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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토 아키라 씨는 대학 3학년 때 '학도출진'을 나가 1945년 중국 하이난 섬에서 종전을 맞았다. 최종 계급 해군중위.
▲ 총리대신 명의의 참전증서를 펼쳐보이는 히로토 아키라 히로토 아키라 씨는 대학 3학년 때 "학도출진"을 나가 1945년 중국 하이난 섬에서 종전을 맞았다. 최종 계급 해군중위.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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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저 무사히 돌아오라'고만 말씀하셨어요.

'학도 출진' 당시 가족들의 반응을 묻는 말에 한참동안 상념에 잠겼던 히로토 아키라(廣戸章, 100)씨가 겨우 입을 열었다. 1921년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 넘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직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출진을 앞두고 어머니와 헤어지던 때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엔 슬픔이 묻어났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어요, 출전하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1925년 이후 일본의 중학교 이상 교육시설에서는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련훈련이 실시되었다.
▲ 주오대학에서의 교련 훈련 1925년 이후 일본의 중학교 이상 교육시설에서는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련훈련이 실시되었다.
ⓒ 주오대학 대학사 자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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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토씨가 군복을 입게 된 때는 1943년 12월. 당시 그는 주오대학 법학부 3학년생이었다. 그동안 징병이 유예됐던 대학생들까지 동원의 대상이 됐던 것은, 급속도로 악화되던 전황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히로토씨는 개전 당시의 심정과 학도출진 당시의 심정을 비교하며 그때 느꼈던 절망감에 대해 술회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됐을 때는 중학생 나이여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태평양 전쟁 때는... 정부와 언론에서 선전하는 대로 믿었지요. 이 전쟁은 서구 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한 싸움이라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됐지요. 이 전쟁에 출전하면 죽음밖에 없다고요.
 
1942년 1월 21일에 간행된 '아사히 구라후'의 지면. "도륙하라! 미국과 영국은 우리의 적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미군과 영국군을 오합지졸로 묘사하는 만화가 실려있다.
▲ 연합국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는 전시간행물 1942년 1월 21일에 간행된 "아사히 구라후"의 지면. "도륙하라! 미국과 영국은 우리의 적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미군과 영국군을 오합지졸로 묘사하는 만화가 실려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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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2년 뒤, 프로파간다로 가득한 신문지 지면을 넘어 현실의 그에게 들이닥쳤다. 자원하고 말고의 선택권은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반 병사가 아닌 간부시험을 거쳐 장교로 입대하는 방안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해군병과예비학생이 돼 1년간의 양성과정을 거쳤다. 강도 높은 훈련, 구타 등의 시련을 거쳐 마침내 해군소위 계급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기쁘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군인으로서 마주한 현실은 그의 절망감을 뒷받침했다. 일본해군이 보유한 함선의 수가 모자랐던 탓에, 히로토씨는 '해군육전대'로 배속돼 중국 하이난 섬으로 보내졌다. 하이난 섬으로 향하는 히로토씨를 태운 항공모함 류호(龍鳳)엔 함재기가 없었다. 항공모함에 탑재할 함재기가 없을 정도로 항공기 물량이 바닥을 치고 있던 것이다. 수송선으로 전락한 항공모함은, 남방으로 부임하는 그의 동기생들을 싣고서 불안한 항해를 했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말
 
당시 히로토 씨는 항공모함에 함재기가 한 대도 탑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 히로토 씨와 동기들을 남방전선으로 수송했던 항공모함 "류호" 당시 히로토 씨는 항공모함에 함재기가 한 대도 탑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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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남쪽 바다로의 항해라고 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두께보다도 얇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미 제해권은 미 해군에 넘어간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미군 잠수함이 도사리는 해역을 지나, 환승 예정이었던 수송선이 미군기의 공습으로 불타버리는 우여곡절을 넘어, 호위함 하나 없는 작은 수송선을 타고서 그는 겨우 임지인 하이난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이난 섬에 도착한 그에겐 새로운 시련이 주어졌다. '실전 경험도 없고 인생경험도 얕은 백면서생'에게, 다수의 부하들을 통솔해야 하는 임무는 큰 부담이었다. 50명 규모의 분견대를 지휘하게 된 히로토씨는, '대의에 살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며 거듭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나라를 위해 멋지게 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미군이 하이난 섬에 상륙하면 부하들보다도 가장 먼저 죽고 말겠다며 각오를 다지던 그에게, '무사히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당부는 참으로 아득한 것이었다.
 
