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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본성이 9킬로미터 옹성이 2.71킬로미터 총 11.76킬로미터에 달하는 무시 못할 길이를 자랑한다. 길이와 그 넓이만큼이나 남한산성은 다양한 코스를 갖추고 있다. 단순히 성벽을 따라간다고 해서 산성의 모든 것을 보는 게 아니다. 산성의 계곡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유적지가 산재해 있기에 남한산성을 몇 번씩 와봐야 대강이라도 그 아름다움과 실체에 조금씩 다가갈 수가 있다. 

남한산성은 서쪽에 청량산을 주봉으로 두고 동쪽의 남한산까지 허리를 감싸듯이 성벽을 두르고 있다. 흔히 성남에서 남문 방면으로 많이들 올라오지만 광주에서 동문을 거쳐 올라가는 방법도 있고, 차를 하남의 고골계곡에 세워두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코스도 있다. 즉 다시 말해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3개의 시가 갈라지는 것이다.

남한산성이 인기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산행을 하는 느낌을 주면서 코스에 따라 어린아이와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이유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로터리에서 시작해 북문을 거쳐 서문을 돌아 수어장대에 이른 후 남문 방면으로 내려오는 1코스는 남한산성의 주요 사적지는 거의 거치면서 코스도 무난하기에 가장 인기가 많은 국민 코스라 할 만하다.
 
남한산성의 랜드마크인 수어장대는 장수의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같이 지어졌던 5개의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 남한산성의 랜드마크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랜드마크인 수어장대는 장수의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같이 지어졌던 5개의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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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이 몰려있고 길의 편리함으로 인해 서쪽 코스가 상대적으로 인기가 높지만 남한산성의 동쪽 코스는 사람이 드물지만 옛길의 호젓함이 살아있고 무너진 성벽도 있어서 예전 그대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1코스부터 5코스까지 남한산성의 공식적인 코스로 지정되어 있지만 길이 사방으로 나있기에 어디서 출발하든, 또 어디로 내려오든 상관없다. 나는 남한산성의 행궁을 막 관람했기에 행궁의 뒤편인 서문 방면으로 곧장 올라간다. 올라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경주의 왕릉 숲 속에서나 볼 만한 거대한 소나무 숲이 나의 시야를 가린다.  

조선시대 이래로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왕이 행차하던 행궁이 있기에 일반 백성들이 감히 들어가서 화전이나 벌목을 행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된다. 소나무가 너무 울창해서 한낮에도 햇빛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성이기에 오르막길을 힘차게 올라가야만 한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덧 지평선이 펼쳐지며 웅장한 성벽과 함께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탑처럼 생긴 제2 롯데월드 타워와 황금빛 한강변이 우리를 손짓하고 있었다.

낚시는 물고기를 잡는 손맛 때문에 계속 빠져든다고 많은 애호가들이 얘기하곤 한다. 산을 오르는 참맛은 한눈에 모든 것이 펼쳐지는 전망과 산에서 내려오는 맞바람이 아닐까 한다. 예로부터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런 전망을 얻기 위해 수많은 세력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쳤을 것이다. 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급히 들어가야 했는지, 청나라 군대가 산성을 포위하고 50여 일간 점령하지 못했는가 현장에 와보면 몸으로 와닿는다.
 
서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조망 장소로 유명하다. 이 지점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롯데타워와 한강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 일컫는 서문에서 동문으로 가는길 서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조망 장소로 유명하다. 이 지점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롯데타워와 한강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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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개를 한번 넘으면 남한산성의 아이콘이자 상징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수어장대에 닿는다. 수어장대로 가기 위해서 조그마한 문을 지나 낡은 사당 하나를 지나쳐야 한다. 청량당이라는 사당인데 이회라는 장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원래 이회는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근을 책임지는 장수였다. 하지만 공사금을 탕진하고 축성에 힘쓰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회는 자신이 죄가 없으면 죽을 때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과연 그 말대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한다.
 
