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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자꽃이 있던 자리에는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가 있다고 시인 권태응의 동시 <감자꽃>에서 노래했다. 하늘 아래 그 말처럼 참 말은 없다고, 내 텃밭에 심어놓은 감자꽃이 말하는 듯하다. 

23일부터 소나기에 천둥이 있을 거라는 일기예보에 주말에나 감자를 캐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지난 며칠 엄지발가락에 온 통풍으로 기록장에 약속했던 하짓날 감자와의 대면이 늦춰져서 속병이 생기려고 했던 참이었다.

"지금 몇 시예요? 왜 비가 안 오지? 천둥까지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거 오늘 감자 캐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요? 그나저나 얼마나 달렸을까 엄청 궁금하네"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럼 가봅시다. 당신의 촉이 맞다면 감자 캘 때까지 비도 안 오겠지. 잘 열렸을 것이네. 바쁜 우리 각시, 오랜만에 크게 한번 웃어볼 일이 있을 거네."

남편이 대답하며 기상을 했다.

주렁주렁 딸려나온 감자들...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새벽의 바람은 언제나 밤새 무거웠던 내 몸을 가볍게 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오감을 태워주는 충전 장치다. 오늘도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지면서 텃밭에 도착했다. 먼저 나온 지인에게 큰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외치면 왠지 사방의 공기 또한 내 인사를 받아주는 듯해서 기분이 더 좋아진다. "감자 캐러 왔어요. 비 오기 전에 얼른 끝내려구요".

왜 하지 감자라고 했는지를 저절로 알 수 있을 만큼 2~3일 사이 무성했던 감자잎이 시름시름해졌다. 제 영양분을 온전히 튼실한 감자알 구근을 만드는 데 희생하고 땅으로 돌아가는 운명이었겠다. 남편 역시 궁금하다면서 감자 줄기를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이 한방에 줄줄이 올라올 감자를 기다리며 사진으로 남겨야 된다고 호들갑을 떠는 나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오마나, 이럴 수가... 도대체 몇 개나 있는 거야. 세상에 세상에. 엄청 크고 잘생겼어. 당신 그 줄기 좀 들고 있어 봐요. 오마이 갓. 당신 덕분인가 봐."

연달어 감탄사를 난발했다.

"당신이 웃을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내심 걱정 했는데, 다행이네. 난 우리 마님이 좋으면 다 좋지. 생각보다 많이도 달렸네."

남편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하나의 감자싹에서 스무알 정도의 감자들이 나왔습니다
▲ 감자 한 줄기에 딸려나오는 감자알 하나의 감자싹에서 스무알 정도의 감자들이 나왔습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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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이 나올 걸 생각해서 어제 상자도 사놓았다고 했다. 내가 첫 수확물을 기부금 마련에 쓰는데, 이번에는 사는 사람들도 기분 좋게 상자에 담아주면 더 좋아할 거라고 했다. 상자를 사면서 '진짜 농부 같다, 노년에 작은 텃밭 일구면서 우리 각시랑 재밌게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단다. 역시 남편의 지혜와 배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0kg 상자를 10개 샀으니, 최소한 이 정도 채워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생각하면서 두덕 위 감자 줄기를 하나하나 뽑으면서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뽑힌 줄기마다 감자알이 예닐곱 개 딸려 나오고, 그 밑자락 흙 속에는 십여 개가 있으니 씨감자 하나가 얼마나 많은 감자 새끼를 쳤단 말인가.

감자가 어떻게 이렇게 자라는 거냐고 물으니 이론에 해박한 남편이 자세하게 줄기를 보면서 설명해 주었다. 줄기의 이곳에서 감자알을 만들고 또 이렇게 뻗어서 이렇게 만들고 등등... 할 일이 태산인데도 남편의 설명을 듣는 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 두덕에서 5상자 정도 나온 것은 대풍이라면서 마을 주민들이 농사 잘 지었다고 오고 가던 길에 멈춰서서 덕담을 주었다. 드문드문 파란색이 돋은 감자는 싹을 만드는 데 쓰면 된다고 하고,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것들도 버리지 말고 감자조림을 해 먹으면 좋다고도 말했다. 어떻게 만난 감자들인데 버릴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담아와야지.
 
