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스포츠가 일부 악성팬들이 저지르는 '혐오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현재 플레이오프가 한창 진행 중인 NBA(미국 프로농구)에서는 몰상식한 악성팬들이 선수들에게 이물질을 투척하거나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례가 속출하며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27일 워싱턴 위저즈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2차전에서는 워싱턴 가드 러셀 웨스트브룩이 4쿼터 초반 발목 부상으로 교체되어 라커룸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웨스트브룩을 향하여 팝콘을 무더기로 투척했다. 흥분한 웨스트브룩은 팝콘을 던진 인물을 향하여 달려들려고 했으나 주변 관계자들이 겨우 말렸다. 필라델피아팬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곧바로 경기장에서 퇴장을 당했다.

애틀랜타 호크스와 뉴욕 닉스의 경기에서는 애틀란타 트레이 영이 뉴욕 홈팬이 뱉은 침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유타 재즈와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경기에서는 일부 유타 홈팬들이 경기장을 찾은 멤피스 자 모란트의 부모를 향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NBA 경기장은 선수들과 관중석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선수들은 바로 코앞에서 팬들의 응원이나 야유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이 이를 악용하여 선수에게 지나친 트래쉬토크나 인신공격적인 언행으로 도발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지난 시즌 코로나19로 인하여 직관의 열기를 누리지 못했던 NBA는 올 시즌 모처럼 플레이오프의 흥행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악성팬들의 빗나간 팬심이 리그 이미지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NBA 레전드로 꼽히는 르브론 제임스(LA 레이커스)에 악성 팬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우리의 선수들을 보호해달라(ProtectOurPlayers)'는 해시태그를 덧붙이고 변화를 호소했다.

NBA 사무국과 구단은 최근 잇달아 벌어지고 있는 증오 테러에 대하여 단호한 대처를 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난 홈 경기를 주최한 필라델피아와 뉴욕, 유타 구단은 즉각 성명을 내고 물의를 일으킨 팬들의 시즌권을 취소하고 구단 홈경기에 무기한 출입금지 처분을 내렸다. 구단주들까지 직접 나서서 개인 SNS에 사과문을 올리고 재발방지를 약속하기도 했다. NBA 사무국은 '팬 행동 강령'을 제정하여 코로나19 방역지침에 위반되는 부적절한 신체접촉이나 이물질 투척, 코트 출입시 즉시 경기장 밖으로 퇴출시킬수 있는 조치를 단행하기로 했다.

유럽축구에서 악성팬들의 혐오 테러는 주로 인종차별 문제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흑인과 아시아인들같은 유색인종 출신들이 악성팬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다. 한국축구의 간판으로 꼽히는 손흥민(토트넘) 역시 여러 차례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된바 있다. 손흥민은 지난 4월 12일에 열린 맨유-토트넘전에서 전반 맨유 스콧 맥토미니의 팔에 얼굴을 맞아 쓰러지며 맨유의 득점이 취소된 장면이 논란이 되어 한동안 맨유 팬들의 극심한 악플과 인종차별 메시지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 이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이 더욱 커지며 EPL 구단들이 인종차별과 악플을 방치하는 소셜미디어 업체들에 항의하는 SNS 일시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손흥민에게 악플을 작성한 영국 누리꾼 일부는 인종 차별적 학대 혐의로 현지 경찰에 체포됐으며, 맨유 구단은 손흥민에게 욕설을 저지르며 클럽 규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 팬들에게 출입 금지 징계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유럽에서는 리그별로 인종차별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는가 하면, 유명 선수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공개적으로 피해사례를 고백하며 인종차별 금지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종차별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다.

손흥민에 대한 인종차별로 도마에 오른 맨유에서는 이번엔 흑인 선수 마커스 래쉬포드가 지난 27일 유로파리그 결승(비야레알-맨유)에서 승부차기로 석패한 이후 SNS에 악성팬들의 인종차별 메시지를 대량으로 받은 사실을 고백하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아일랜드 국가대표 공격수 출신 클린턴 모리슨은 "축구계가 슈퍼리그같은 돈과 이해관계에 직결된 문제에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인종차별에는 그렇지 못하다"며 쓴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 스포츠계는 과연 이러한 혐오 테러에서 자유로울까.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가장 최근에는 키움 히어로즈의 외국인 투수 제이크 브리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브리검은 지난 28일 자신의 SNS에 일부 팬들이 보내 온 다이렉트 메시지(DB)를 공개했다. 여기서 일부 팬들은 브리검에게 영문으로 '팀의 수치' '쓰레기' '은퇴해라' '대만 리그로나 돌아가라'며 막말을 쏟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브리검은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동안 키움에서 뛰었고, 지난 시즌이 끝난 뒤 재계약에 실패한 뒤 대만 프로야구에 활약하다가 최근 다시 대체 선수로 키움에 다시 합류했다. 브리검은 KBO리그 복귀 후 3경기에서 2승 1패 평균자책점 2.55로 호투 했으나 27일 KIA 타이거즈전에선 5이닝 5실점으로 다소 부진했다. 브리검은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었나보다"며 자조섞인 한탄을 적었다. 한편으로 악플을 신경 쓰지 말라는 일부 팬들의 응원 메시지에는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브리검이 활약했던 대만 등 해외 언론에서도 보도됐다.

한국 스포츠는 과거에 비하여 현장에서 선수들과 팬들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사건사고는 거의 사라졌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온라인에서 선수를 비방하는 '악플'이 더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팬심을 빙자한 악플러들이 인터넷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선수들을 공격하는 관행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부터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악플문화를 근절하기 위하여 '스포츠뉴스 댓글 서비스'를 없애는 조치를 단행했지만, 이제 악플러들은 SNS의 다이렉트메시지 기능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선수들을 괴롭히고 있다.

국내에서 악성팬들의 혐오 테러는 특정 대상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온라인을 통하여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으로 증오를 드러내는 '마녀사냥' 양상으로 굳어졌다는 게 구조적인 숙제다. 악플의 타깃은 국내 선수와 외국인이든, 선수와 감독이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프로야구 SSG 랜더스 최주환은 최근 모욕적인 메시지를 보낸 네티즌을 상대로 법적 대응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남자프로농구 귀화선수 라건아와 여자프로농구 MVP 박지수도 다이렉트 메시지로 인신공격적인 악플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여 안타까움을 준 바 있다. 'K-악플러'들의 활약상은 최근 외신에서도 연이어 보도될 만큼 그 악명이 높다.

그나마 이러한 혐오 범죄에 대하여 리그와 구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해외에 비하여 국내 스포츠계에서는 아직 뚜렷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실정이다. 선수가 개인적으로 법적대응을 하지 않으면 SNS를 차단하고 여론에 호소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개인 SNS를 통한 메시지는 선수들의 사적인 영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구단이 일일이 개입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다. 인종차별이나 가족비하 등 선을 넘은 악플-루머에 대해서는 경기장 영구 출입정지나 법적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인 선수들도 그저 참고 넘어가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공론화를 통하여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인이 즐기는 스포츠가 혐오의 배설구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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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검 혐오 악플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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