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까지 한 배우 염문경.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까지 한 배우 염문경. ⓒ 엣나인필름


'연기하고 글 쓰는 창작러입니다'.

모양부터 남다른 정사각형 모양의 명함엔 굵은 글씨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말 그대로 호칭을 뭐라 할지 잠시 고민하게 된다. EBS <자이언트 펭TV> 기획작가로, 그리고 두 편의 단편영화 감독, 본인의 경험담을 녹인 에세이집도 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인이 된 후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건 연기였다. 배우 염문경 이야기다.

20대 성소수자 청년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또한 그에겐 일종의 확장형 도전이었다. 연출자인 김조광수 감독이 평소 1990년대생 성소수자 지인들로부터 들은 여러 이야기를 영화화할 생각이었고, 염 작가가 감독의 구상을 글로 실현해낸 것이다.

직장인 남자친구와 이별하게 된 주인공 하늘(이홍내), 하늘의 친구이자 인기 BJ로 활동하는 봉식(정휘)의 좌충우돌기가 그렇게 탄생했다. 염문경은 영화에서 하늘 남자친구의 여동생 역도 맡았다.

연대의 마음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님을 한 멘토링 프로에서 만났다. 절 김조광수 감독님께 작가로 추천해주셨는데 사실 제가 김조광수 감독님이 제작한 <악질경찰>에 출연하기도 했기에 인연은 있었지만 그땐 대화할 기회가 없었고, 작가로서 이번에 만나게 됐다. 아마 제 <자이언트 펭TV> 이력도 보셨을 테고, 젊은 세대 이야기를 하시려다 절 만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냥 인사하는 자린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서 제가 감독님 말을 받아적고 있더라(웃음)."

그간 등장했던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다소 무겁거나 어두웠던 데 비해 <메이드 인 루프탑>은 시종일관 밝다. 물론 가족의 반대 등이 일부 묘사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주인공들은 이미 성 정체성 고민을 끝난 이후의 캐릭터였다. 염문경은 "혹시나 제가 편견이 담긴 게 있었다면 감독님과 제작사 대표님이 바로 잡아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당사자성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며 말을 이었다. 김조광수 감독과 제작사 레인보우팩토리 김승환 대표는 국내 최초로 결혼식을 올린 동성 부부다.

"제 주변의 소수자 친구들을 봐도 저와 엄청 다르지 않거든. 흔히 생각하는 '성소수자스러운',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걸 영화에 넣는 게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내 옆에 있는 친구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친구들이 알게 모르게 받고있는 제약이 있는데 그걸 영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분들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캐릭터나 대사에 저 자신이 많이 묻어있는 것 같다. 하늘이가 투정이 많은 캐릭터인데 연애에선 아직 유치한 자세가 있다. 그건 제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웃음). 난 여자고,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굳이 안 하려 했다. 남남 커플이니 좀 다를 거야 라든가 같은 생각 말이다.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같고, 그 나이 때에 할 만한 선택들이 있으니 말이다."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관련 이미지.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관련 이미지. ⓒ 레인보우팩토리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여성 문제, 소수자 문제에 눈을 뜨고 행동하는 태도 또한 이번 기획을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데에 십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의 에세이 <내향형 인간의 농담>엔 그가 몸소 겪은 여러 형태의 위력들, 차별과 폭력이 나열돼 있다. 염문경은 "무엇보다 제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한다는 마음이 크기에 성소수자 이슈에 연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로 맺어진 연연 또한 그에겐 소중해 보였다. 이홍내, 정휘 등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또래 배우들과 함께 밥도 먹으러 다니며, 나름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연극을 한 게 벌써 2년 전인데 또래를 만나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함께 작업하는 걸 나도 모르게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장편영화 작가와 배우를 동시에 한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제 기억으론 대본 쓸 때 제가 주인공들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실제 캐스팅이 좀 달랐다. 감독님이 보낸 사진을 보고, 어라? 이랬는데 실제 첫 미팅에서 배우들을 만나고 글이 생명력을 얻으니까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를 까먹게 되더라. 좀 식상한 말이지만, 이홍내 배우와 정휘 배우 외에 다른 배우를 생각할 수 없게 됐다(웃음)." 

선택과 집중의 시기

다양한 경력이 있는 그도 여전히 대중 앞에 서는 건 떨리는 일이라고 한다. "SNS 프로필에 액터(Actor), 라이터(Writer), 크리에이터(Creator)라고 했었는데 이 중에 크리에이터를 지웠다"며 최근 변화를 언급했다.

"이제 선택과 집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연출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던 게 아니라 <백야>나 <현피> 같은 제 단편영화는 제 안에서 나온 소재고 작은 프로젝트다 보니 연출까지 하게 된 것이다. 연출은 저보단 더 자기 색깔이 강하고 확신이 있는 분들이 하는 게 좋지 않나 싶다. 좋은 작가로 성장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배우로 제 사회적 정체성을 시작했고, 그걸 근본으로 품고 있기 때문에 설령 작가보다 성공이 늦다고 해도 연기는 꾸준히 할 생각이다. 절 배우라고 말하면 반응이 크게 두 가지다. '연기할 거면 연기만 해라' 혹은 '아직도 배우일을 하시냐'다. 둘 다 미세하게 상처긴 하지(웃음). 올해부터 좀 초연해지려고 한다. 당장 배우 일이 없으면 실망스럽긴 하지, 하지만 힘을 빼고 하나씩 해 나가려 한다."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까지 한 배우 염문경.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걸 영화에 넣는 게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내 옆에 있는 친구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엣나인필름

 
중학교 입학 직전까진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부모님 반대로 얌전히 대학에 입학해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우연히 연극동아리에 든 게 평생의 꿈을 품게 했고, 졸업 후 다짜고짜 극단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영화 <안시성> <박열> <미씽: 사라진 여자> <악질경찰> 등의 조단역도 경험했다. 생계를 위해 방송 보조작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자이언트 펭TV> 제작진을 만나게 됐고, 웹드라마 작가일도 하게 됐다. 누군가는 하나라도 시작하기 어려운 일을 그는 몇 개나 해내고 있다. 그를 '다목적 프리랜서'라 소개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다양한 활동을 하자고 계획한 건 아니지만 그런 경험이 절 유연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제가 작가 아카데미를 다녔거나, 문예창작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열등감이 들기도 했는데 대신 어떤 장르를 하더라도 본질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런 경험치가 완전 다른 분야에서 일할 때 활력이 되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결과물을 내는 힘은 불안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스스로에게 좋지는 않다. 불안함을 다스리기 위해 명상도 요즘 배운다. 불안이 덜한 사람이었으면 아마 좀 더 포기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뭔가 해내야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일한 게 결과적으론 다양한 커리어가 됐다. 이젠 좀 더 불안함을 다스리고 그때 하고 있는 한 가지에 집중해보려 한다." 


현재 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두 여성이 성범죄 사건을 쫓아가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또한 분노로 가득찬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염문경은 "예전엔 중립적 태도를 비겁하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창작자로선 분노를 동력으로 하기 보단 이해와 유머를 동력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쉽게 지치거나 피로하지 않고 오랜 시간 행동하게끔 하는 힘은 분노가 아닌 재치에서 나올 거라는 그의 철학이다.
염문경 메이드 인 루프탑 김조광수 이홍내 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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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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