10kg감자상자 10개를 채워서 동절기에 소외계층을 위한 난방비 기부금으로 적립되었다
▲ 수확한 감자 10상자 10kg감자상자 10개를 채워서 동절기에 소외계층을 위한 난방비 기부금으로 적립되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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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을 때도 고실고실하던 땅이었는데, 캘 때도 고실고실한 흙을 만지면서, 그 속에서 올라온 지렁이도, 지네도, 땅강아지도, 개미들도 다 예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니, 세상에 불필요한 생물체는 아무것도 없다고 중얼거렸다. 다음 해에 또 농사를 지을 거라면 옆자리의 고추와 자리를 바꿔서 지어야 한다고, 각기 고유한 바이러스가 있어서 두 번 연속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고 남편이 말했다.

두 개의 두둑에서 감자 10상자를 채웠다. 어떤 것은 어른 손바닥보다 크고 어떤 것은 어린애기 주먹 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벌레 먹은 감자가 4~5알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으니 감자 농사는 완전 대 성공한 것이다. 농산물 분류하는 것이 생각나서, 대중소로 나누어 상자에 담으니 대는 6상자, 중은 4상자였다. 현장에서 지인들에게 감자수확을 알리고 20여 분 만에 완판했다. "수미감자 나왔어요. 10kg 박스 당 15000원이에요".

문자를 늦게 본 지인들 대여섯 명은 감자가 없어서 드릴 수가 없었다. 완판하도록 도와준 지인들은 현재 필사시화엽서봉사를 함께하는 문우들이었다. 나의 노고를 칭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꺼운 맘으로 봉사와 바자회 판매에 도와주시는 분들이다. 감자를 못 받으신 분들은 2차 판매물 옥수수, 가지, 호박, 토마토, 고추도 있다고 은근슬쩍 앞날을 예고했다.

집으로 오자마자 감자 몇 알을 삶았다. 설탕과 소금의 비율을 2:1로 해서 20여 분 기다렸다. 상품을 팔면서 항상 맘에 걸리는 것은 맛과 신선도다. 직접 시식하고 수확 작물의 상태를 지켜보는 것은 전문 농사꾼이 아니라도 매우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송화버섯과 배추를 올리브오일과 맛소금만 넣어서 살짝 볶았다.

"당신, 이거 먹어봐요. 향기가 끝내주지 않아요? 감자 향기. 버섯 향기. 나는 정말 못 하는 게 없어~ 아침밥 이걸로 합니다. 잠깐 잠깐, 사진으로 남겨야지. 이렇게 맛있는 감자라고 선전해야 해. 포슬포슬 살살살 녹는 감자 속살. 진짜 행복하다. 이런 게 행복이야."
 
수확한 감자을 삶고, 버섯과 배추로 볶음한 아침밥상
▲ 부부의 건강한 아침밥 수확한 감자을 삶고, 버섯과 배추로 볶음한 아침밥상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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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 버섯 채소 볶음을 먹으면서 감자를 사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판매대금 10만 원을 필사봉사단의 이름으로 기부금으로 적립한다고 알렸다. 올 농사에서 나의 첫 번째 임무, '첫 수확물 기부금으로 적립'이 끝났다. 올해의 목표 리스트에 적힌 이 한 줄에 V자를 채우면서 약속을 지키며 사는 삶을 다시 한번 되뇄다.

감자에 싹이 나고 감자 싹에 줄기가 퍼지고 줄기마다 감자 잎이 너울거렸다. 잎마다 아침 햇살과 바람과 비를 초대하더니 흙 속에 숨은 줄기마다 감자알이 맺혔다. 감자알이 저를 심은 주인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경쟁하며 오늘을 기다렸다. 그리고 제 몸 한 알을 수십 개의 알로 나누며 제 본분을 마쳤다. 마치 내 삶의 순간순간에 '꼭 이렇게만 살아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태그:#하지감자, #기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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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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