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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어떤 유적들을 만날 때면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의 역사를 들춰보게 된다. 나와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 어떤 교감도 없지만 지금의 나 혹은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관련기사 : 기나긴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연천

오월 초순 연천 여행을 다녀와서 지난 기사에 소개했던 고구려 시대 성인 '당포성'이나 한반도의 지질학적 역사를 보여주던 '임진강 주상절리'도 그러했고 이번 기사에서 소개할 고려 왕조의 종묘격인 '숭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종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어떤 방문자들은 한줌의 기억 거리도 가져가지 못하겠지만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 역사를 조금 안다면 숭의전은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초라하지만 의미 있는 유적지 '숭의전지'

당포성에서 임진강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절벽 위에 비운의 왕국 고려의 종묘격인 숭의전(연천군 미산면)이 자리하고 있다.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임금이 물을 마신 곳임을 의미하는 어수정은 사실 한반도 여러 곳에 있다. 동두천 어수정은 조선 태조가, 여주는 단종이, 그리고 이곳 연천은 고려 왕건이 물을 마신 곳이다. 한반도에 어수정이 몇 개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 고려 왕조의 종묘 "숭의전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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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정에서 걸어서 백여 미터만 올라가면 돌담으로 구분된 3개 구역에 잘 보존된 한옥 다섯 동이 나타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의 종묘라고 하기엔 너무 보잘 것 없는 규모와 시설이다. 왼쪽부터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패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동안 머무는 앙암재(仰巖齋, 재실)가 있고, 담장 너무 바로 옆에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들이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전사청은 원래 조선시대 나라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전사관(典祀官)이 배치되어 제사에 소홀함이 없도록 관리를 하는 관청이다. 조선 정부가 패망한 고려의 종묘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과 세 왕의 위폐가 모셔진 숭의전(崇義殿), 숭의전의 위폐를 잠시 모셔 두었다는 이안청(移安廳), ㄱ자로 건물 배열이 바뀌는 자리에 고려 공신 16인의 위폐가 모셔진 배신청(陪臣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태조(이성계)가 1397년(태조 6년)에 고려 태조(왕건)의 사당을 이곳에 지었고 이후 고려의 네 임금을 모시는 사당 즉 고려의 종묘가 되었다는 단편적인 상식을 가진 채 접한 숭의전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숭의전지는 왼쪽부터 앙암재, 전사청, 숭의전, 이안청, 배신청 순으로 5개의 한옥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 숭의전지 건물 배치 안내판 숭의전지는 왼쪽부터 앙암재, 전사청, 숭의전, 이안청, 배신청 순으로 5개의 한옥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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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한 고려의 일부 왕족과 대신들이 왕건의 신위를 돌로 만든 배에 실어 개성 인근 예성강으로 나갔다고 한다.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날이 저물어 배를 묶어 놓고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배를 묶은 쇠줄은 다 썩어 없어지고 배도 사라져 버렸다. 강을 이 잡듯이 뒤지다 결국 지금의 숭의전 자리인 임진강 잠두봉 아래에서 배를 찾게 되고 그리하여 이곳에 신위를 모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 아무래도 자신의 왕조를 멸망시킨 이씨가 만들어준 숭의전에 대해 못마땅했던 일부 왕씨들이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재실 '앙암재'라는 명칭에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태조 왕건의 명복을 빌던 원찰(願刹)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기에 조선 태조가 이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정종 1년에 왕건을 포함하여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경왕)·충렬왕·공민왕까지 여덟 왕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세종과 문종 때 중건을 했다. 숭의전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고려 공신 16인의 위패를 함께 모신 것도, 충청도에서 왕씨 성을 가진 후손 왕순례를 찾아 부사라는 벼슬을 주어 이곳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게 한 것도 문종이었다고 한다.

조심스레 숭의전의 돌계단을 올라 안을 보니 태조(왕건)의 영정과 위패는 정면에, 다른 세분의 위패는 좌우에 모셔져 있다. 세종 7년 당시 아직은 건국 초기여서 조선의 종묘엔 네 분의 왕(아마 태조의 부친과 태조, 정종, 태종)만 모셔져 있는데 고려 종묘에 여덟 왕을 모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란이 일어 이때부터 태조와 현종, 문종, 원종으로 축소했다고 한다.

