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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 
 
여기서부터 산타클라라
 여기서부터 산타클라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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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트리니다드를 떠나 산타클라라를 찍고 바라데로까지 가는 날. 산타클라라 때문에 조금 더 길어진 일정이지만 아무도 불만을 표출하는 이는 없었다. 체 게바라가 묻혀 있는 산타클라라는 쿠바 혁명의 상징, 누구에게는 쿠바에 온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까사 주인이 정성껏 차려준 아침 식사를 맛있게 먹은 뒤 집결하여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트리니다드. 아바나와 다른 매력이 흘러넘치는 도시였다. 마치 중세 스페인에 온 것 같은 기분. 과연 트리니다드는 이와 같은 매력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

곧 있으면 산타클라라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다는 흥분 때문인지, 그 전날 밤 늦게까지 동굴클럽에서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의 풍경은 트리니다드로 오는 길과는 약간 달랐는데, 넓은 사탕수수 농장도 보일 뿐만 아니라 험한 산지도 넘어야 했다. 체 게바라도 이런 산을 넘어 산타클라라로 갔던 것이겠지.

산타클라라는 쿠바에서 5번째 큰 도시로 쿠바 섬의 중앙에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아바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가는 도로와 철도가 모두 이곳을 지나게 된다. 우리로 생각하면 서울과 부산 가운데 위치한 대전 같은 느낌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 당시에도 산타클라라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남부에서 게릴라전을 하던 혁명 세력이 아바나를 접수하기 위해서는 꼭 차지해야 하는 거점이었으며, 바티스타 군에게는 꼭 사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양측의 필요가 맞붙은 산타클라라 전투. 혁명군은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바티스타 군은 무너졌으며, 쿠바 혁명은 성공하게 된다. 산타클라라에서 혁명군을 이끌었던 체 게바라는 영웅이 되었으며, 산타클라라는 혁명의 도시가 되었다. 
 
체의 도시 산타클라라
 체의 도시 산타클라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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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산타클라라에는 볼리비아에서 사망한 체의 20주년을 맞아 1987년 체 게바라의 기념관이 세워졌고, 97년에는 30년 만에 체의 유해가 돌아와서 안치되었다. 산타클라라가 온전하게 체 게바라의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버스가 산타클라라의 외곽쯤 왔을까? 갑자기 가이드가 내리라고 했다. 그곳에는 이곳이 바로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자, 드디어 이번 여행의 클라이맥스,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다!

산타클라라 장갑열차 기념 공원

흐린 날씨 탓이었을까? 원색을 자랑했던 아바나, 시엔푸에고스, 트리니다드와 달리 산타클라라는 무채색의 도시였다. 그리고 이전 도시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관광지라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중세나 근대에 지어진 건물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시내가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이었다.

산타클라라 시내를 관통하고 있는데 가이드가 또 내리라고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쿠바에서 봤던, 가장 잘 만든 체 게바라의 동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체 게바라의 사인이 큼직하게 새겨진 건물이 보였고, 그 앞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
 아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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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대신 아이를 들고 있는 체 게바라. 조금 낯설었지만, 그 모습 역시 보기 좋았다. 어쩌면 체 게바라를 수호신만큼이나 생각하는 쿠바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이런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를 게릴라, 혁명가로 기억하지만 현지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존중하고 아끼던 진정한 지도자일 것이다.

그 동상과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산타클라라 장갑열차 기념 공원이 있었다. 그곳은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가 1958년 12월, 24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불도저로 철로를 끊고, 373명의 바티스타 정부군이 탄 무장 기차를 습격해서 단 90분 만에 탈취했던 곳이었다.

공원에는 여전히 철길이 놓여 있었고, 당시 사용한 불도저와 전복된 정부군의 화물열차가 재현되어 있었다. 열차마다 당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체 게바라의 생생한 사진들과 그때 사용했던 화염병 등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은 화염병을 보면서 우리의 80년대를 떠올리며 한마디씩 꼭 붙였다.

전시물들을 보면서 계속 한 가지가 궁금했다. 왜 300명이 넘는 정부군이 고작 24명밖에 되지 않는 혁명군에게 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기세였을 것이다.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혁명군은 일당백이었을 것이고, 권력의 앞잡이로 민중에게 버림받은 정부군은 언제 도망갈 것인가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니 1/10도 안 되는 병력에게 어처구니없이 질 수밖에.
 
산타클라라 장갑열차 기념 공원
 산타클라라 장갑열차 기념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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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군의 불도저
 혁명군의 불도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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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기념관

다시 버스에 올라 드디어 체 게바라 기념관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체 게바라 기념관의 체 게바라 동상은 아바나 혁명광장과 함께 쿠바에서 꼭 찍어야 하는 사진인데 하필 비가 내리다니.

버스에서 내려 체 게바라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추모관으로 향했다. 현지 안내원은 사진 촬영 금지, 정숙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가이드는 쿠바에서 체 게바라 기념관만이 유일하게 관람료를 안 받는다고도 했다. 그만큼 이곳이 쿠바에서 가장 엄숙하고 신성한 공간이라는 뜻이리라.

쿠바의 정체성이 새겨져 있는 체 게바라 추모관. 문뜩 10년 전에 갔던 베트남 하노이의 호치민 묘소가 떠올랐다. 레닌, 마오쩌뚱, 김일성이 누워 있는 곳도 비슷한 분위기일까? 아니, 체 게바라는 온전한 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고, 그래서 더 숭고하게 느껴질 것이다.

추모관 입장. 체 게바라의 납골 묘지가 보였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던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저마다 추모를 했고, 또 저마다 결기를 되새겼다. 나 역시도 체 게바라 앞에서 그 오랜 시간을 들여 왜 이곳에 왔는지, 젊은 날 그의 생을 보면서 어떤 삶을 살겠노라고 결심했는지 떠올렸다. 나는 여전히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인가? 
 
체 게바라 기념관
 체 게바라 기념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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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관은 곧바로 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체 게바라의 일생이 사진과 글로 전시되어 있었다. 체 게바라 전기에서 봤던 익숙한 사진도 있었고, 처음 보는 것들도 많았다. 그것들 모두 체 게바라의 매력이 각인되어 있었다. 비록 스페인어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체 게바라의 매력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체 게바라의 거대한 동상 앞에 섰다. 그가 피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의 한 구절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이 새겨져 있는 그 유명한 동상이었다.

그러나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 오라는 계시인가. 아쉬운 마음만 안고 다시 버스에 오를 수밖에. 하필 지금 비라니. 아까 장갑열차 기념 공원에서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차례대로 버스에 오른 일행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체 게바라와 함께 사진을 찍을 줄 알았는데 못했다며 다들 안타까워했다.

일행이 모두 오르자 버스는 다음 목적지 바라데로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쿠바 여행의 마지막이다.

태그:#산타클라라,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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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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