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9일 취임식을 가진 김영진 영진위원장

지난 1월 19일 취임식을 가진 김영진 영진위원장 ⓒ 영진위

 
"이명박 박근혜 시절의 영화진흥위원회도 아니고..."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의 여러 논란에 대한 한 영화인의 푸념이다. 개인적으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오명을 현재 영진위가 이어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사실 문재인 정부의 영진위가 이전 정권의 영진위와 비교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블랙리스트로 영화계를 탄압하던 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영진위가 이를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선임된 김영진 영진위원장의 임기가 3분의 1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 1월 12일 위원장으로 선임돼 19일 본격 업무를 시작한 지 4개월을 넘긴 것이다. 공식적인 임기가 2022년 1월 3일까지로 1년이 채 안 되는 영진위원장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초반 덕담이 오가며 재선임을 통해 임기 연장을 기대하는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 응원보다는 아직도 8개월이 남은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만큼 영화계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김정석 사무국장 문제다. 예전 전북독립영화협회에서 일할 당시 공금을 부당하게 유용한 전력이 드러나면서 김 사무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영화단체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그는 공금으로 룸살롱과 안마시술소 등을 이용했으면서도 처음에는 이를 부인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면서 거짓말 논란까지 일었다(관련기사 : 단란주점만 갔다더니... 영진위 사무국장 거짓말 '논란' http://omn.kr/1sukf).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공공기관의 사무국장으로서는 부적절 사유가 넘쳐나고 있지만, 안팎의 비판에도 영진위나 사무국장 모두 요지부동이다. 퇴진을 요구하는 영화단체들의 성명이 잇따라 나오면서 논란은 3개월째 진행중이다. 
 
김정석 사무국장을 옹호하고 있는 영화인들도 있다. 그러나 공금횡령 문제에는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는 듯 1년도 채 안 남았으니 그냥 넘어가자며 묵인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영화인들 간 분열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시네마서비스 이사를 역임한 이하영 피디는 "지금 영진위가 사무국장 문제로 분파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코로나로 힘겨워 하는 영화인들이 그들 눈에 안 보이는 탓인 것 같다"고 비판했다.
 
취임 3개월 만에 블랙리스트 징계자 복권
 
 지난 1월 광화문에서 혹한 속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 최낙용(전국예술영화관 협회), 조현기(전국예술영화관 협회)

지난 1월 광화문에서 혹한 속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 최낙용(전국예술영화관 협회), 조현기(전국예술영화관 협회) ⓒ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하지만 현재 영진위의 가장 큰 문제는 사무국장이 아니다. 블랙리스트로 징계를 받은 가해자들이 다시 본부장과 팀장을 맡은 것이야말로 사무국장 문제보다 엄중한 사안이다. 사무국장 문제에 가려져 있다 보니 뒤로 밀렸다(관련기사 : 영진위, 블랙리스트 징계자 본부장·팀장 임명 논란 http://omn.kr/1soi1).
 
사무국장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지만 블랙리스트의 경우는 국가범죄로 규정된 사안으로 가해자들을 원상복귀시킨 것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무게감이 다르다. 블랙리스트를 청산하겠다면서 철저한 진상조사와 시정조치를 약속했던 현 정부의 방침과도 어긋난다. 
 
전임 문체부 장관 때는 고위직에 남아 있던 인사들이 문화예술계의 반발로 보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는 점에서, 영진위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의 복권은 블랙리스트 문제 해결에 역행하는 처사다(관련기사 : 블랙리스트 관련자 주요 보직 임명에, 문화예술계 화났다 http://omn.kr/1k299).
 
단순히 블랙리스트 징계자 중 4명이 본부장과 팀장으로 임명된 것으로 한정해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나머지 징계자들의 보직 임명도 길이 열린 셈이 됐기 때문이다. 똑같은 블랙리스트 징계자인데, 누구는 보직에 임명하고 누구는 임명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으로,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기관의 대표를 역임한 한 영화계 인사는 "블랙리스트 문제로 징계받은 당사자들이 개인적으로야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있겠지만, 복권은 다른 문제"라며 "김영진 위원장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지난 2018냔 취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블랙리스트 문제에 사과하고 있는 오석근 영진위원장

지난 2018냔 취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블랙리스트 문제에 사과하고 있는 오석근 영진위원장 ⓒ 성하훈

 
전임 오석근 위원장의 경우 취임 후 3개월 만에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해 대신 사과했다. 그리고 관련자들을 징계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같은 자리에 오른 김영진 위원장은 취임 3개월 만에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을 원위치로 돌려놨다.
 
다소 이해가 어려운 상황은 전임 위원장 때 블랙리스트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된 과거사특위 활동이 미흡하다며 비판하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달이 넘도록 별다른 문제 제기가 나오지 않으면서 블랙리스트 징계자 복권 문제는 어물쩍 넘어가는 분위기다.
 
이에 대해 영화단체 관계자들은 "사무국장 문제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사안이 덮인 것 같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 제기 움직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독립영화관계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응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독립영화 창작자는 "일부 독립영화인들이 단체 차원의 대응을 요청한 상태다"라며 "공식논의가 늦어지거나 무산될 경우 독자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해 입장 발표를 하는 걸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지역의 한 영화인은 "사무국장 도덕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위원장의 입지가 약해지다 보니, 결국 블랙리스트 징계자들의 복권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영화관계자들 역시 김정석 사무국장 문제가 블랙리스트 징계자들에 대한 복권에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무국장 문제와 블랙리스트 징계자들 복권에 대한 영진위의 공식적인 입장은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일을 저질렀지만, 영화 정책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그가 적역"이고, "직원들의 역량을 고려해 가장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여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인사 논란에 대한 김영진 위원장의 일관된 인식이기도 하다.
 
"영진위원장 퇴진 목소리 나오면 동참할 것"

영진위 노조게시판에도 직원들의 비판이 잇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에 반대하며 현 위원장과 사무국장을 옹호하는 글도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진위의 한 내부관계자는 "내부 비판 의견을 흐리기 위해 올라온 듯한 글은 '영화단체들이 사무국장이 퇴진하면 조용히 있겠냐? 아마 더 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면서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 위원장과 사무국장의 생각을 엿보게 해 주는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 영화감독은 영화인 단체 대화방에 올린 글을 통해 "김영진 위원장에게 직접 전화해 영화계 분란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인사권은 내게 있다'라고 밀어붙이려는 의지가 강했다"면서 "문제는 위원장이 영화계와 진심으로 소통하려 하지 않은 점이고, 혼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김영진 위원장에게 있다. 퇴진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나온다면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해 당시 영진위원이었던 김영진 영진위원장과 일부 영진위원들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지역영화 교육허브센터 운영 사업' 재심사를 결정하며 심사 공정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 영화계 일부에서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촉구했으나, 이를 무시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무국장과 블랙리스트 징계자 복권 논란은 이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공정성과 도덕성, 블랙리스트 문제의식이 없는 3무 영진위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김정석 사무국장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시돈 전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바르지 못한 일을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잘못된 행위는 어떠한 이유라도 괜찮은 일이 될 수 없다"면서 "잘못 내린 결정이 불러올 책임은 영화인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영진위 김영진 블랙리스트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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