히로토 씨는 해군육전대 장교로서 50명 규모의 분견대를 지휘했다.
▲ 1945년 5월의 히로토 아키라 씨 히로토 씨는 해군육전대 장교로서 50명 규모의 분견대를 지휘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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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해안진지 구축은 계속 진행됐다. 완전히 토벌하지 못한 섬 중앙부의 중국군 잔존세력 역시 일본군에게 있어서는 큰 부담이었다. 하이난 섬을 완전히 통제할 여력이 없던 일본군은 중국군 잔존세력과 비공식적으로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산발적인 교전은 계속되었다. 히로토씨 역시 적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빠졌던 적이 있다. 이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미군이 상륙한다면, 양쪽으로부터 협공 당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히로토씨가 해안진지 공사 감독을 위해 출장을 나간 사이에 그의 부하가 부대에서 소총 3정을 들고 탈영해 중국군 진영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탈영한 부하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 출신의 청년이었다. 타이완 사람이지만 히로토씨와는 친밀한 관계를 이어오던 부하였기에, 그 탈영 소식은 그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상급부대에 보고를 올리던 그 때, 그에게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의 항복 소식이었다.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각오를 세웠을지언정, 조국의 패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을 느꼈다. 주변 장교들 중에는 '패전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항복은 천황폐하의 뜻이 아닐 것이다'라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단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타이완 출신 부하의 탈영 사건은 완전히 사소한 일로 치부됐다.

패전 직후, 히로토씨는 일본인과 중국인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고뇌했을 타이완 출신 부하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다름없이 일본어를 구사한들, 그것이 타이완인들에게 강요된 모순의 경계를 허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한 그 시점에서, 곧 중국으로 귀속될 타이완 출신의 사람들은 새롭게 살 길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타이완인 부하의 탈영사건에 대해 언급하던 히로토씨는, 인근 부대에 있었던 한국인 병사의 탈영 사건도 기억해냈다. 타이완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 역시 식민지인으로서 마주해야 하는 모순된 현실에 고뇌했으리라고 히로토씨는 생각한다. 특히 그는 한국인들이 타이완인들과는 달리 식민통치 이전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지녀왔던 점을 들어 말했다.

"한국인들에겐 모욕적 처사였겠죠"
 
히로토 씨는 경복궁을 가리는 위치에 건설된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의 독자적 문화를 무시해버린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제국 체제에 예속된 식민지인들은 전쟁에서 또 다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던 조선총독부 청사(1995년) 히로토 씨는 경복궁을 가리는 위치에 건설된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의 독자적 문화를 무시해버린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제국 체제에 예속된 식민지인들은 전쟁에서 또 다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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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0년 전인가, 예전에 한국 서울에 갔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갔던 일이 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근대 건축 양식이 잘 보존된 멋진 건물이었는데, 조만간 철거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왜 굳이 철거까지 하는 것인지 의아했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 뒤에 옛 조선의 왕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나라의 왕궁 앞을 총독부 건물로 막아버리다니, 한국인들에게는 참 모욕적인 처사였겠지요. 이렇듯,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와 긍지를 갖고 있었으니, 일본군 내에서 타이완인들보다도 한국인들의 불만이 더 컸겠지요.

세상은 뒤집혔다. 본토와 식민지를 묶던 제국의 끈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했고, 일본군을 상대로 졸전과 패주를 거듭하던 중국은 승전국의 지위에 올랐다. 국민당 군대부터 공산당 군대, 심지어는 지방 군벌까지 나서서 일본군의 무기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해왔다.

히로토씨는 상부의 방침에 따라, 국민당 군대의 감독 하에 부대의 무장을 해제했다.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을 대체로 관대하게 대했지만, 일선의 무장해제 현장에서는 병기뿐 아니라 세면도구와 손목시계까지 몰수되어 일본군 장병들에게 굴욕감을 더했다. 식민지 출신 병사들은, 일반 일본군 장병들과 분리돼 작별을 고하게 됐다. 남은 일본군 장병들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유지하는 형식으로 집단수용됐다. 그중에는 전범으로 지목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이들도 있었다. 견고하게 제국을 지탱하던 총력전 체제의 질서는, 그렇게 눈 녹 듯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때가 히로토씨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을까. 제국도 해군도 없게 된 그 허무의 공백을 채울 수가 없었다. 육신에서는 혼이 빠지고 무기력만이 남은 듯 했다. 오직 죽음만을 생각해왔던 그에게, 패전의 굴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너머의 미래라는 걸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때의 고뇌와 성찰은, 스스로의 삶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그는 생각한다.
 
전장에서 귀국한 장병들은 폐허가 된 조국의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 종전 후에도 복구되지 않은 오사카의 폐허(교바시역, 1946년 6월) 전장에서 귀국한 장병들은 폐허가 된 조국의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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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히로토씨는 마침내 복원선(귀국선)에 올랐다. 정든 동기들과 헤어져 도착한 고향에는 공습의 상처가 가득했고, 그의 집 역시 반쯤 무너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던 그는, 임시 대피소에 있던 어머니와 간신히 재회하게 된다.
 
돌아왔구나, 정말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게 된 히로토씨는, 자신을 맞아주는 어머니 앞에서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전장에서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의 재회였다. 한참동안 마음을 추스린 히로토 씨는, 다시 만난 어머니께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까 갈아입을 옷 좀 줘. 어쨌든, 이 군복은 벗고 싶어.

덧붙이는 글 | 히로토 씨는 종전 후 오사카증권거래소에서 근무하다 정년 퇴직했으며, 100세가 된 지금도 지역 시민대학 '겐지모노가타리'(일본 고전소설) 강좌에 출석하는 등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태그:#학도병, #전쟁체험, #인터뷰, #아시아 태평양 전쟁,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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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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