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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 437-13번지에는 엉규이 무덤으로 전하는 장소가 있다. 말이 무덤이지 도로 바로 옆에 있음에도 별다른 안내문이나 이정표가 없는 데다 풀로 덮여 있어 알고 찾지 않는 이상 이곳이 무덤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해당 무덤은 지역에서 엉규이 무덤 혹은 목 없는 장군 묘로 전해지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균의 묘로 주목받는 곳이다.
 
傳 원균의 묘로 전해지는 곳이다.
▲ 통영 엉규이 무덤 傳 원균의 묘로 전해지는 곳이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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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분명 원균의 무덤은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 82번지에 조성되어 있고, 심지어 경기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통영에 원균의 묘가 있다니?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정유재란의 비극, 한번 싸움에 조선 수군이 괴멸했던 칠천량 해전

이유는 바로 칠천량 해전의 패전에서 비롯된다.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성웅이라 칭송받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 속에 왜군의 수륙병진을 저지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냈다. 또한 여러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면서 서・남해안의 바다를 장악했다. 결국 왜군은 후퇴해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농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괜히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했다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1597년(선조 30)에 명과 왜의 강회 회담이 결렬되면서 다시 재침했던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 중에 조선 수군은 황당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그게 바로 칠천량 해전이다. 칠천량은 지금의 거제시인 칠천도 인근으로, 칠천량 해전과 그 여파로 당시 최강의 전력이라 평가받던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칠천량 해전지의 모습
▲ 칠천량 해전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칠천량 해전지의 모습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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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극의 첫 시작은 바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파직에서 시작된다. 승전을 거듭했던 이순신에 대한 견제와 시기가 있었기에 이중첩자인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가 선조와 원균, 그리고 조정에 좋은 떡밥을 던져준 셈이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加藤淸正)가 부산포로 건너온다는 첩보에 부산포로 출전하는 문제를 두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라며 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한번 싸움에 이순신 장군이 공들여 키운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다.
▲ 칠천량 해전의 모형도 이 한번 싸움에 이순신 장군이 공들여 키운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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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원균은 "이순신이 머뭇거리고 있다"거나 "순신이 명령을 받고도 출병하지 않는다"라고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 이순신 장군의 파직에 간접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파직한 뒤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웃긴 건 정작 원균 자신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 부산포로의 출전을 미뤘다는 점이다.

이때 원균은 수군 단독이 아닌 육군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며 수륙병진을 주장했고, 출전을 미루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원균은 부산포로 출전했다가 결국 칠천량 해전이라는 비극적인 참패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칠천량 해전의 현장에는 현재 칠천량 해전공원과 전시관이 들어서 있는데,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418-2번지다. 이곳에는 전시관과 함께 칠천량 해전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우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분명 기억하기 싫고, 마주하기 싫은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칠천량 해전의 원인과 경과, 결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의 교훈으로 되새겨야 할 장소로 주목해야 한다.

원균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엉규이 무덤이 통영에 있는 이유

칠천량 해전지와 함께 주목해야 할 장소 중 통영에 있는 원균의 무덤으로 전하는 엉규이 무덤이 있다. 해당 무덤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 이후 상황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선전관인 김식(金軾)이 올린 장계를 보면 칠천량 해전 이후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 혹은 춘원포)로 후퇴했음을 알 수 있다.

추원포는 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황리와 안정리 일대로 추정되는데, 지형을 보면 철저하게 고립된 곳이다. 이런 곳으로 후퇴했으니, 왜군이 본격적으로 봉쇄하게 되면 빠져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이후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을 쳤는데, 이 과정에서 원균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 김식이 올린 장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 <선조실록> 권90, 1597년(선조 30) 7월 22일 중
 
때문에 <선조실록>에 기록된 원균의 최후 모습과 엉규이 무덤의 위치를 고려할 때 해당 무덤이 원균의 묘로 비정되는 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지역에서는 '엉규이=원균'의 지역 발음으로 보기도 하며, 이를 보여주듯 평택에 있는 원균 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57호)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하지만 원균의 실제 무덤일 수도 있는 엉규이 무덤은 외면 속에 방치된 것이 현실이다.
 
최근 국도 77호선 확장공사 구간에 편입되어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나, 지역의 관심 속에 확장 구간에서 제외되며 보존의 길이 열렸다.
▲ 통영 엉규이 무덤 최근 국도 77호선 확장공사 구간에 편입되어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나, 지역의 관심 속에 확장 구간에서 제외되며 보존의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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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없는 가묘로, 인근에 원균의 사당이 있다.
▲ 평택 원균 장군 묘 시신이 없는 가묘로, 인근에 원균의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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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엉규이 무덤은 근래에 국도 77호선 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었다. 하지만 언론과 지역의 관심 속에 무덤이 있는 해당 구간이 변경되어 보존의 길이 열렸다. 따라서 이 기회에 해당 무덤이 정말 원균의 무덤이 맞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으며, 향후 칠천량 해전지와의 연계 등도 한번 고려해 볼 만하다.

한편 원균과 관련한 영상이나 기사 등을 보면 원균에 대한 인식과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 원균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을 궤멸을 불러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반면, 이순신 장군은 그런 궤멸된 조선 수군을 단시간에 수습해 단 13척의 함대로 승리했던 명량해전과는 무척 대비된다.

이러한 원균을 재평가라는 이름으로 무리하게 옹호하고 심지어 세금이 들어간 기념관을 짓는다고 했을 때 과연 대다수의 대중들이 이를 납득할 수 있겠는가? 더욱 원균에 대한 인식은 현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징비록>, <난중일기> 등 당시 남아 있는 대부분의 기록에서 교차 검증이 된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 <선조실록> 권99, 1598년(선조 31) 

원균과 관련이 있는 흔적이나 문화재를 전부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재평가라는 이름으로, 무리한 원균옹호론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처절한 반성과 교훈의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을 전제하지 않은 채 원균에 대한 재평가와 옹호론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이나 앞으로도 결코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 왜곡에 따른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태그:#통영 엉규이 무덤, #칠천량 해전지, #칠천량 해전공원, #원균, #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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