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90년대 한국 영화에는 유난히 시리즈물이 많았다. <애마부인>이나 <산딸기> 같은 성인물, <우뢰매>같은 아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멜로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나 만화 원작의 <공포의 외인구단>도 어김없이 속편이 제작됐다. 심지어 영화 막판에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같은 영화도 속편이 만들어졌다(물론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는 전편과 세계관이 전혀 다르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영화의 속편 제작은 상당히 위축됐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드물다'는 영화계의 격언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면서 전편의 영광에 기대 든 속편 영화들이 대거 쓴 맛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여고괴담> 시리즈와 함께 무려 5편이나 제작된 장수 시리즈 영화가 있다. 바로 5편 합쳐 1760만 관객을 모은 '가문 시리즈'다. 이 시리즈가 완성도와는 별개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는 시리즈 영화로 군림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시 코미디와 가족드라마, 멜로의 정서가 적절히 섞인 1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가문의 영광>은 조폭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 멜로를 적절히 조합하며 2002년 추석 시즌 극장가를 지배했다.

<가문의 영광>은 조폭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 멜로를 적절히 조합하며 2002년 추석 시즌 극장가를 지배했다. ⓒ 시네마 서비스

 
한 시대를 풍미한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배우 김정은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김정은은 건강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드라마와 영화, CF를 넘나들며 맹활약했다. MBC 공채 25기 탤런트로 데뷔한 김정은은 1998년 드라마 <해바라기>에서 차태현의 오진으로 삭발을 하게 되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가발이 아닌 실제 삭발을 단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당신 때문에>, <남과 여>, <여인천하>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그는 2002년 패러디 영화 <재밌는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사실 <재밌는 영화>는 대놓고 패러디에 주력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김정은의 매력을 알리기엔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같은 해 정준호와 함께 <가문의 영광>에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김정은이 여수의 전설적인 조폭 두목 장정종(박근형 분)의 막내딸 역으로 열연을 펼친 <가문의 영광>은 전국 52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 해 추석 시즌을 점령했다. 서울 법대 출신의 벤처기업 사업가로 변신한 정준호를 비롯해 박근형의 아들로 출연한 유동근, 성지루 등의 활약도 빛났지만 <가문의 영광>을 대박으로 이끈 배우는 단연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은 <가문의 영광>으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인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연말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로 유명한 CF를 통해 대세스타로 떠오른 김정은은 차기작 <나비>, <불어라 봄바람>이 만족스러운 성적을 올리지 못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듯 했다. 하지만 2004년 박신양과 함께 출연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시청률 50%를 돌파하며 '초대박'을 터트렸고 김정은은 2004년 SBS 연기대상(박신양과 공동수상), 2005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김정은은 이후 영화 <사랑니>,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드라마 <나는 전설이다> 등에서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김정은이 출연했던 몇 작품이 시청률에서 고전하기도 했지만, 그는 지난해 드라마 <나의 위험한 아내>에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조폭 코미디와 가족드라마, 멜로의 절묘한 조합
 
 김정은(왼쪽)은 커리어 두 번째 영화였음에도 능청스런 연기로 영화의 웃음포인트를 책임졌다.

김정은(왼쪽)은 커리어 두 번째 영화였음에도 능청스런 연기로 영화의 웃음포인트를 책임졌다. ⓒ 시네마 서비스

 
<가문의 영광>이 개봉한 2002년 추석 시즌에 대한민국에서 조폭 코미디는 이미 끝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미 앞선 2001년 '조폭 코미디의 삼대장'이라 할 수 있는 <조폭마누라>, <두사부일체>, <달마야 놀자>가 극장가를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에 <가문의 영광>은 '아류' 혹은 '후발주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영광>은 5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기존의 조폭 코미디 영화들을 능가하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문의 영광>은 조폭 집안에도 평범한 막내딸이 있고 무서운 조폭들도 막내딸 앞에선 순한 아버지, 오빠가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조폭 코미디가 가지고 있는 웃음코드에 가족애가 들어가고 여기에 대서(정준호 분)와 진경(김정은 분)의 달달한 멜로라인까지 첨가한 것이 <가문의 영광>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이었다.

