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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대부분은 '합리적 차별은 정의'라며 학벌 구조를 두둔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합리적 차별은 정의"라며 학벌 구조를 두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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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서, 가르친다는 건 아이들의 마음을 얻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들을 마음으로 감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자발적 실천을 기대할 수 없다. 고작 '공자 왈 맹자 왈'이거나, 교육이라는 이름의 강압이나 폭력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부끄럽지만, 지난 23년 동안 아이들을 만나오면서 끝내 설득을 포기한 게 하나 있다. 그들과 진지하게 대화도 나누고,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토론도 해봤지만, 끝까지 평행선만 달렸다. 학벌 문제가 그것이다. 아이들 대부분은 '합리적 차별은 정의'라며 학벌 구조를 두둔했다.

그 어떤 논리로도 그들의 생각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면 어느 누가 밤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하겠느냐는 질문 앞에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성만 전제된다면, 학벌은 노력에 대한 합리적 보상 시스템이라고 입을 모았다.

드물게 그 폐해를 문제 삼는 아이들도 하나같이 학벌 구조가 해체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고, 학벌만큼 확실한 '증명서'는 없지 않으냐는 거다. 더욱이 한 번 따면 평생 가는 남는 장사 아니냐며 되묻기도 했다.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셀러브리티(Celebrity)들과 부자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구매하는' 현실도 학벌이 영원할 거라 믿는 근거였다.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교수든 사장이든 대다수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는 없다. 선거철 후보자들의 이력에서 맨 첫 줄도 학벌 아니냐고 꼬집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 앞에서 괜한 소리를 했다가 욕만 먹었다.

고대 사태가 "심히 걱정된다"는 고대 출신 교사... 심드렁한 아이들

지난 19일 고대 세종 캠퍼스 학생이 본교 총학생회 임원으로 임명됐다가 본교 학생들의 반대로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세종 캠퍼스 학생을 향한 온갖 비하 발언이 쏟아졌다.

"요즘처럼 내가 고려대(아래 고대) 출신이라는 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단지 지방 캠퍼스에 다닌다는 이유로, '예전 같으면 말도 못 섞었을 천민'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대학생을 과연 지성인이라 할 수 있을까. 저들이 학벌 구조에 기대어 행세하게 될 우리의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뭐 이런 것도 기삿거리가 되느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표현이 다소 거칠었을 뿐, 틀린 말은 아니잖으냐는 거다. 세종 캠퍼스의 학생을 고대생이라고 부른다면, 서울 캠퍼스에 다니는 학생에 대한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내가 본교 졸업생이니 그렇게 토를 달 자격이라도 있는 거라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지방 캠퍼스 출신이라면 속으로 분을 삭여야지 밖으로 표출한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랬다간 대번 '아니꼬우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로 오지 그랬냐'며 비난을 받게 될 거라고 했다.

한 아이는 애초 지방 캠퍼스 학생이 본교 총학생회 임원 자리를 사양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름만 같을 뿐 아예 다른 학교라는 인식이 재학생들 사이에 팽배한 상태임을 모르진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총학생회 임원이면 고대생 흉내 내기도 쉬웠을 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번 사달의 책임은 본교 총학생회 임원을 '넘본' 지방 캠퍼스 학생에게 있다는 데 대부분이 동의했다. 언론마다 '학벌주의와 특권의식에 찌든 고대생'이라며 손가락질하지만,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저 '정의로운 척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서울과 지방 캠퍼스 재학생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별도로 지방 캠퍼스를 둔 대학마다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겪고 있는 현실이다. 다만, 수십 년 동안 두 곳 재학생들 사이의 학벌주의와 차별의식이 완화되기는커녕 외려 더 심해진 듯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30년 전과 지금

30년 전 재학 시절에도 본교와 분교를 구분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본교는 고대로, 분교는 '조려대(조치원+고려대)'로 통칭하자는 주장이었다.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됐지만, 당시에는 행정구역이 조치원이어서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였다. 연세대도 원주 캠퍼스를 '원세대(원주+연세대)'라며 낮잡아 불렀다.

졸업장에 지방 캠퍼스 출신임을 적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심지어 본교 시설을 이용하는 데 제약 조건이 필요하다는 강퍅한 주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본교 재학생들의 반발이 훨씬 거셌다. 학벌주의에서 비롯된 명백한 차별이라며, 지성인답지 못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본관.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본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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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공공연히 차별을 조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상경 집회 때 만나게 되면 이물 없이 어울렸고, 학벌로 인한 갈등이 낄 자리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만남은 대입 시험의 성적이 인간의 품격과 역량 등과는 무관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됐다.

