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처음 알았다. 그와 인연을 맺은 지 스무 해가 넘어가는데 그의 아버지가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가 월북했을 때 그의 나이 네 살이었다. 그는 평생 그 사실을 그는 가슴속에 꼭꼭 숨기고 삭이며 살았다. 하기야 그가 살아오면서 걸어온 시대가 어찌 '나의 아버지가 월북했소' 하고 말을 꺼낼 수 있는 시절이었겠는가. 그런 그가 첫 시집을 내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월북으로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타인은 상상할 수 없다. 어린 시절, 가난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리움이었고 고독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존태다. 나이는 76세. 그는 2019년 문단에 등단에 늦깎이 시인이 되었고 2020년 첫 시집 <죄인의 꿈> (신세림출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첫 시집에서 어린 시절의 아픔과 외로움, 간계와 속임이 가득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족 통일에 대한 마음을 절절히 노래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를 노래하면서도 감정의 노출을 줄이면서 서사적 상황으로 풀어놓았다.
 
이존태 시인의 첫번째 시집 <죄인의 꿈>
 이존태 시인의 첫번째 시집 <죄인의 꿈>
ⓒ 신세림

관련사진보기

 
철없을 때
엄마께
'울 아버지 어디 갔어?'
물어보면
미국 돈 벌러 갔다고 하셨다

이제 철이 들어서
엄마께 물어보지 않아도
북에 가신지 알게 되었다
북한에 간 것이 죄가 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간 친구는
감옥서 한평생 보냈다
그래서 울 아버지가 죄를 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죄 지은 것 없는데
아버지 따라 덩달아 죄인이 되었다 (하략…)

- <죄인의 꿈> 중에서 


미당 서정주는 그의 시 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우건 팔할(八割)이 바람이었다며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고 했다. 그런데 이존태 시인은 들쥐처럼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마음 둘 곳 없어 들쥐처럼 헤매며 자신을 다스렸을 그의 어린 시절은 당사자가 아니면 어찌 알겠는가.

아버지 당신은 모르지요
아비 없는 자식이 된 아들이 얼마나 고독했는지
놀림을 받는 날이면 너무 분하고 슬퍼서
혼자 들쥐가 되어 산길을 헤맸습니다

- <아버지 당신은 모르지요> 중에서


연좌제에 마음이 묶인 그는 그리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원망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 보일라 입과 마음을 꼭꼭 숨기며 가슴앓이로 젊은 날을 보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는 가족에 대한 마음과 개인의 마음, 분단의 현실에서의 아픔과 불평등, 모순을 두 권의 시집에서 노래하고 있다.
 
인존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꽃의 고백>
 인존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꽃의 고백>
ⓒ 인간과 문학사

관련사진보기

 
그는 이번에 첫 번째 시집을 낸 지 1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꽃의 고백>(인간과 문학사)을 내놓았다. 첫 번째 시집에서 가족사와 분단의 현실과 통일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노래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좀 다르다.

'시 속에 나를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내 속에, 우리 속에 가득 쌓인 억울함을 누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추억과 아픔과 그리움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내에 대한 마음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여보
은행나무 잎처럼 푸르고 정정했던 당신
지금은 누렇게 변해버렸소
우리 처음 만날 때 당신 참 예뻤소 (……)
50년도 훌쩍 지나버린 오늘
당신은 여전히 고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소
그런데 그 얼굴 밑에 흐르는 누런 눈물 자국은
노란 단풍잎처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오 (……)
나는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소
후회될 것도 하나도 없소
그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오 (……)

- <은행나무> 중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마음으로만 보는 사랑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는 사랑의 연속이다. 50년을 함께 한 시간 속에 참으로 곱고 예뻤던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노란 은행잎처럼 눈물 자국의 흔적을 남기고 아프고 늙어갔다. 그런데 그는 그런 아내가 있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한 사랑 고백이 있을까. 일흔이 넘은 사내의 고백치곤 참 순정적이지 않은가.

오래전에 본 그는 백발의 소년과 같았다. 시집 속에 보인 사진 그대로의 모습처럼 그는 늘 미소를 지으며 생활하는 경건한 이 시대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런 그에게서 한 번도 분노의 마음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많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입으로 표출하지 않은 분노를 그는 글로 표현했다.

흔들려라 흔들려라 저 억새처럼 / 아픔은 절대 잊지 말고 흔들려라 / 흔들리다 부딪쳐 붉은 피 낭자한 / 저 억새의 잎처럼 흔들려라// (……) //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깜방살이 익숙한 시민들이여 / 자유가 그리워 총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절규가 가득한 저 억새들이여 / 선한 시민들이여 흔들려라 / 한때 정의를 목숨처럼 아꼈던 저 억새 숲에 숨은 그대들이여 (……)

- <억새처럼> 중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선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죽음에 이르기도 했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총칼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자유라는 이름으로 얻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고발자가 되자고. 말 못 하는 허수아비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닌 고발자가 되자고.

수많은 생각과 아픔을 꾹 참고
부르르 떨며 진저리치는 나는 그저 허수아비였을 뿐
그러나 언제까지 꼭두각시로 머물 수는 없다
입이 있어도 고발하지 못한 진실
황량한 광야의 고발자가 되자

- <허수아비> 중에서


그의 시편을 보면 꽃과 나비라는 시어가 많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노래한 시들도 있다. '나는 나비 때문에 꽃이 되었습니다 / 그대가 수만 번 찾아, 내 입술 비비지 않았다면 / 어찌 꽃이 되었겠습니까'.

꽃은 그에게 변화와 머묾을 의미한다. 나비는 자유로움과 꽃을 향한 그리움이다. 그런데 시인은 나비 때문에 꽃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비를 향한 마음 때문에 꿈을 꾸기 시작했고 삶의 가치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나비는 그가 가장 가까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고 뭘까? 이 물음이 그의 시에 시발점이고 늦깎이 시인이면서도 젊은 시인 못지않게 왕성하게 시를 생산하고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그는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쓸 것이다. 유희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에서 부르는 시를.

꽃의 고백

이존태 (지은이), 인간과문학사(신아출판사)(2021)


태그:#죄인의 꿈, #꽃의 고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너! 나! 따로 가지 말고 함께 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