현'
 
최재형의 증조부 최승현이 평강지역 중요 인물로 소개된 1934년 11월 2일 자 조선일보. 최승현을 '유학 군자로 칭하고 있고 항상 자선사업으로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으며 현재 유진 면장으로 있다'라고 설명했다.
 최재형의 증조부 최승현이 평강지역 중요 인물로 소개된 1934년 11월 2일 자 조선일보. 최승현을 "유학 군자로 칭하고 있고 항상 자선사업으로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으며 현재 유진 면장으로 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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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최씨 일가의 사회적 지위를 엿볼 수 있는 신문기사가 있다.

최병규가 국방헌금을 내기 4년 전인 1934년 11월 2일 자 <조선일보>에는 그의 부친 최승현이 평강지역 '각계 중요 인물'로 소개된다. 이 기사에 실린 인물은 최승현을 포함 모두 15명인데 평강사회 중진이자 민간제일의 유력자(평강진흥회장), 수십만 원의 재산이 있는 평강의 일류부호(진흥회서무부장), 곡물 무역상으로 평강제일, 평강 포목상 중 최대규모 등 인물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최승현은 "유학군자로 칭하고 있고 항상 자선사업으로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으며 현재 유진면장으로 있다"고 소개했다(원문: "유학군자의 칭이 있는 최씨는 항상 자선사업으로 명망이 일경에 놉으니 현재 유진면장으로 있다"). 평소 자선사업으로 평강 지역 중요 인물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세를 얻은 것이다. 그런 유명 인물의 아들인 최병규의 국방헌금을 '생계형' 또는 '생존형'으로 부르기 어려운 이유다.

국방헌금 '미담 기사'까지

다음은 최병규의 국방헌금 방식이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 신문에는 지역별로 국방헌금 액수와 명단이 실렸다. 시기별, 지역별 할당을 엿보게 하는 자료도 많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부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려 '국방헌납운동'을 전개했다. 일반인은 물론 초·중등 학생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연일 '미담' 사례를 홍보했다. 자발적 헌납이 아니라 강제 공출이고 총독부의 조직적인 정책적 강요에 의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이를 참작하더라도 지역 유지로 알려진 집안에서 '회갑 축연비를 알뜰히 쓰고 돈을 남겨 국방헌금에 헌납했다'는 '미담 중의 미담' 기사를 남긴 것은 일제의 정책적 강요와 최병규 집안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 등의 현실적 타협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최 후보 측의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해서든 협력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선 민중의 애환"에 최 후보의 조부와 증조부까지 포함시키는 게 과해 보이는 이유다.

태그:#최재형, #국방헌금, #독립유공자, #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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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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