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유혼>의 왕조현과 <동방불패>의 임청하, <가을날의 동화>의 종초홍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걸쳐 홍콩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사랑 받은 여성 배우들이었다. 특히 홍콩배우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한국에서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홍콩배우들의 사진이 박힌 책받침이 불티나게 팔리곤 했다. 주윤발을 모델로 내세운 우유맛 탄산음료가 인기를 끌자 모 음료회사에서는 왕조현을 모델로 발탁해 비슷한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아 전역에서 사랑 받으며 남성팬들을 잠 못 들게 만들던 홍콩의 여성배우들 중에는 유독 활동기간이 짧은 배우가 많았다. <천녀유혼>과 <도신-정전자>로 전성기를 달리던 왕조현은 1993년 <청사> 이후 활동이 뜸해졌다. 종초홍은 주윤발, 고 장국영과 함께 출연한 <종횡사해>를 끝으로 결혼을 하며 영화계를 떠났다. 그나마 활동기간이 길었던 임청하도 90년대 중반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을 끝으로 전성기가 저물었다.

이는 오우삼, 서극 등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감독들의 할리우드 진출 영향도 있었고 심각한 자기복제 속에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빠르게 위세가 약해진 홍콩영화의 침체가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며 일찍 전성기가 저문 홍콩 여성 배우들 사이에서도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한 여성 배우도 있다. 바로 아시아 최초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인 '홍콩 여성배우의 자존심' 장만옥이다. 
 
 <첨밀밀>은 개봉 당시 큰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비디오 시장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잔잔하게 사랑 받았다.

<첨밀밀>은 개봉 당시 큰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비디오 시장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잔잔하게 사랑 받았다. ⓒ (주)서우영화사

 
베를린-칸영화제 휩쓴 최고의 여성 배우

장만옥은 이제 추억 속 이름이 된 임청하, 왕조현 등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으면서도 그들이 은퇴한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 홍콩을 대표하는 여성배우다. 1983년 미스홍콩 2위에 입상한 장만옥은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 <폴리스 스토리>에서 성룡의 여자친구 아미 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1988년 왕가위 감독을 만나 <열혈남아>, <아비정전>에 출연한 장만옥은 1991년 <완령옥>을 통해 베를린 영화제 여자연기자상(은곰상)을 수상하며 홍콩을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홍콩에서 활동하던 많은 배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만옥도 '다작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17편의 영화에 출연한 장만옥은 살인적인 스케줄에 지쳐 1994년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을 끝으로 휴식기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던 장만옥은 1996년 '사대천왕' 중 한 명이었던 여명과 함께 멜로영화 <첨밀밀>로 컴백했다. <첨밀밀>에서 성공을 위해 홍콩으로 이주한 이교 역을 멋지게 소화한 장만옥은 아시아태평양영화제를 비롯한 4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화려한 컴백을 알렸다. 이후 장만옥은 <송가황조>, <화양연화>, <영웅> 등에 출연하며 이미지를 과하게 소비하지 않고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장만옥은 1996년 프랑스 영화 <이마 베프>에 출연한 것을 인연으로 1998년 이 영화를 연출했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다. 하지만 유럽 감독과 아시아 배우의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두 사람은 3년 만에 이혼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감독과 배우로서는 계속 인연을 이어갔고 장만옥은 2004년 아사야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 <클린>에 출연했다.

<클린>에서 할리우드 배우 닉 놀테와 함께 연기하며 록가수로 변신한 장만옥은 2004년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또 한 번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에서 아시아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장만옥이 역대 최초였다(3년 후 전도연이 두 번째 수상). 장만옥은 2010년 <전성열련>을 끝으로 10년 넘게 작품활동이 없지만 그녀가 홍콩영화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여성 배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설의 가수 등려군이 이어준 10년의 인연
 
 장만옥은 <첨밀밀>을 통해 중화권 4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장만옥은 <첨밀밀>을 통해 중화권 4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 (주)서우영화사

