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포스터.?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1991년 말, 전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하지만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 유고슬라비아를 둘러싼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탈냉전 시기에 접어 들면서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체·독립했던 반면, 이곳 유고슬라비아는 폭력과 전쟁 그리고 인종청소까지 다다른 극단적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의 10년 전쟁을 공식적으로 보는데, 그 사이 슬로베니아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마케도니아 반란 등의 전쟁들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이룬다. 이 중에서도 3년 8개월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던 보스니아 전쟁이 대표적이다. 이 전쟁 기간에 '스레브레니차 학살'도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학살이었다.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보스니아 전쟁 중에 벌어진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일면을 다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 출신의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신작이다. 그는 지난 2005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에 빛나는 <그리바비차>로 보스니아 전쟁의 사라예보 포위전을 영화로 옮긴 바 있다.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발칸반도와 여성 이야기를 두루두루 만들었는데, 이번 <쿠오바디스, 아이다>로 다시 한 번 그려 냈다. 하여, 보스니아 전쟁을 이루는 가장 큰 두 사건을 담은 것이다. 

보스니아 전쟁 한복판, 아이다의 고군분투

1995년 7월 유럽 보스니아, 보스니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때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위하는 세르비아 민병대가 탱크를 앞세워 스레브레니차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곳은 애초에 UN군에서 지정한 안전지대였다. UN군은 믈라디치 측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지정한 시간 내에 철수하지 않으면 공습으로 쓸어 버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허울뿐이었다. UN군의 최후통첩을 믈라디치가 무시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레브레니차 주민들은 UN군 캠프로 피신한다. 이 곳이야말로 진짜 안전지대였기 때문. 그런데, 4~5천여 명만 들어올 수 있었을 뿐 나머지 2~3만 명의 주민들은 밖에서 언제까지일지 모를 기다림을 맞아야 했다. 물론, 캠프 안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었고, 화장실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UN군의 최후통첩은 허울뿐이라는 게 드러나고, 공중지원을 기대하지 못하게 된 시점에 믈라디치 측에서 제안이 온다. 민간인들을 모두 보스니아군 측으로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와중에 스레브레니차에 집을 둔 UN군 통역관 아이다는 가족들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처음엔 남편과 큰아들이 캠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후엔 남편과 두 아들 모두 끌려가 죽을 판이 되었다. 믈라디치가 남자들만 따로 빼내 학살하는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가족들만은 지키려는 아이다의 고군분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참상 한가운데로

25년여 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우린 대략의 결말을 알고 있다. 지난 6월 초 라트코 믈라디치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집단학살 등의 혐의로 종신형을 확정받았는데, 바로 이 영화가 다룬 '스레브레니차 학살'이다. 극 중 아이다의 남편과 두 아들은 아마도 끔찍하게 학살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살된 이들이 공식적으로 8372명에 이른다.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나 보스니아 전쟁 또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거시적으로 조망하지 않는다. 다분히 UN군 통역관 아이다의 시선으로 보여줄 뿐이다. 전쟁 영화라기보다 드라마 성격이 짙다. 전쟁의 참상을 다루기보다 휴머니즘에 천착하고 있는 듯하다. 전쟁 중에서도 학살을 다룬 영화가 지향해야 하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제목 중에서 '쿠오바디스'는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로, 최후의 만찬 중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중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을 품고 있다. 즉, 이 영화의 제목은 극중 피난민들이 아이다에게 묻는 말 '무슨 일이에요, 아이다?'과 일맥상통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고 죽는 참상의 한가운데.

영화는 종종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인물들을 통해 전쟁과 학살의 참상 한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데, 그 얼굴을 응시하고 있으면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들이 그렇게 죽어갈 때 우린 뭘 하고 있었을까. 아니, UN군을 위시한 국제사회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뭘 하지 못했던 걸까, 하지 않았던 걸까. 

방관하지 말고 무지하지 말며 무기력하지 말라
 
 영화 <쿠오 바디스, 아이다> 스틸 컷

영화 <쿠오 바디스, 아이다> 스틸 컷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영화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과 감독상,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토론토 영화제 현대 세계 영화 부문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어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25년여 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아픔을 전하고 있는 사건인데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필요한 휴머니즘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사건을 미시적으로 담고 있지만, 의미는 전 인류애적이며 거시적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수수방관하지 말고 무지하지 말고 무기력하지 말라. 

<쿠오바디스, 아이다>를 보다 보면,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계속 따라다니다. UN군은 세르비아 민병대의 협박에 다름없는 협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였고 그들 마음대로 피난민들을 다뤄도 무기력하게 방관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세르비아 민병대가 남자들을 데려가 학살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무기력하게 모른 채 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시선 때문에, 이 전쟁과 이 학살의 책임을 세르비아 민병대와 라트코 믈라디치가 아닌 UN군에게 돌리려 한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한편, 주인공 아이다가 UN군 통역관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만 안전하게 빼돌리려 한다는 느낌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더 들여다 봐야 한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참상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하지만 다름 아닌 그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있었고 또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던 게 UN군이다. 그들은 세르비아 민병대와 '협상'을 했고, 협상의 결과가 '학살'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학살의 참상 그 이면을 우리에게 전해 줬다. 

아이다의 경우는 어떨까. 휴머니즘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느 누구든 아이다의 상황에 처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테다. 결코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오히려 보편에 한없이 가까운 행동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인간다움의 이면을 우리에게 훌륭히 전해 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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