정준호, 유동근, 성지루 등 검증된 남자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가문의 영광>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배우는 단연 김정은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을 먹는 대서를 보며 "집에서 무슨 양계장하세요? 저는 삶은 계란 안 먹어요"라며 내숭을 떨던 진경은 대서가 잠이 든 사이 몰래 혼자서 계란을 먹는다. 특히 대서가 잠에서 뒤척일 때 입 안에 계란을 가득 머금은 채로 자는 척 하는 김정은의 귀여운 연기는 단연 일품이었다.

여수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진경은 평소엔 서울말을 매우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화가 나거나 흥분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 나온다. 대서가 막내오빠(박상욱 분)에게 욕을 먹을 때나 도도한 대서의 여자친구(이서연 분)를 제압할 때 주로 사투리를 구사한다("그려! 우리 집안 깡패여, 어쩔 것이여!"). 상당히 걸쭉한 욕설과 사투리를 내뱉은 후 곧바로 얌전하게 돌변하며 주변 눈치를 살피는 것도 큰 웃음 포인트다. 

영화의 무게중심을 잡아준 대배우 유동근
 
 3J 삼형제는 무서운 조폭이지만 막내동생 진경을 아끼는 마음은 여느 가족들과 다르지 않다.

3J 삼형제는 무서운 조폭이지만 막내동생 진경을 아끼는 마음은 여느 가족들과 다르지 않다. ⓒ 시네마 서비스

 
드라마나 CF쪽에선 잘 나가는 스타였지만 김정은에게 <가문의 영광>은 두 번째 영화 출연작에 불과했다. 정준호도 <두사부일체>를 히트시켰지만 아직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갈 경험 많은 배우는 아니었다. 이런 영화엔 경험 많은 조연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가문의 영광>에서는 이 역할을 대배우 유동근이 해줬다. <가문의 영광>은 개봉 당시에도 중·장년층의 관객들에겐 주인공보다 더 익숙한 배우 유동근의 스크린 나들이가 더 화제가 됐다.

유동근이 연기한 장인태는 여수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3J파'의 장남으로 대서와 진경의 스캔들(?)을 설계한 인물이다. 다짜고짜 대서를 찾아가 마구 구타하다가도 '박서방'이라 부르며 대서를 끔찍이 아끼는 모습도 보인다. 특히 마지막 결혼식장 패싸움에서는 결혼식을 망치러 온 상팔(이기영 분)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정하는 가족애를 보이기도 했다. <가문의 영광>에서 열연을 펼친 유동근은 그 해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가문의 영광> 개봉 당시를 기준으로 잡아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 3회, KBS 연기대상 1회의 수상경력을 가진 유동근은 딱히 설명이 필요 없는 거물 배우다. 특히 태조 이성계(<정도전>)와 태종 이방원(<용의 눈물>), 수양대군(<파천무>), 흥선대원군(<명성황후>) 등 사극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우다. 따라서 <가문의 영광>의 코믹한 장남 장인태는 유동근에게도 제법 큰 연기 변신이었다.

대한민국의 원조 꽃미남 배우이자 <꽃보다 할배>에서 '로맨틱 순정남' 캐릭터를 얻은 원로배우 박근형은 3J의 닉네임을 탄생시킨 '전설의 주먹' 장정종 회장을 연기했다. 사실 <가문의 영광>은 조폭들의 다툼보다는 대서와 진경의 로맨스에 더 주목한 영화라 액션 장면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장정종 회장 역시 세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나 알까기에 심취한 모습이 더 자주 나온다(그나마 액션이 나오는가 싶을 땐 영화가 끝나 버린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가문의 영광 김정은 정준호 유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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