 
사실 <첨밀밀>의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이 작품은 중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이주한 두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만나 친구로 지내다가 사랑이 싹튼다는 진부한 내용이다. 영화 후반부에 홍콩으로 가는 기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는 설정이 나오지만 이 역시 전혀 새로울 게 없는 멜로영화의 흔한 구성이다. 그럼에도 <첨밀밀>은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와 진가신 감독의 절제된 연출로 관객들에게 영화가 가진 애틋함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첨밀밀>에서 두 주인공 이교(장만옥 분)와 소군(여명 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바로 대만 출신의 전설적인 가수 등려군이다. 등려군은 대만뿐 아니라 홍콩, 일본, 중국에서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던 가수다.

각자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친구로 지내던 이교와 소군은 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던 도중 등려군을 만나고 소군은 차에서 내려 입고 있던 외투에 사인을 받는다. 이교가 타고 있던 차에서는 등려군의 명곡 <재견아적애인>이 흘러 나왔고 이교는 멀어지는 소군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이다 실수로 자동차의 경적을 울렸다. 등에 등려군의 사인을 받은 소군과 차 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교가 나누는 키스신은 <첨밀밀>에서 가장 설레는 장면이다.

오랜 홍콩생활을 뒤로 하고 뉴욕에서 성공을 위해 일에 매진하던 이교와 소군은 어느 날 등려군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뉴욕 거리를 배회하다가 운명처럼 마주친다. 두 사람의 사랑을 처음 확인시켜 준 등려군이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두 사람이 재회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준 것이다(두 사람이 거리를 헤맬 때 나오던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은 재회 장면에서 은근슬쩍 주제가 <첨밀밀>로 바뀐다).

1997년 3월 국내에서 개봉한 <첨밀밀>은 서울 관객 6만3000명에 그치며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중국인이 홍콩에 불법체류한다는 설정 때문에 중국 본토에서도 2015년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가 재평가되며 다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 국내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다음 영화 섹션에서 <첨밀밀>의 네티즌 평점은 각각 9점이 넘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5개의 러브스토리
 
 <첨밀밀>로 국내 인지도가 급상승한 여명은 1998년 한국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의 OST에 참여하기도 했다.

<첨밀밀>로 국내 인지도가 급상승한 여명은 1998년 한국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의 OST에 참여하기도 했다. ⓒ (주)서우영화사

 
<첨밀밀>에선 조연 캐릭터들의 러브스토리도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샀다. 이교의 동거인이자 폭력조직의 보스를 연기한 증지위는 보기완 달리 상당히 순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쥐 말고는 무서운 것이 없다던 이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키 마우스 문신을 하고 이교를 찾아간 장면은 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짠하다.

반면에 고향에서 소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여자친구 소정(양공여 분)은 <첨밀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이다. 성공하고 돌아오겠다던 남자친구가 외지에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버렸기 때문이다. 소정은 이교를 사랑하게 된 소군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지만 이미 이교에게 마음을 빼앗긴 소군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쓸쓸하게 중국으로 돌아갔다.

과거 할리우드 배우 윌리엄 홀든과 데이트를 했던 추억을 가지고 평생 홀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소군의 고모가 보여준 사랑도 대단히 지고지순하다.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비웃었지만 고모의 경험은 사실이었고 고모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홀든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사실은 <첨밀밀>의 배경이 된 시기가 1986년이었는데 실제 윌리엄 홀든은 1981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소군의 고모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첨밀밀>의 촬영감독이자 영어선생님 역으로 출연하는 크리스토퍼 도일은 태국에서 온 매춘부와 사랑에 빠진다. 물론 돈으로 몸을 사고 파는 성매매자였지만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힘든 타지 생활을 견뎠다. 그리고 영어선생님은 여자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께 태국으로 떠났다. 호주 출신의 도일은 홍콩에서 <중경삼림>, <아비정전>,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영웅>, <무간도> 등의 촬영 감독으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첨밀밀 장만옥 여명 등려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