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이라고 불리는 두 복서가 있었다. 빼어난 기량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만의 확실한 색깔과 캐릭터를 바탕으로 세계 최강을 넘어 전설의 반열에 나란히 올랐다. 170cm 안팎의 작은 사이즈를 가졌던 경량급이었지만 복싱계에서의 존재감 만큼은 누구보다도 컸다. 둘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져만 갔으며 어느덧 '21세기 최고의 복서'라는 수식어까지 나란히 붙게 됐다.

시작점은 많이 달랐다.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빈민가에 태어난 한 소년은 어릴 적부터 먹고 살기 위해 길거리 노점상, 철공소 작업 등 닥치는 데로 일을 해야만 했다. 복싱? 소년은 그런 것은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소년은 우연한 기회에 글러브를 끼게 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대전료 1달러를 벌어서 생계에 보태기 위해서였다.

다른 소년도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대단한 빅 네임들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경쟁력을 가져가며 커리어를 이어가던 복서였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와 삼촌에게 복싱 영재 교육을 받았다. 처음부터 복서로 키워졌다.

아쉽게도 차분히 복싱을 배우기에 소년의 환경은 썩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약 문제로 감옥을 가는 등 주변이 시끄러웠다. 할머니가 헌신적으로 소년을 돌봐주었으며, 소년 역시 꼭 복싱으로 성공한다는 야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을 거듭한 끝에 최고의 복서로 거듭났다.

'팩맨(PACMAN)' 매니 파퀴아오(43·필리핀)와 '프리티 보이'(Pretty boy)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44·미국)의 얘기다. 스포츠 스타는 커리어로 얘기한다는 말처럼 둘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딛고 엄청난 업적을 쌓았다. 파퀴아오는 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8체급을 석권하며 아시아의 복싱 영웅으로 거듭났으며 메이웨더는 프로전적 50전 50승의 무패복서로 자신의 커리어를 꽉 채웠다. 
 
 매니 파퀴아오는 필리핀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매니 파퀴아오는 필리핀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 파퀴아오 페이스북

 
화끈한 공격형 파퀴아오, 탄탄한 수비형 메이웨더
 
보통 라이벌이라고 하려면 두 선수간 접점이 자주 교차되어야 한다. 여러차례 맞붙어 흥행 시너지를 일으키고 끊임없이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헤비급 레전드 '떠벌이' 무하마드 알리와 '스모킹 조(Smokin Joe)' 조 프레이저가 대표적 예다. 전형적 아웃복서 알리와 인파이터 프레이저는 파이팅 스타일은 물론 각기 다른 성격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런 면에서 파퀴아오와 메이웨더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며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막상 경기를 치른 건 한 차례(2015년 5월 3일)에 불과했다. 그것도 전성기가 지난 상태에서 맞붙었고 그로 인해 많은 기대 속에서 치렀던 빅매치는 졸전이 되고 말았다. 이후 파퀴아오는 부상을 숨기고 경기를 가졌다는 발언까지 내뱉으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둘을 세기의 라이벌로 인식한다. 그만큼 파퀴아오와 메이웨더가 복싱계에서 펼쳤던 활약이 엄청났고 임팩트 또한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워낙 존재감이 대단했던지라 경량급임에도 헤비급 스타 복서들까지 인지도로 눌러버렸다.

90전 84승 6패의 풍부한 아마추어 전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메이웨더는 기본기가 아주 튼튼한 교과서적인 아웃복서다. 긴 리치와 활발한 스탭을 살린 아웃파이팅은 그 자체로도 다른 복서들에게 교본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상대가 치고 들어올 때 빛을 발하는 전가의 보도 '숄더 롤(Shoulder roll)'은 감탄을 넘어 경이로울 정도다.

미끄러지듯 펀치를 흘리며 짧고 정확한 카운터를 상대에게 적중시킨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기술 복싱의 정점으로 어지간한 테크니션은 따라하고 싶어도 흉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창때 메이웨더는 아웃복서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완전체로 평가받았다. 뛰어난 동체 시력, 짐승 같은 반응 속도는 물론 유려한 경기 운영에 다양한 기술까지 갖췄던지라 어지간해서는 정타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복싱 아이큐였다. 메이웨더는 되도록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물론 특유의 수읽기를 통해 경기의 흐름을 미리 자신 쪽으로 끌고 유지해갔으며 작은 그림, 큰 그림을 모두 그려놓고 링 안에서 작품을 만들어나갔다.

거기에 지루한 경기에 따른 관중들의 반응과 평가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탄탄한 멘탈까지 가지고 있어 경기를 할 때 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자랑했다.

