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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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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은 문무를 겸한 흔치 않는 독립운동가이다.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지만 문사의 역량이 뛰어나고 역사에 대한 식견과 인식이 남달랐다. 저서 『한국혼』이나 시문집 『아목루』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예관이란 아호와 '예(晲)' 자를 풀어 쓴 아목루(兒目淚) 즉 "예관이 피눈물로 쓴 시"라는 책이름에서 예사롭지 않는 결기와 강기를 내보인다. 

그의 생애를 사자성어로 요약이 가능하다면 '일목요연(一目瞭然)'이 아닐까 싶다. 비록 한쪽 눈이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을 훤히 꿰뚫으면서 결코 한 눈 팔지 않고 조국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길지 않는 생애에 국내외를 떠돌며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분이다.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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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은 1911년 망명길에 나서면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큰 강을 출렁이며 흘러가는데  
 언제나 다시 동으로 돌아오랴
 수도 없이 많은 열혈 지사들
 박랑사중에서 환호성 부르리라.

동쪽나라의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에서 생을 마쳤지만 한번도 자신이 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았다. 1912년 가을 「난징의 동지들에게」보낸 글은 시문이라기보다 차라리 독립의 길에 나서자는 통절한 격문이다. 시문집 『아목루』에서 뽑았다.

 동트지 않은 이른 새벽에
 조용히 기도하며 천궁에 절하노라
 큰 길에는 사사로이 굽은 길 없고
 지극한 정성 하늘에 닿았으리
 천지가 뒤바뀐 지 오늘로 며칠인가
 괴로움과 아픔이 겹겹이 쌓였도다
 빈 말은 죄다 부질없는 짓
 실행만이 모름지기 공을 성취하리
 금수강산은 어디 두고 가는가
 풍랑만이 내 배에 동승했구나
 푸른 옷의 젊은이들 장쾌하고
 성근 백발 노옹도 씩씩하도다
 그리운 임 아스라이 있으니
 그대들 사공 되고 키잡이 되어
 한맘 한뜻으로 저 언덕 오르면
 어기영차 함성소리 우렁차리라
 환영 겸 축하모임 열릴 그 날엔
 그 기쁨 정녕 다함이 없으리라
 팔월이라 상해의 황포강 위에서
 나 예관은 삼가 간절히 절하노라. 

예관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은 남달랐다. 특히 개국성조 단군과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숭앙심은 독특했다.

1. 선생께서 평소에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셧음은 평소의 말씀이나 행동으로 표현되어 나타난 것 이외에도, 아침저녁에 반드시 한국 지도를 향해서 온 정신을 기울여 자세히 살펴보시고 묵묵히 사색하셨으니, 삼천만 한국 국민이 지금 왜구에게 받고 있을 상처를 위로하고 계신 듯 또한 광복 후에 어떻게 조국을 다시 건설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2, 매일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새벽과 밤에는 반드시 우리나라 개국의 성조(聖祖) 단군(檀君)의 신상(神像)을 향해 향을 피우시고, 절을 두 번 하시고, 아울러 묵도(黙禱)로써 하루 바삐 혁명을 일으켜 산하를 광복하고 물과 불같은 괴로움 속에 빠진 삼천만 동포를 구할 것을 기원하셨다. (주석 11)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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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위국충정의 단심은 어느 때도 퇴색하지 않았다. 34세인 1914년 정월 보름날 밤 동지들과 저녁을 먹고 소회를 남겼다. 『아목루』에 나온다.

 이 시대에 생장하게 한 것은
 어엿한 남아를 기다린 것이네
 오늘 모두의 아픔에 어이 상심하랴
 천금 같은 다짐 결연히 서로 지켜내세
 푸른 파도 솟구치니 서로 돕자 노래하고
 큰 바람 일어나니 큰 공 세워 귀향하리라
 잔 들어 제군들의 건안을 세 번 축원하나니
 이 붉은 충정에 어이 구구한 사심 있으랴.
 
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 현재 다른 사람이 실제 생활하고 있다.
 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 현재 다른 사람이 실제 생활하고 있다.
ⓒ 이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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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선생은 신혼 초에 서울에 유학하면서 부인과 이별하고 뒤이어 중국 망명으로 긴 세월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ㆍ1혁명이 발발할 때 부인이 아들 상호와 어린 딸(명호)을 데리고 '남편 찾아 3만 리'의 상하이에 왔다.

딸(申明浩)은 성장하여 1920년 민필호와 결혼하였다. 민필호는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의숙 4학년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 동제사를 거쳐 박달학원에서 공부하고 신규식이 국무원총리 겸 외무총장에 취임하면서 비서로 발탁되어 활동하고, 이후 상하이 인성학교 운영, 만주에서 조직된 신민부 참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독립신문』 발행, 김구 주석 판공실장 겸 임시정부 외무차장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아버지가 순국할 당시 10세이던 아들(申尙浩)은 17세 때 항주에서 요절하여 항주교외에 안장하였다. 예관의 부인 조정완 여사는 남편에 이어 외아들까지 사망하자 상하이에 칩거 중 일제가 이곳까지 점령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 송환되어 1945년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신규식 국무총리 역시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여전히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고 적어놓고 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 8'에서 영면해 계신다
▲ 신규식 국무총리 무덤 신규식 국무총리 역시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여전히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고 적어놓고 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 8"에서 영면해 계신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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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3일 유족이 세운 천안의 독립기념관 순국선열 어록비에는 유저 『한국혼』의 한 대목이 새겨졌다.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죽으므로 써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비록 지도가 그 색깔을 달리하고 역사가 그 칭호를 바꾸어 우리 대한이 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하나의 대한이 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


주석
11> 민필호, 앞의 책, 34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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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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