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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에세이집 < 수상록 >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에세이집 < 수상록 >
ⓒ 이소노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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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유력 대권 주자로 손꼽히던 2012년, 출마 선언을 앞두고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발표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열흘 만에 30만 부가 넘게 팔리면서 '안철수 현상'을 수치적으로 입증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을 1년 반 앞둔 2011년 6월, 자서전 <운명>을 발표했다.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는 마지막 문장은 그의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여의도의 '출판 정치'에 제법 익숙하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인의 출판은 철저히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된다. 특히 총선이나 대선을 앞두고 이뤄지는 출간기념회는 그들의 세를 과시하는 현장이다. 그러나 진영을 막론하고, 상당수의 저작은 자화자찬과 영웅담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지난 4월 에세이집 <수상록>을 발표했다. 그는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의 단적인 예다. 샐러리맨에서 '김대중 키드'가 되었다. 6선 국회의원과 당 대표,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 의전 서열 5위인 국무총리를 두루 지냈다.

그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에는 가결을 막기 위해 의장석을 점거했고, 12년 후 의장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 가결을 선언했다. 2020년에는 엄중한 표정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브리핑했다.

정치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책

정치인 정세균은 역사의 여러 순간에 존재했다. 그러나 그의 극적인 정치 인생에 비해 존재감은 옅은 편이다. 모두가 그를 알지만, 동시에 그를 알지 못한다.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인', '온건한 관료형 정치인', '미스터 스마일' 등이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그것은 정세균의 '롱런'을 만든 강점이기도 하지만, 대권 주자로서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는 요인이기도 하다(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5% 안팎에 머물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런 소프트한 외모나 성품 탓에 존재감에서는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러나 어떻게 하겠어요? 타고난 것이 그런데." - <수상록> p. 264 ~265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정세균은 개인적인 서사, 가족, 정치 여정, 오랜 정치 철학 등 여러 주제를 오간다. '제 2장' 전체를 할애하면서 코로나19와의 사투를 기록하기도 한다. 대구 유행 초기, 병실 확보를 위해 대구행을 결정하는 대목에서는, 지난해 팬데믹이 안겨주었던 공포감과 긴박감이 소환된다. 

2016년 4월 20대 총선 당시 오세훈 후보와 맞붙었을 때 17.3%p의 여론조사 격차를 뒤엎고 승리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 속이 뒤집어졌었다"며 카메라 뒤의 심경을 토로한다. 주제의 무게와 상관없이 그의 목소리는 구어체로 담겨 있다.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편집'을 추구한 편집자들의 고뇌가 빛을 발했다.

'대통령 빼고 다 한 사람'의 정치란

민트색의 배경, 포개진 셔츠, 검은 안경과 금색 시계가 새겨진 일러스트는 이 책의 '톤 앤 매너(tone & manner)'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템포는 간결한다. '여기서 끝이야?'라고 생각할 때쯤에 담화를 끝내고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이 책의 문을 여는 이야기는 '쇼맨십은 좋은 정치가 아니다'라는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에서 화려한 실적을 드러내는 일을 자제한다. 대신 부지런히 듣고 설득하는 직업 정치인의 모습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했다.

정부 여당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적폐 청산'이었다. 저자 역시 적폐 청산에 공감하지만,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고 망신을 주는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을 만들지 않는 특유의 화법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묻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 탄핵에 동참했던 새누리당 의원들을 두고 '그들이 반대했다면 할 수 없었을 것', '그들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고민했을 것'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자신이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했던 2005년, 한나라당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저출산 고령사회기본법 개정을 할 수 있었다며 야당에 공을 돌린다.

그는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성취'가 정치의 본령이라 믿는다. 그러나 틈틈이 정책적 선명성과 단호함 역시 드러낸다. 팬데믹 초기 '마스크 대란'이 불거졌을 때, 그는 국무회의에서 '마스크 2부제'를 제시한 보건복지부와 격론을 펼치고, '마스크 5부제'를 관철했다.

재벌기업(쌍용) 출신이지만, '낙수 경제'를 부정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장한다. 저자는 책임 정치의 실현에 대한 고민을 여러 차례 드러낸다. 최근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그는, 이 책에서도 '고통의 무게는 불평등하다'며 상대적인 보수성을 드러낸다.

유력 정치인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가 국무총리에 지명되기 전부터 천천히 기획되었다. 그러나 저자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상, 필연적으로 순수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수상록>의 기획자들마저 그의 지지자를 자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수상록>이 '정치인의 책'이라면 흔히 젖을 수 있는 타성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저작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한정된 분량 안에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정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지도 제공한다. 독자의 정치 이념과 지지 후보를 떠나, <수상록>이 에세이로서 지니는 의의는 충분하다.

수상록 - 정세균 에세이

정세균 (지은이), 이소노미아(2021)


태그:#정세균,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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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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