청량당을 성벽을 쌓을 때 억울하게 죽은 이회장군을 위해 세운 사당으로 수어장대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 억울하게 죽은 이회장군을 위해 세운 사당인 청량당 청량당을 성벽을 쌓을 때 억울하게 죽은 이회장군을 위해 세운 사당으로 수어장대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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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인도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한강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맡은 구간의 성벽이 가장 튼튼했고, 모함임이 밝혀졌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이들의 억울함을 달래주고자 수어장대 옆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제 계단을 조금 오르면 남한산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인 수어장대가 나타난다. 수어장대는 군대의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서장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원래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어장대 하나만 남아있다.

수원 화성의 서장대랑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수어장대의 고풍스러움과 장대함이 한 수 위라고 본다. 남한산성의 모든 건축물 중 으뜸이고 오직 한 군데를 가자고 한다면 수어장대를 단연 첫 손에 꼽을 것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서문방향으로 돌아간다.

성벽은 산을 따라 굽이치듯 이어져 있고, 숲에서는 산새의 합창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수많은 여행지를 다녀봤지만 한국의 어디를 가든지 자연의 손길이 안 닿은 명소가 없었고, 건축물도 중요하지만 건물이나 유적을 감싸고 있는 숲과 나무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우리 주위에는 평소엔 잘 보이지 않지만 눈을 활짝 뜨고 세심히 관찰한다면 진주가 흙을 털고 우리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양식, 한식, 중식 각자의 매력이 다르듯이 우리 주위의 문화재도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한다.

성곽길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직 성벽만 보고 따라 걸으면 되기에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가장 편한 마음으로 속에 있는 감정들을 그냥 표현하면 된다. 내리막길을 걸은 지 10분쯤 되었을까? 우익문이라고 부르는 서문이 나타난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가 이문을 통해 삼전도로 향했다고 전해지는 문이다.
▲ 우익문이라 불렸던 서문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가 이문을 통해 삼전도로 향했다고 전해지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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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4대 문 중에 규모가 가장 작고, 주위의 경사가 급하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이 문을 통해 인조와 소현세자가 빠져나와 삼전도의 굴욕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빠지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가 서문을 나와 조금 올라간다면 남한산성의 최고 조망대인 서문 전망대가 나온다. 위례신도시를 비롯해 송파 일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이제 서문을 나와 북문 방면으로 길을 떠난다.

서문을 지나 성벽 대신 호젓한 숲길을 지나다 보면 국청사란 사찰을 지나게 된다. 남한산성에는 국청사뿐만 아니라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등 여러 개의 사찰이 지금도 남아있다. 남한산성의 승려들은 평시엔 성을 지키면서 사찰에 군기와 화약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전시에는 승군에 속해 군사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서 했었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사회에서 승려가 얼마나 천대받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다. 어느덧 이번 산성 트레킹의 종착점인 북문에 도달했다.
 
조선시대 세곡을 이 문을 통해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문앞에서 패했던 사실을 잊지말고자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전승문이라고도 불리는 북문 조선시대 세곡을 이 문을 통해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문앞에서 패했던 사실을 잊지말고자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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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문이라 불리는 북문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주위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한강에서 들어온 세곡이 이 문을 통하여 들어오기도 했고, 이름에 관한 특별한 사연이 있다. 역설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화인데 이시백이 병자호란 당시 북문에서 군사 300명을 이끌고 싸우려고 대기하던 중에 청나라의 기습을 받고 전멸했던 비극이 있던 장소다. 그래서 이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이기자는 뜻에서 전승문이라 이름을 지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는 벌써 산너머로 어둑해지고 있고, 하루 종일 바쁘게 다녔던 남한산성의 여행도 이쯤에서 막을 내려야만 한다. 미처 소개를 자세히 못했지만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그 시절의 성곽의 책임자였던 이서를 함께 모신 사당인 숭렬전과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신하들을 모신 현절사, 남문과 동문 그리고 남한산성 외곽을 감싸고 있는 외성 등 며칠을 돌아도 모자라지 않을 답사처가 수없이 남아 있다. 단풍이 활짝 만개할 날 다시 돌아오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일주일 후 작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ugzm87와 블로그 https://wonmin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연, 취재, 출판 등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ugzm@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탁피디의 여행수다 또는 캡틴플레닛과 세계여행 팟캐스트에서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general_list.aspx?SRS_CD=0000013244에서 연재됩니다.


태그:#경기도, #경기도 여행, #광주, #광주여행,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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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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