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쿠바의 줄서기, 울티모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역시나 스마트폰을 이용한 인터넷 검색이었다.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은 어떤지, 쿠바는 안전한 건지, 우리는 과연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다행히 내가 묵은 까사에서는 호텔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도 와이파이를 연결할 수 있어서 굳이 특정한 공간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쿠바의 관광업이 발달하면서 까사의 와이파이 보급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와이파이가 가능한 공간
 와이파이가 가능한 공간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사실 쿠바를 여행하기 전 살펴 본 자료에서는 통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와이파이가 지천에 널려있는 우리와 달리 쿠바에서는 통신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통신카드를 산 뒤 와이파이가 가능한 공간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꼭 등장하는 말이 '울티모'였다. 쿠바의 줄 서는 문화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는데, 쿠바에서는 줄을 서는데 굳이 차례대로 서 있지 않고 스페인어의 '마지막'을 뜻하는 '울티모'를 외치면 가장 마지막으로 대기하는 사람이 손을 든다고 했다. 그럼 나는 그 사람의 다음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자유롭게 다른 곳에서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이는 결국 번호표 시스템을 대신하는 문화였다. 얼핏 생각하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문화인 듯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순서를 확인하는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번호표의 경우 가게 주인이 혹은 기계가 현재 몇 번이라고 계속 공지해야 되지만, '울티모' 문화에서는 소비자가 계속해서 앞 사람을 주시해야 되기 때문이다. 
 
줄을 서는 대신 '울티모'
 줄을 서는 대신 "울티모"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어떤 책에서는 이런 줄서기가 쿠바의 자유분방함이나 적도 특유의 느림의 미학을 드러낸다고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비합리적일 문화일 뿐이었다. 혹여 내 앞의 사람을 놓치는 경우 어찌된단 말인가. 그것은 현지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불친절한 시스템이었으며, 우리처럼 새치기에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문화였다.

혹자들은 이런 문화까지 쿠바의 낭만으로 칭송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쿠바가 더 자본주의화 되고 발전하게 된다면 이 '울티모' 문화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쿠바의 민속 신앙, 산테리아

까사 주인이 해주는 아침은 지금까지 먹었던 호텔의 그것보다도 훨씬 맛있었다. 정성스럽게 차려준 빵이나 열대과일, 오믈렛 등이 더 싱싱하고 정갈했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겠으나 주인 부부의 친절함이 음식 맛을 더하고 있었다. 이래서 쿠바에 가면 까사에 묵으라 했던가. 호텔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아침을 다 먹고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건넨 뒤 까사를 나섰다. 오늘의 일정은 트리니다드 자유여행. 산악구조대 형님과 또다시 도심의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일부 구역은 관광객들을 위한 점포나 식당들로 즐비했지만, 그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이방인들과 상관없는 쿠바 현지인들의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차 타고 트리니다드 돌기
 마차 타고 트리니다드 돌기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알록달록한 원색의 골목길. 그곳에는 지나가는 이방인들에게 상표 없는 쿠바산 시가를 파는 사람들, 대문 앞에서 놀다가 이방인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 골목에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마작을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낯선 동시에 익숙한 삶의 모습이었다. 트리니다드는 과연 언제까지 이 평화로운 풍경을 간직할 수 있을까?

그렇게 쿠바 사람들의 집을 기웃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그들의 집안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톨릭 성인으로 보이는 조각상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알던 일반 가톨릭의 조각상들과는 묘하게 조금씩 달랐다. 성모 마리아가 흑인 여성인 것도 있었고, 예수의 모습도 왠지 낯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것은 바로 쿠바의 민속 신앙 산테리아라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자신들의 민속신앙을 지키는데 있어서 스페인 농장주들에게 탄압을 받으니, 부족신을 가톨릭 성인의 모습으로 바꾸어 종교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아바나에서 봤던 서아프리카의 부두교 등이 쿠바에 토착화된 형태였다.
 
쿠바의 전통신앙
 쿠바의 전통신앙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애잔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던 식민지의 노예들. 아마도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은 그것도 눈에 거슬렸지만 노예들을 부려먹어야 하는 사정상 현실과의 타협을 위해 어쨌든 산테리아도 가톨릭의 일종이라며 애써 눈감아줬을 것이다. 조선시대 가톨릭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유교의 제사 의식을 애써 종교행위가 아니라 문화로 해석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트리니다드에서의 마지막 밤

적도의 정오는 계속 돌아다니기에 너무 뜨거웠다. 잠시 쉬려는 생각에 까사로 돌아오자 주인 아저씨가 한 마디 건넸다. 그래도 쿠바의 2월은 겨울이라 시원한 편이라고. 우와. 적도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더위에 적응하는 것일까?

한숨 늘어지게 잠을 잔 뒤 오후 늦게 다시 까사를 나섰다. 각자 흩어져 트리니다드를 돌아다니던 일행들과 트리나타드 뒷산에 있는 송전탑에서 만나 일몰을 구경하고 저녁을 먹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제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트리니다드의 밤문화를 즐기기로 했다. 여행책자를 보니 트리니다드의 동굴클럽이 유명하다고 했다. 
 
트리니다드의 송전탑에서 본 풍경
 트리니다드의 송전탑에서 본 풍경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트리니다드의 또 다른 명소 도자기 공방을 찍고 송전탑 가는 길. 나의 안색은 어두워져 있었다. 공방까지 마차를 타고 갔는데 그 흔들림에 안경집을 잃어버린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귀국 때까지 밤에도 꼼짝없이 까만 선글라스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당장 나의 가장 큰 걱정은 오늘 갈 동굴클럽이었다. 어두워서 춤이나 출 수 있을까?

일행들과 함께 트리니다드의 전경이 훤히 다 보이는 송전탑에서 일몰을 즐긴 뒤 산에서 내려와 식당을 찾아다녔다. 워낙 관광객들이 많아 식당마다 꽤 긴 줄을 서야 했는데 어떤 쿠바 여성이 다가와 적극적으로 구걸하기 시작했다. 현금이든 가방고리든 상관없다며 자신의 아이에게 줄 아무거나 달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느 곳이든 구걸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공산주의 국가 쿠바인데, 나는 지금 오롯이 밤을 즐기려고 서 있는데, 이들은 하루하루 생계 챙기기도 바쁘구나. 괜히 미안했다. 그리고 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가리고 있는 선글라스가 고마웠다.

저녁을 먹은 뒤 드디어 동굴클럽으로 향했다. '아야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곳은 생각보다 컸다. 자연동굴을 클럽으로 변형시켰다고 했는데, 동굴에서도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 그들의 열정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그냥 관광지화 하지 않았을까? 
 
트리니다드의 동굴클럽
 트리니다드의 동굴클럽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남녀노소 온갖 인종들이 섞여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제처럼 꼭 살사를 출 필요는 없었고 음악에 맞춰 각자 신나게 몸을 흔들 뿐이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계속 마시는 모히또와 다이끼리, 그리고 럼.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검은 선글라스를 통해 볼 수밖에 없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그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동굴 속에서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언어가 달라도, 모습이 달라도 우리는 음악과 춤으로 하나였다. 이것이 바로 쿠바의 뜨거운 밤이로구나. 자, 내일 우리는 이곳을 떠나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간다.

태그:#쿠바, #트리니다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