좌우간 패망한 고려 왕조의 종묘가 이곳에 만들어지고 지켜지게 된 사연이 단순하지는 않아 보인다. 배신청에는 정몽주, 강감찬 등 개국 공신이거나 아니면 홍건적 등 전란의 위기에서 고려를 지킨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개국 공신뿐만 아니라 고려 말기 인물까지 고루 분포시킨 걸로 봐서, 조선 조정이 숭의전의 고려 종묘 기능은 제한했지만 공신을 기리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봉사하시는 여성분이 정전 앞 가운데 돌계단은 사용하지 않는 계단이며 마당에서 숭의전으로 오를 때는 우측으로, 참배를 하고 내려올 때는 좌측 계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설명을 해주신다. 발을 옮길 때도 왼발과 오른 발을 번갈아 움직이지 않고 오른 발이 디딘 단을 왼발이 따라 디디는 식이어야 한단다. 세 개의 문으로 구성된 삼문도 가운데는 혼이 드나드는 문일 뿐 산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며, 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에 따라 밖에서 보아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삼문으로 나와 임진강 쪽으로 나서면 벼랑 위에 향토문화제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오백년이 넘는 범상치 않은 나무들이다. 문종이 숭의전을 중건하던 1452년에 왕씨의 후손이 심었다고 하는데 전사청의 부사로 임명된 왕순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안내판에는 느티나무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나면 그 해에는 눈이나 비가 많이 왔었고, 까치나 까마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나 초상이 났다는 얘기가 보인다. 흔한 얘기지만 그렇게 느티나무는 숭의전을 지키는 신물로 신성화 되었을 것이다.    
 
삼문을 지나 사당 바깥 그러니까 임진강 쪽으로 나서면 벼랑 위에 향토문화제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 고려 왕조를 지키는 550살의 느티나무 삼문을 지나 사당 바깥 그러니까 임진강 쪽으로 나서면 벼랑 위에 향토문화제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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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지'의 우여곡절

앙암재를 제외하곤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지 않기에 찾아보니 원래 건물들은 한국 전쟁 때 유실되었고, 1970년대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된 후 1973년 왕씨 후손들이 정전을 복구 했으며, 나라 돈을 지원받아 1975년에는 배신청을, 1976년에는 이안청을 그리고 이듬해 2월 삼문(三門)을 신축했다. 좌우로 나란한 건물의 배치가 조선의 사당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우여서 70년대 복원 과정의 엄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도 눈에 띄었다.

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건의 사당을 지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여러 역성혁명의 역사에서 발견되듯이 새로운 권력이 빠르게 나라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조선 태조는 조선의 종묘에 공민왕을 모심으로써 새로운 권력이라기보다 고려 권력의 승계로 포장하려 했다.

태조는 고려말 임금인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던 신돈의 자식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이 섬긴 마지막 임금은 공민왕이었다고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을 이씨 조선의 종묘에 모시고 실제로 창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세운 공양왕(고려 20대 왕 신종의 7대손)으로부터 선위를 받는 식으로 임금에 오르기도 했다, 왕건의 사당을 연천에 지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나라 조선의 과거시험을 거부하고 송악의 서쪽 광덕산에 칩거하던 고려 충절 72현이 결국 모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만했던 사건은 당시 구 왕조세력의 수난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이다
▲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의 두문동 화재 사건 장면 새로운 나라 조선의 과거시험을 거부하고 송악의 서쪽 광덕산에 칩거하던 고려 충절 72현이 결국 모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만했던 사건은 당시 구 왕조세력의 수난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이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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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역사적 상상력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람 됨됨이다. 새로운 왕조는 구 왕조의 흔적을 지우고 구세력의 씨를 말리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씨 중에는 옥(玉)씨나 주(主)씨로 성을 바꾼 이들도 있었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도 결국 고려 유민의 비극적 사건이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부조현이라는 고개에 조복을 걸어두고 광덕산에 들어가 '두문(杜門)'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살면서 '새 왕조에 출사를 하지 않고'(不出) 있던 고려 충절 72분이 있었는데 마을에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른바 두문동 화재 사건이다. 

비록 영조 때에 처음 비석을 세워 72현을 기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두문동의 비극은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영조 재위 시절에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 수많은 피 부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태조가 비록 백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일으켰지만 평생 섬겼던 왕씨 왕가나 죽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추려 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두문동 사건으로 불필요한 참극까지 벌어졌으니 역사가 태조 임금을 아무리 냉혈한으로 몰더라도 실제로 인간인 그에게도 괴로움과 고뇌가 일지 않았을까 싶다. 숭의전은 권력을 안정화시키려는 현실 정치의 결과물이자 태조 이성계의 인간적 참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여행을 제안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짧은 여행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고자 시작한 글이 결국 가볍다고만 할 수 없는 역사 이야기로 가득 차 버렸다. 여행의 가치를 휴식 혹은 재충전으로만 한정한다면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멀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보고 대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되고 더불어 쉽게 가지기 힘든 여행의 여운을 더욱 길게 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힘들어진 시대에 국내 여행에 대한 수요는 엄청 증가할 것이다. 코로나 시기라고 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의 모든 여행 수요를 억누를 수만은 없기 때문에 관계기관도 조심스러운 여행을 당부하는 실정이다.

필자는 국내 여행을 좀 더 여운이 남는 여행으로 만듦으로써 코로나 시기를 우리가 밟고 사는 땅, 우리 문화,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로 삼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태그:#연천, #숭의전, #태조 이성계, #고려 충철 72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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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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