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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진행하는 특별한 여행 이야기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1대1의 비율로 짝을 맺어 소규모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사진 설명의 괄호 안에 표기된 정보는 필름 종류이며 괄호가 없는 사진은 디지털 사진입니다.[기자말]
편백숲 삼림욕장에 도착하면 약 1km 정도 산책을 할 수 있는 오솔길이 나 있다.
▲ 아늑한 편백숲 편백숲 삼림욕장에 도착하면 약 1km 정도 산책을 할 수 있는 오솔길이 나 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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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마지막 주 토요일, 학교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하다가 바람을 쐬고 싶어 진안으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눈앞에 '편백숲 삼림욕장'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진입했다. 한 20분 걸어 올라갔을까. 휴대폰이 더 이상 신호를 받지 못했다. 순간 '바로 이곳이야!'라는 생각과 함께 신선한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이곳은 평소 생각하던 이색 여행 장소로 매우 적합해 보였다. 야영 짐이 담긴 배낭을 학생과 나란히 메고 올라와, 하룻밤을 보내며 진한 상담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출발하여 거칠지 않은 산책로를 걸으면 시원하게 뻗은 편백숲이 금세 펼쳐졌고 쉴 만한 정사각형의 나무 틀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으며 화장실도 있었다.  

우연히 찾은 체험학습 장소

무엇보다 데이터와 통화 신호가 모두 중턱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체험활동 장소로는 부적합하겠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하루 정도를 전파 없는 곳에서 온전히 자연과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숲을 걷는 내내 어떤 방침과 여정을 꾸릴지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월요병 따위는 숲속에 던져버리고, 출근하기가 무섭게 교감선생님을 만나 이 여행의 실행 가능성을 타진한 후 곧바로 계획서 작성에 돌입했다. 여행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되도록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본 여행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온종일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골똘히 생각하다, 사제공감 배낭여행 '주파수 밖으로'라는 제목을 생각해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예상하여 대책을 세우고, 1시간여 만에 계획서를 완성한 후 학교를 휘젓고 다니면서 1차 여행의 참가자를 모집했다.

대부분의 아이가 핸드폰이 안 터진다는 지점에서 손사래를 쳤다.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돌아다닌 결과, 여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저 가고 싶어요!"를 외쳤다. 그중 시간이 맞는 아이가 딱 두 명이 되었다. 적당했다.

성공적이었던 첫 번째 발걸음

6월 6일은 일요일이었고, 6월 7일은 재량 휴업일이었다. 혹시나 행락객이 있을지도 모르는 주말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6일 오후 진안 읍내에서 장을 봤다. 삼림 내에서는 취사가 불법이기 때문에 도시락과 과일, 빵과 물을 샀다.

본교 수석교사도 함께해 주셨다. 요즘 우리 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1 대 1의 비율로 함께 식사하거나 상담 여행을 가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공립이지만 대안학교여서 가능한 계획이기도 하다. 1박 2일로 떠나는 여행에서는 이동하는 시간을 비롯하여 새벽이 되도록 교사와 학생이 학교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깊이의 대화를 나눈다.
 
큰 배낭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 사진을 찍은 후 짐과 배낭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 주차장에서 큰 배낭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 사진을 찍은 후 짐과 배낭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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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다 보면 항상 엉뚱한 상황이 한두 번씩 꼭 발생한다. 오른쪽 학생이 신은 신발을 보면 한겨울 방한화인 것을 알 수 있다. 슬리퍼를 신고 왔길래, 운동화를 챙기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자신 있게 당연히 챙겼다고 대답한 녀석이었다.

차에서 내려 배낭을 메기 전 신발을 확인하더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쌤(선생님), 큰일 났어요. 제 신발 좀 보세요."
"엥? 웬 털신을 가져왔어."
"아침에 정신이 없었나 봐요.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신어야지. 신어봐."


다른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신발을 신고 기다리던 녀석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슬리퍼를 신고 조심히 올라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차장의 온도는 32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지만, 사전답사를 통해 요철이 심하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전을 신신당부하며 슬리퍼를 허락했다.
 
