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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적으로 우리의 강리도(1402 세계지도)에 대하여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를 펴낸 학자는 일본 교토대학의 미야 노리코(宮紀子)였다. 그 의 책에 실린 조선초 천문도와 강리도 이미지를 먼저 감상해 보자.
 
조선초 천문도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1395) 조선초 천문도
ⓒ <モンゴル帝?が生んだ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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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세계지도
▲ 강리도 류코쿠본 조선초 세계지도
ⓒ モンゴル帝?が生んだ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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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 제목은 <몽골제국이 낳은 세계도モンゴル帝国が生んだ世界図 >(2007)인데 우리나라에서 나온 번역본에서는 제목이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2010)로 바뀌었다. 원서와 번역서의 제목을 배합하면 강리도의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즉, 몽골제국이 낳고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몽골제국이 없었더라면 강리도는 애당초 출생할 수 없었다. 강리도의 본바탕은 몽골의 세계사라 할 수 있다. 강리도에서 '조선'을 강조하면 그 이해가 매우 제한적이 되고 만다. 하지만 조선에서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강리도를 논할 일도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조선 초의 강리도 제작은 그 의미를 지대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단지 우리가 강리도를 생각할 때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점이 있다. 강리도의 초광역의 지리영역, 그리고 그것을 애써 담았던 세계관은 몽골/고려시대의 것이라는 점이다. 고려시대에 출생하여 성장한 강리도 제작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몽골/고려시대의 세계관과 지리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강리도에 반영되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강리도 제작자들이 활용했던 중국의 지도들도 고려 말에 수집된 것일 수도 있다. 한영우는 고려 말 나흥유의 지도로 추정한다. 아무튼 강리도를 몽골/고려시대의 배경속에 놓을 때 그 세계사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결박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국내외 학자를 불문하고 몽골사의 석학들이 강리도 연구에 성과를 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몽골이 낳은 최초의  세계사의 시각적 문헌이자 초상화가 바로 강리도이므로. 

앞서 언급한 미야 노리코도 세계적인 몽골 학자이고 강리도의 서방 지명 해독에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를 낸 교토대학의 스기야마도 몽골사의 권위자다. 스기야마는 2007년 <동서의 세계도가 말하는 인류최초의 대지평 東西の世界図が語る人類最初の大地平>이라는 눈문에서 강리도를 '인류최초의 대지평'으로 규정하고 200여 개의 서방 지명을 해독하였다. 강리도 연구에 돌파구를 낸 것이다.

서양으로 눈을 돌려 보자. 역시 몽골사가 피터 잭슨(Peter Jackson)은 <몽골과 서양 The Mongols and the West>(2005)에서 강리도를 평하여 말하기를 당시 서양에서 강리도보다 더 우수한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탁월한 몽골사가로 손꼽히는 토마스 T. 올슨(Thomas T. Allsen, 1940-2019)을 인용하지 않고 몽골사를 논하기 어렵다고 한다. 올슨은 중세 유라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몽골 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명저들을 남겼다.

올슨은 '몽골제국학'을 정치 담론으로부터 유라시아의 사상, 상업, 문물 및 문화의 교환을 포괄하는 담론으로 방향을 바꾸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러시아 및 서유럽 언어들에 조예가 깊어 여러 민족들의 자료을 섭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몽골사와 강리도
▲ 몽골사와 강리도 몽골사와 강리도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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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슨이 강리도를 유라시아 문명 교류 차원에서 다룬 책은 <몽골유라시아에서의 문화와 정복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2003)이다. 이 책은 먼저 몽골 시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얼마나 인종 간의 이동과 이주가 많았는지 일람표를 제시하고 있다. 

동방에 와서 살았던 서방사람들의 출신 내력을 보면, 이태리 사람, 프랑스 및 플레밍(오늘날 네델란드 및 벨기에), 그리스인, 독일인, 스칸디나비아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알란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이라크 및 시리아의 네스토리교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등이다.

그들의 생업도 각양각색이다. 주종을 이루는 부류는 전문가들이다. 장인, 요리사, 상인, 건축가, 마술사, 악사, 베짜는 사람, 레몬네이드 잘 만드는 사람, 대장장이, 의사, 과학자, 레슬링 선수, 카펫 명인, 전사, 표범 조련사, 성직자, 번역가, 필경사, 역사가, 행정실무자 등등. 한마디로 몽골 제국은 전문가가 우대받는 세상이었다.

몽골대제국의 4개 대칸이었던 뭉케가 1259년 서안에서 급서하자 당시 뭉케의 지시로 서역 정벌에 나섰던 훌레구(뭉케의 동생)는 그곳에 일칸국(오늘날의 이란 지역)을 세운다. 한편 중원지역은 역시 뭉케의 동생이자 훌레구의 형인 쿠빌라이가 정복하여 원나라를 세워 통치하게 되었다.

대칸격이었던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와 그의 동생 훌레구가 세운 일칸국은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을 이어갔다. 바로 그러한 역사 속에서 동과 서의 문물과 사람이 섞이고 초광역의 지리 정보가 확산되고 교환되었다. 그러한 팍스 몽골리카(몽골 평화)의 역사가 총결산된 시각적 문헌이 강리도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슨은 앞에 언급한 책에서 강리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나라 시절에 특출한 지도제작자는 주사본(朱思本1273-?이었다.  그는 여행가였고 지리학자였으며 시인이었고 도교의 수도자였다. 1320년경 그는 <여도輿圖>라는 지도집을 펴냈다. 전체 지도는 중국, 몽골리아, 중앙아시아를 담았다. 그의 지도는 중국의 격자(모눈) 체제를 활용하여 주요 도시, 강과 지형을 정확히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각 성별로 별도의 지도도 따로 만들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택민이 <성교광피도>라는 지도를 편찬했는데 그 지도에 극서(Far West) 지역에 대한 많은 정보가 수록되었다. 

그 지도들은 모두 사라지고 전해오진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중요한 내용이 후대의 지도들에 보존되었다. 그 최초의 사례가 조선에서 1402년에 나온 강리도다.  이 지도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대목은 서방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아프리카가 (역)삼각형 모양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과 지중해의 윤곽을 금방 알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아프리카에 30개 이상, 서유럽에는 100개 이상의 지명이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독일은 A-lu-man-ni-a(阿魯尼阿)로 적혀 있다.  

1402년 강리도는 기념비적인 성취이다. 조선은 지도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지구적(global) 차원의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다욱 의미심장한 점은 근대 세계체제의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지리 정보의 유포와 통합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세에 이루어진 지리지식의 집적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빚어낸 동력이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이 그러한 지식의 촉진, 개발 및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몽골 제국을 통한 동서의 접촉과 교환은 동방에서 놀랄 정도로 자세한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그 사이의 땅과 바다에 대한 지리지식을 낳았다. 서양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탐험 항해 이전에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뒤떨어졌고 그곳을 그린 지도도 허술하였다." (위의 책 109쪽)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강리도, #몽골사, #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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