파퀴아오는 신장이 작고 리치(170cm)가 짧은 것을 물론 흑인, 멕시칸, 백인들에 비해 위상이 떨어지는 아시아 복서라는 점에서 강적과 맞설 때마다 언더독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천부적 센스와 피나는 노력으로 만든 자신만의 강력한 파이팅 스타일이 있었다. 메이웨더가 특유의 운영을 통해 수비의 끝을 보여준다면 파퀴아오는 압도적 화력으로 상대를 질려버리게 하는 유형이다.

파퀴아오의 최대 장점은 빠른 발과 무시무시한 핸드 스피드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경기 내내 쉼 없이 움직이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펀치를 날린다. 빈틈을 파고들어 맞추는 재주가 빼어나고 펀치력 역시 만만치 않은지라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상대는 누적 데미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일쑤다.

파퀴아오의 이른바 '기관총 펀치'는 상대 입장에서 공포의 대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메이웨더처럼 어린 시절 체계적으로 복싱을 배우지 않은 관계로 정석적이지 않은 부분도 많다. 바로 그 점이 특유의 연타 능력과 맞물려 상대를 더욱 힘들게 한다. 변칙적 궤도로 엇박자가 섞여서 쏟아지듯 들어오는지라 카운터 타이밍을 잡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스탭을 쉬지 않고 밟으며 '위빙(weaving)-더킹(ducking)'을 거듭하게 되면 상대 입장에서는 파퀴아오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받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받게되는 공격은 매서워지고 반격은 힘들어지게 되어 중압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메이웨더는 은퇴 후에도 어지간한 현역 스타 복서 이상으로 돈을 벌어들인다.

메이웨더는 은퇴 후에도 어지간한 현역 스타 복서 이상으로 돈을 벌어들인다. ⓒ 메이웨더 트위터

 
서로 다른 중년의 행보, 각자의 마이웨이
 
파퀴아오와 메이웨더는 성장 과정, 파이팅 스타일, 커리어 등에서 닮은 듯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라이프 스타일에 있어서만큼은 확연히 차이나게 다르다. 파퀴아오는 필리핀 국민 영웅으로 불리는 인물답게 복서 이외의 활동도 매우 바쁘다. 예비역 대령 신분, 음반가수, 영화배우는 물론 상원의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전설적 복서로서 파퀴아오의 일거수일투족은 필리핀 내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에 관련된 것은 화제 선상에 바로 올라간다. 기부, 효자 등 훈훈한 것은 물론 이혼소송, 탈세의혹 등 좋지 않은 쪽으로도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것을 떠나 복서로서의 파퀴아오는 투혼이 넘치다 못해 끓어 넘치는 모습이다. 그는 지금도 현역이다.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기도 했었으나 다시금 복귀해 경기를 가졌고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나이를 초월한 경쟁력을 과시한 바 있다.

현재 2년여 가까이 링에 오르지 않아 "사실상 잠정 은퇴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27전 무패의 WBC, IBF 웰터급 통합 챔피언 에롤 스펜스 주니어(31‧미국)와 오는 8월 22일 라스베이거스 특설 링에서 맞붙기로 하면서 복싱 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를 감안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도 크지만 복싱을 향한 열정만큼은 대단해보인다.

반면 언제나 그랬듯이 메이웨더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마이웨이를 몸소 실천해가고 있다. 파퀴아오가 어느 정도 다른 이들의 기대감까지 함께 품고 나아가는 느낌이라면 메이웨더는 철저히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현역시절, 복싱은 물론 타종목 스타들까지 눌러버릴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복싱 스타일은 갈수록 지루해져 갔지만 거만한 악동컨셉으로 주변의 관심을 사면서 확실한 캐릭터를 만들어 갔고 영리한 경영까지 더해져 돈 방석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어느새 '머니'라는 새로운 별명까지 생겨났다.

은퇴한 지금도 메이웨더의 자본주의 끝판왕 기질은 여전하다. '돈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그의 철학처럼 은퇴 후에도 자신의 캐릭터를 이용해 큰돈을 계속해서 벌어들이는 영리함이 돋보인다. 인기 MMA 파이터 코너 맥그리거(32·아일랜드)와의 이벤트성 복싱 경기는 어지간한 스타 복서간 시합 이상의 관심을 끌었고, 킥복싱 유망주 나스카와 텐신(23‧일본)과의 복싱 시범 경기 역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최근에는 2300만명 팔로어를 보유한 유명 유튜버 로건 폴(26·미국)과의 복싱 시범경기를 통해 또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어찌보면 복싱과 전혀 관계없는 이들과의 시합인지라 레전드 복서로서 명예가 떨어지는 행보일 수도 있겠지만 메이웨더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더욱이 3경기 모두 어지간한 복싱 빅매치급 이상의 돈이 오갔다. 링을 떠나 있지만 현역들이 전혀 부럽지 않은 메이웨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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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웨더 파퀴아오 유튜버 로건 폴 나스카와 텐신 필리핀 상원의원 파퀴아오 21세기 복싱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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