엄지를 힘차게 올리고 있는 학생은 평소 아침엔 조깅, 저녁엔 유도 수업으로 함께 하고 있다.
▲ 산행의 초입 엄지를 힘차게 올리고 있는 학생은 평소 아침엔 조깅, 저녁엔 유도 수업으로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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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얘들아.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는 발을 딛는 각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바로 접질릴 수 있어. 땅과 앞을 계속 주시하면서 걸어야 한다. 알았지?"
"네. 그렇게 하고 있어요!"
"배낭 메고 걸으니까 그냥 걷는 것보다 더 기분 좋지 않냐? 쌤은 항상 그러던데."
"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나쁘지 않아요!"


30~40분 정도만 용을 쓰면 도착하는 짧은 코스였고 길이 부드럽고 안전했지만, 방심은 금물이기에 아이들 뒤를 따라가며 지속적으로 안전을 살폈다. 한 학생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면서도 싫증이나 짜증을 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성실히 즐기고 있었다.

편백의 쭉쭉 뻗은 자태가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께 온 선생님은 행복한 표정으로 좋다는 감탄을 거듭했다. 거센 숨을 몰아쉬는 아이들의 볼에는 상기된 기쁨이 묻어 있었다. 미리 보아 둔 나무 쉼 틀(덱)에 몸이 무너지듯 배낭을 내렸다.
 
주차장에서의 열기는 사라지고 시원한 숲의 공기가 다가왔다.
▲ 편백숲에 도착한 아이들 주차장에서의 열기는 사라지고 시원한 숲의 공기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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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서에는 '개인별 명상'으로 되어있는 시간. 짐을 어지럽게 내려놓고 편하게 개인의 시간을 갖고 있다.
▲ 쉬는 시간 계획서에는 "개인별 명상"으로 되어있는 시간. 짐을 어지럽게 내려놓고 편하게 개인의 시간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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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를 따라 100여 미터만 걸으면 계곡이 나온다. 길이 따로 없으니 오히려 자연 속에 푹 담긴 것 같다.
▲ 계곡 가는 길 물소리를 따라 100여 미터만 걸으면 계곡이 나온다. 길이 따로 없으니 오히려 자연 속에 푹 담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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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길어 여유를 부릴 만한 시간이 충분했다. 텐트를 치기 전 두 시간이 넘도록 가만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계곡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뭇잎 사이를 통과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바람이 참 청량했다.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배낭, 텐트, 매트 등 모든 야영 장비는 2020년 통합기행을 위해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한 것이다. 2020년에 코로나가 잠시 주춤할 때 우리는 종전의 베트남 통합 기행을 대신하여 8박 9일로 강원도 백패킹(backpacking) 노작기행을 실시한 바 있다. 그 때 이 장비들을 사면서 앞으로도 꾸준히 사용할 것을 다짐했는데 그것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나 할까.

해가 능선 뒤로 넘어가자 산뜻했던 녹색에 무게감이 더해졌다. 들판이나 바다의 저녁은 어두움에 붉은 기운이 더해지지만, 산속의 저녁은 마치 새벽처럼 푸른 기운이 감돌 때가 많다. 작은 텐트들을 뚝딱 치고 조금 있으니 금세 어둠이 내렸다.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방울토마토를 입안에서 터트렸다.
 
나무 틀이 작아서 텐트의 위치를 잘 잡아야 했다.
▲ 텐트들 나무 틀이 작아서 텐트의 위치를 잘 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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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를 길게 열어서 빛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얼굴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 야밤의 대화 셔터를 길게 열어서 빛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얼굴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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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터지지 않으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꼭 이런 곳이 아니고 전파가 수신되는 곳이라 하더라도 체험활동 및 대화를 위해 핸드폰을 잠시 꺼둘 수도 있겠으나, 애초에 통신이 되지 않으니 일말의 미련조차 사라져서 더욱 좋았다.

