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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김좌진 신화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이는 그동안 역사학계 주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이 공식적인 학교교육에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1992년 한중수교가 체결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을 직접 답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 측에서 나온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2월과 3월 두 차례 방영된 KBS <파르티잔, 늑대의 시대>는 그런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봉오동 전투에서 어떻게 독립군들이 일본군 최정예군대와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지 그 숨겨진 비밀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당대 첨단을 달린 무기로 독립군들이 무장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총은 일본군 아리사카 소총보다 훨씬 화력이 우수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봉오동 독립군 무관학교를 통해서 8년에 걸쳐 잘 훈련된 독립군 병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당대 최첨단 무기 구입과 실전 같은 군사 훈련이 봉오동 전투 승리의 비결이었다. 그 모든 항일운동의 중심에 최운산 장군이 존재했다. 

교과서마다 다르게 서술된 봉오동 전투
 
<북간도 무장 독립군의 무기와 최운산>을 주제로 2019년 6월 14일에 개최된 최운산 장군 제4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 최운산 장군 학술세미나 포스터 <북간도 무장 독립군의 무기와 최운산>을 주제로 2019년 6월 14일에 개최된 최운산 장군 제4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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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영화 <봉오동 전투>나 교과서 <한국사>는 그런 역사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못했다. 여전히 '봉오동 전투=홍범도'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 인기 강사들조차 '봉오동 전투=홍범도' 신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교과서 서술이 어느 정도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검정 교과서로 8종류가 나와 있다. 봉오동 전투 승리 주역이자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 부대인 최진동 장군의 군무 도독부를 기술하고 있는 출판사는 비상, 해냄 에듀, 미래 앤, 동아, 지학사, 씨마스 여섯 곳이다. 나머지 천재교육, 금성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 교과서엔 봉오동 전투 승리의 핵심 부대인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를 살펴보자.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천재교육 189쪽(출처 : 하성환) 두 인물 사진을 중심으로 영웅사관에 기초해 교과서가 편집돼 있다.
▲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한 <한국사>교과서(천재교육 출판사)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천재교육 189쪽(출처 : 하성환) 두 인물 사진을 중심으로 영웅사관에 기초해 교과서가 편집돼 있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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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에 (중략) 1910년대 이래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맞물리면서 무장 투쟁의 전개로 이어졌다. 1919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만주 일대에서는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광복군 사령부 등 약 50개의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독립군 부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일본 군대와 경찰,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는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이에 일본군은 1920년 6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훈춘 부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무찔렀다." - <한국사> (천재교육 2021, 189쪽)

실제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이다. 그것은 대한 북로 독군부의 사령관이 최진동 장군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 독립군이 동만주 왕청현 봉오동에 들어온 것은 5월 중순경으로 봉오동 전투의 중심 부대가 될 수 없었다.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를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회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6개 부대를 통합한 연합부대인 대한 북로 독군부가 결성된 것은 5월 19일이었다. 그로부터 18일이 지난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다.

봉오동 전투 승리 부대인 대한 북로 독군부의 무기와 군수물자는 모두 최진동 장군의 큰동생 최운산 장군이 제공한 것이다. 이는 러시아 연해주 체코 병단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최운산 장군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최운산 장군은 북간도 제1의 거부이자 대지주로 그가 없었다면 수천 명 독립군들을 첨단 무기로 무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대한 북로 독군부 수천 명 군인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그렇다면 다른 <한국사> 교과서 서술 형태를 살펴보자.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의 실체인 대한 북로 독군부를 기술하는 <한국사> 교과서는 씨마스 출판사가 유일하다.
 
8종 교과서 중 <봉오동 전투>의 승리 주체인 <대한 북로 독군부>를 기술한 교과서는 씨마스 출판사 <한국사>가 유일하다.
▲ <대한 북로 독군부>를 유일하게 기술한 <한국사> 교과서 195쪽 (씨마스 출판사) 8종 교과서 중 <봉오동 전투>의 승리 주체인 <대한 북로 독군부>를 기술한 교과서는 씨마스 출판사 <한국사>가 유일하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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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봉오동 전투에 대해 최소한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 부대인 최진동에 대한 내용 설명이나 최운산 장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는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군무 도독부 등 50여 개 무장 독립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무장 독립 단체들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일부가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대한 독립군과 군무 도독부의 연합부대)를 결성하였다. 일제는 무장 독립 단체의 국내 진입을 막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추격대를 파견하였다. 대한 북로 독군부는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하였다(봉오동 전투, 1920)" - <한국사> (씨마스 2021, 195쪽)

다가오는 2022년에는 해방 후 11번째 교육과정 개정이 예정돼 있다. 봉오동 전투=홍범도 신화를 벗겨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학문적 게으름이 아니라면 주류 역사학계의 뼈아픈 성찰과 실천을 촉구한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매체 <한겨레 온>에 게재한 내용을 1/2로 축약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했음을 밝힙니다.


태그:#봉오동 전투, #홍범도, #최운산, #군무도독부, #대한 북로 독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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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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