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이꽃이 피면서 아기 오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오이꽃이 피면서 아기 오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 김정희

관련사진보기

 
내 여름은 텃밭에서 난다. 여름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움직이고 자라고 성장하며 소멸의 극명함까지 경험하고 깨닫는 계절이다.

밭에 심어 놓은 몇 가지 작물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는 여름. 풀도 지지 않고 맹렬하게 솟아나 빈 땅을 뒤덮는다. 몽땅 저당 잡힐 여름이 땀으로 범벅될 것이다. 여름 휴가보다 우선 순위가 농작물을 돌보는 일이다. 농사는 잠시 잠깐 틈을 주지 않고 여름을 보채기 때문이다.

심고 뿌리고 이미 거두고 있는 것들, 즉 열무나 얼갈이배추 등은 이미 이른 봄부터 시작된 농사이다. 가을에 거둘 몇 가지 작물을 빼놓고 모두 여름을 통과해야만 수확이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에 여름은 꼼짝없이 이 작물들과 함께해야 할 판이다.

농사는, 특히 밭농사는 여름 농사다. 심어 놓은 모든 작물의 뒤치다꺼리가 여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봄에 파종해서 먹는 상추나 아욱, 쑥갓 같은 것들은 긴 겨울을 보낸 지루함을 터는 연습에 불과하다.

종묘사를 바쁘게 오가며 씨앗을 선택하고, 밭을 고르고, 거름을 뿌리고 작물을 심어놓으면 그제야 밭 꼴이 나는 것에 만족하는 봄을 보낸다. 봄은 짧지만 농사 짓는 사람에게는 더디 간다. 농작물이 제대로 갖추고 성장을 시작하는 때는 봄이 훌쩍 가는 무렵이나 되어야 하니까 잔풀이나 매면서 기다린다. 본격적인 일은 여름에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성장의 정점을 이루는 초여름 밭
  
오이, 토마토, 풀이 함께 자라는 텃밭
 오이, 토마토, 풀이 함께 자라는 텃밭
ⓒ 김정희

관련사진보기

 
초여름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밭은 모든 성장의 정점을 이룬다.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제 모습을 멋내며 어우러진다. 풀은 풀대로 제 몫을 하는 여름이다. 죽어라 뽑아도 기꺼이 터를 잡아 두 번 세 번 다시 고개 드는 풀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풀은 풀대로 농작물은 그것들 대로 최선을 다하는 여름이다. 이런 최선을 다하여 사는 식물들에 사람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애타는 그들의 처지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주말에 토마토와 가지 순을 따고 묶어 주었다. 지난 금요일 요란하게 내렸던 비와 우박으로 고개가 꺾인 것도 있으나 대체로 굵은 줄기가 신뢰감을 준다. 실한 줄기에서 실한 열매가 나온다.

얼마 안 되는 밭작물도 틈틈이 여름날의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그나마 먹을 것이 나온다. 농작물이야말로 적당한 시기가 있어서 잠시 때를 놓치면 늦되거나 볼품없고, 쭉정이 채 버려야 하는 일도 생긴다.

길을 걷다가 신호를 기다리며 혹은 집에서 훅 쏟는 땀보다, 밭에서 흘리는 땀이 개운하다. 열기가 온 얼굴과 몸에 올라오면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땀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옷이 푹 젖는다. 그렇게 두세 번 땀을 쏟고 나면 흘린 땀으로 시원해지는 몸을 느낄 수 있다. 땀이 땀을 식혀주는 것이다. 마치 몸에 깃든 나쁜 것들이 모두 빠져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스치는 바람 한 줄기는 고맙고 귀해서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지게 다가온다. 기분 좋은 일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이란 사실 적은 것, 작은 것을 알아차릴 때 오는 것임을 알면서도 잊고 사는 게 삶인가 보다.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움직이는 만큼 내 몸과 밀착할 수 있고 밀착하는 만큼 나를 잘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기꺼이 땀을 들이는 여름이 될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대구의 어느 한의원엘 데리고 다녔는데 한의사가 그랬다. 땀을 충분히 배출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땀 배출할 일이 많지 않은 요즘, 어쩌면 땀 흘리지 않아 몸이 탈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놀 일이 없으니 땀 흘릴 일도 없다.

어릴 적 엄마의 여름이 기억난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마루에 앉자마자 엄마가 하는 일은 땀에 젖은 셔츠를 벗는 일이었다. 마당의 우물에서 퍼 올린 두레박의 물은 엄마의 등에 사정없이 쏟아졌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는 일이 편치 않았다. 훌훌 벗고 목욕이라도 하면 되련만 엄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두 발 뻗고 편히 쉬는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엄마의 일은 언제나 많았다. 동생들과 손을 보태 돕는다고 도와도 오히려 일을 더 저질러 놓기 일쑤여서 안 하는 것만 못했다. 이제 와 새삼 생각해 보니 엄마의 땀 흘려 젖은 여름이 우리를 키웠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안타까웠을지라도 엄마의 여름은 보람 있었을지 모른다. 손발 움직여 새끼들 입에 먹을 것 들이는 일을 즐겁게 했을지도.

엄마의 여름은 건강한 생산의 여름이었고, 아름다운 땀으로 얼룩진 여름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모든 일이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나, 다 나쁘지도 않으니, 어쩌면 엄마의 땀 흘린 그 여름날들이 엄마 인생의 최고 시절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텃밭 농사 조금 하면서 엄살 부리고 있으나, 그 몇 가지 안 되는 농작물은 내 여름을 집어삼킬 듯 손을 뻗는다. 몸을 움직여야 먹을 것을 내놓는다고. 그래야 먹을 수 있다고. 유월이다. 여름이 성큼 발을 내디딘다.
  
솎아주기를 기다리는 당근밭. 솎아주어야 큰 당근을 먹을 수 있다.
 솎아주기를 기다리는 당근밭. 솎아주어야 큰 당근을 먹을 수 있다.
ⓒ 김정희

관련사진보기

 
오이꽃이 피고, 땅콩꽃도 핀다. 당근밭의 당근들이 주황색 터를 넓히며 솎아주길 기다린다. 감자는 푹푹 찌는 여름을 달큼하고 고소한 보상으로 달래줄 것이며, 입안에서 시원하게 터지는 붉은 토마토는 여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릴 것이다. 여름을 산다. 생산의 여름이다. 기꺼이 땀을 들이는 여름이 될 것이다.
  
땅콩꽃이 피었다.
 땅콩꽃이 피었다.
ⓒ 김정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여름맞이, #텃밭, #땀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