그믐밤, 달빛 대신 서편에서 올라오는 박명이 하늘에 조금 남아서 편백의 실루엣을 보여주었다. 먹을 것을 다 먹고서는 조그만 등불도 꺼버렸다. 머리 위로 별빛이 반짝였고 나뭇잎들은 액자가 되어주었다. 도란도란 나누던 대화에는 주제가 없었지만, 지금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양분이 되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마침 달이 없었기에 디지털로 세 장, 필름으로 한 장의 별 사진을 찍었다. 특히 필름 사진은 중형카메라로 3시간 동안이나 일주 사진을 담은 것인데 다음 날 아침 조작 실수로 렌즈를 열어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앞으로 이렇게 쉽게 별을 찍을 수 있는 하늘을 또 언제 만날지 기약이 어려웠기에 엄청난 짜증이 몰려왔다. 습기가 없었고 먼지도 적었고 구름과 달도 없었는데 게다가 쉬는 날 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하지만 바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사진은 나의 욕심에 불과했고 우리의 시간은 이미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육안으로도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 나뭇잎 액자에 담긴 별 사진 육안으로도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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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가 되자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스마트폰 중독이 흔한 요즘 청소년들은 밤에 잠을 자지 않아 낮에 병든 닭처럼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전원이 기숙사생인 우리 학교에서는 특히 밤새 몰래 핸드폰을 보는 바람에 밤낮이 바뀐 학생들이 절반 가까이 된다.

세 종류의 새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서로에게 건네는 차분한 말소리 등이 자장가가 되어 기분 좋은 졸음을 가져다주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몸의 리듬이 조정되는 듯했다. 하나둘 텐트로 들어가 쥐 죽은 듯 잠이 들었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햇살 가득한 숲속에서의 산책, 독서, 휴식

계획서상의 기상 시간은 오전 6시 반이었다. 나는 오전 4시부터 눈이 떠져 지난 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새소리를 감상하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오전 7시에 텐트 밖으로 나와 의자에 앉았고 여전히 고요한 아이들의 텐트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음 지었다.

"기상! 산책하러 갈 시간입니다."
"끄아아아. 네에."


아침치고는 맑은 목소리를 내며 여학생이 먼저 응답했다. 자는 내내 하고 잤는지 방금 한 건지 모를 헤어롤을 이마에 붙인 채로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곧이어 남학생도 요란스레 기지개를 켜며 바깥으로 나왔다.

오전에 계획된 것은 산책과 독서였다. 짐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1.2km 남짓의 산책로를 돌았고 의자에 앉아 한 시간가량 고요히 독서를 했다. 나는 숲속도서관이라는 작은 함에 비치된 동화책을 골라 읽었다.
 
숲속에서 막 잠을 깬 녀석.
▲ 빼꼼 숲속에서 막 잠을 깬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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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짐을 지고 차분히 걸었던 아이.
▲ 묵묵한 산책 뒷짐을 지고 차분히 걸었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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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도 않고 차분히 책을 잘 읽었다.
▲ 독서 중 졸지도 않고 차분히 책을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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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도 귀했고 숲속에서 이루어진 독서도 참 좋았지만, 가장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아래의 장면이었다. 계획서에 나와있는 독서 시간을 다 보내고, 짐을 싸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는데 너무 조용해서 바라보니 어느새 둘 다 잠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도 평온하고 숲속의 공기와 잘 어울려서 한동안 깨우지 못했다. 나도 숨을 죽이다가 잠시 졸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부스럭거리며 챙겼더니 부스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이 참 사랑스러웠다.
 
얼마나 평화로운 꿈을 꾸고 있을까.
▲ 잠깐의 꿀잠 얼마나 평화로운 꿈을 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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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행은 6월 18~19일로 계획되어 있다. 그때는 우리 학교에서 선남선녀 커플로 유명한 학생 둘을 데리고 이 숲으로 다시 큰 배낭을 메고 와서, 남녀의 만남에 대해 더욱 성숙한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상담을 할 예정이다.

청소년의 연애를 우려의 눈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가치 있는 만남이 될 수 있도록 지지와 조언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동행할 교사는 이제 2년 차를 달리고 있는 파릇파릇한 후배 교사이다. 또 어떤 대화가 오고 갈 것이며 어떤 마음이 서로에게 전달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태그:#고산고등학교, #대안학교, #진안, #편백숲, #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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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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