"굳이 인간을 평가하고 줄 세워야 한다면, 그 기준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품격과 역량에 둬야 옳지, 그깟 대입 시험 성적으로 얻게 되는 학벌을 잣대로 삼으면 되겠니?"

이 말 또한 아이들에겐 공허한 이야기다. 대답 대신에 만약 품격과 역량을 정확히 판별해낼 수 있는 시험 제도가 발명된다면 노벨상을 받게 될 거라며 비아냥거렸다. 지금의 선다형 시험 제도가 최선이 아니라는 건 그들도 인정하지만, 그보다 공정한 건 아직 없다고 믿는다.

"선생님,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면, 천신만고 끝에 명문대에 합격한 사람들은 대체 무엇으로 보상을 받나요? '부모 찬스'를 활용하려는 파렴치한 이들만 걸러낼 수 있다면, 학벌을 두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이번 일도 혐오 표현이 문제인 거지, 학벌이 문제는 아니죠."

학벌에 따른 차별을 보상이자 권리로 여기는 아이들 앞에서, 예나 지금이나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학벌 구조는 고정 상수로 두고, 차별의 정도를 완화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고대생의 특권의식을 질타하는 데에 고대 출신이라는 게 방해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선생님,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면, 대체 무엇으로 보상을 받나요?"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기는커녕 학생이 고객인 기업이다. 공부에 뜻이 있다면, 차라리 유럽 등지로 유학 가라." 2020년, 고3을 가르칠 때 입버릇처럼 건넸던 이야기다. 코로나로 인해 민낯이 드러난 우리 대학의 현실은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기필코 내 대학 후배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당황스러웠던 건, 그들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스스로 자극하는 방법이 특이했다는 점이다. 스터디그룹을 만든다거나 사교육을 더 받겠다는 게 아니었다. 정신력이 해이해질 때마다 유튜브를 본다고 했다.

그들에게 공부의 의지를 북돋우는 유튜브란, 다름 아닌 고대 응원단의 영상이었다. 응원단의 화려한 복장과 절도 있는 동작과 응원곡을 목이 터져라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뛴다고 했다. 카페인 음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졸음 방지제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도 자주 듣다 보니 웬만한 노래와 동작은 따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1년 뒤 저 인파 속에 자신이 있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신나고 가슴 설렌다고 했다. 설령 올해 실패한다고 해도, 응원단 영상만 볼 수 있다면 재수, 삼수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칫 자신도 모르게 학벌주의와 특권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혀끝에서는 이 말이 맴돌았지만, 차마 그들에게 건네지 못했다. '예능을 다큐멘터리로 받는다'거나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라며 대꾸할 게 뻔해서다. 학벌 이야기는 늘 평행선만 달렸으니 말이다.

헛심일까

요컨대, 학벌 구조를 혁파할 힘이 학교에는 없다. 그래도 예전에는 아이들도 '지잡대'라는 명명이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한목소리를 냈는데, 요즘 들어서는 일상적인 '보통명사'가 됐다. 지방의 사립대라고 풀어 말하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학벌주의는 아이들과 토론할 주제가 더는 아니다. 지방 캠퍼스 학생에게 '예전 같으면 말도 못 섞었을 천민'이라고 막말을 해도 '표현이 좀 과했네' 정도로 넘어가는 현실 앞에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차라리 '천민' 대우를 감내하라고 다독이는 게 남은 역할인지도 모른다.

사족 하나. 앞으로는 학벌 이야기로 헛심을 쓰는 대신,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싶다. 그런다고 명문대 진학을 향한 무한경쟁이 수그러들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학벌에 기대지 않고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주위에 적지 않다는 걸 안다면, 경쟁에 찌든 아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내가 존경하는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 두 분 모두, 알다시피 고졸 출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인 서태지와 아이유, 최백호 모두 고등학교를 중퇴했거나 대학 진학을 거부한 이들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인 정우성도 고졸 출신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을 안다면, 아이들도 온존한 학벌주의의 폐해에 대해 곱씹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태그:#학벌주의, #고대 총학생회, #고대 세종 캠퍼스, #고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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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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