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학교 복도에 설치한 김평용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억벽
ⓒ 서부원

관련영상보기

 
나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의 모교에 근무하고 있다. 그 인연으로 해마다 오월이면 5.18 묘역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사적지 답사와 해설을 소명처럼 여기며 지내고 있다. '오월을 위해 태어난' 윤상원 열사의 불꽃 같은 삶을 스승으로 삼고 있어서다.

학교엔 김평용 희생자도 있다. 5.18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5월 24일 귀갓길에 계엄군의 총에 학살된 후 암매장당한 뒤 가까스로 시신이 수습됐다. 김평용 희생자와 같이 당시 학살당한 사망자 중 광주 관내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은, 지금까지 모두 16개 학교의 1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은 지난 2015년부터 5.18 당시 학살당한 학생들에 대한 추모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5.18을 비롯해 현대사에 무관심한 요즘 세대에게 역사의식과 공감 능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당시는 한창 '일베'가 준동하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던 때였다.

교정에 윤상원 열사의 흉상이 세워진 건 오래 전이지만, 김평용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억의 벽이 설치된 건 시교육청의 지원 덕분이다. 그곳에서 5.18 작은 음악회 등 추모 행사를 열면서 상징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젠 윤상원 열사처럼 김평용 '선배'를 모르는 아이들은 없다.

시교육청의 지원과 지속적인 교육의 힘이다. 한 분은 열사로, 다른 한 분은 희생자로 불리긴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굳이 아이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현재 묘역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에서는 모두 '민주유공자님'으로 호칭을 통일하고 있다.

기억할 의무 

5.18 추모 주간인 지금, 당시 희생된 학생 희생자들을 주제로 계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내친김에 다른 학교의 희생자도 두루 소개하기로 했다. 당시 계엄군에 의해 고립된 광주에서 내 학교, 네 학교 따졌을 리 없다. 세월이 흘러 해당 학교의 후배가 선배를 기리기 위한 것일 뿐,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건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의무다.

18명의 희생자 중 어느 분부터 소개해야 하나 멈칫하게 된다.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순서를 정하는 것조차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름의 가나다순이 좋을까. 사망 당시의 나이순으로 소개할까. 그도 아니면 사망 당시의 날짜를 기준으로 삼을까.

그들의 희생을 통해 열흘간의 항쟁 기간을 살펴볼 수 있다면, 사망일 순이 계기 수업에 가장 적절할 듯싶다. 굳이 수업 내용을 여기에 남기는 건, 1980년 당시 그들과 지금의 또래 아이들을 대조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물론, 교사로서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참고로, 희생자 이름 뒤 괄호 안에 그들이 잠든 묘소의 번호를 적어둔다. 앞의 숫자는 국립 5.18 민주 묘지 내 묘역의 번호이고, 뒤의 숫자는 해당 묘역 내 묘의 번호다. 나중 그곳에 가시거든, 묘비 옆 교복 차림의 앳된 얼굴들 앞에서 발길을 잠시 멈춰주십사는 부탁에서다.

당시 중3이었던 박기현(1-8)님은 5월 20일 계엄군의 폭행으로 희생됐다. 작고 날랜 몸집에 시위대의 연락책이었으리라는 억측만으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고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의 묘비에는 '못다 핀 젊음이 묘지 앞 민들레로 피어나길' 바라는 애틋한 모정이 새겨져 있다.

같은 나이였던 김완봉(1-18)님과 박창권(1-32)님, 고3이었던 전영진(1-51)님, 고2였던 이성귀(2-20)님과 김기운(4-95)님 등 다섯 분은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희생됐다. 애국가를 발포 명령 삼아 시민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그때다. 그들 중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도 있지만, 어머니와 친구가 걱정돼 거리에 나왔다가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다.

박창권님은 열여섯 나이에 '비상계엄 철폐' 구호를 외쳤고, 전영진님은 전날 계엄군에 폭행당한 뒤 가족 몰래 시위대에 합류해 '독재 타도'를 외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전영진님은 5.18 기념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박석무 선생의 제자이며,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신임 당대표의 같은 반 친구였다. 그의 묘 앞에는 스승과 친구가 가져다 놓은 꽃이 놓여 있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금희 님, 박기현 님, 김완봉 님, 박창권 님, 전영진 님의 묘.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금희 님, 박기현 님, 김완봉 님, 박창권 님, 전영진 님의 묘.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같은 날 숨진 박금희(1-26)님은 계엄군의 야만성을 증명한 사례다.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시민들을 위해 헌혈한 뒤 병원을 나서는 순간 헬기의 기총 소사에 의해 사망했다. 그의 모교에서는 해마다 오월이면 헌혈 캠페인을 전개하며 선배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고 있다.

모른 척 갈 수 없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기운 님, 박현숙 님, 황호걸 님, 양창근 님, 이성귀 님의 묘.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기운 님, 박현숙 님, 황호걸 님, 양창근 님, 이성귀 님의 묘.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1, 2묘역에 오순도순 모여 잠든 다른 분들과는 달리 김기운님의 묘는 4묘역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지만, 공교롭게도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 열사들의 묘 옆자리다. 찾는 이 없는 그들과 나란히 어깨동무한 채 위로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고1이었던 양창근(1-38)님은 5월 22일 옛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항쟁 마지막 날 도청에서 총에 맞아 숨진 문재학(2-34)님의 친구로, 그가 끝내 도청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는 어머니의 애끓는 만류를 뿌리치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문재학님은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머니, 창근이가 총에 맞아 죽어서 바닥에 드러누워 있어요. 관에도 담을 수 없는 지경인데, 어찌 모르는 척 그냥 놔두고 가겠습니까."

두 달 뒤 첫 출근을 앞두고 있던 고3 박현숙(2-3)님과, 같은 나이의 시민군이었던 황호걸(2-13)님은 계엄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회자되는 주남 마을 버스 총격 민간인 학살 사건의 희생자다. 시신을 수습할 나무 관을 구하기 위해 화순을 향해 가다 화를 입었다. 둘을 포함해 당시의 피해자는 모두 33명으로, 22구의 주검은 아직 행방조차 묘연한 상태다.

두 분의 집은 상급 학교 진학을 꿈조차 못 꿀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박현숙님은 상업계고를 선택했고, 황호걸님은 그마저도 어려워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서 배움을 이어나갔다. 이웃의 고통에 나몰라라 하지 못했던 이유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방광범 님, 김부열 님, 김평용 님, 전재수 님, 김명숙 님의 묘.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방광범 님, 김부열 님, 김평용 님, 전재수 님, 김명숙 님의 묘.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당시 중1이었던 방광범(2-18)님은 5월 24일 동네 친구들과 저수지에서 멱감고 놀다가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숨졌다. 유효 사거리라면 어른인지 아이인지 식별이 가능했을 테지만, 피에 굶주린 야수들에겐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묘비 옆 영정 사진 속 교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유난히도 앳되다.

같은 날 숨진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2-22)님은, 지금 소개하고 있는 학생 희생자 중 가장 어리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다 고무신이 벗겨져 주우러 돌아서는 순간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열흘 전 그의 생일 때 어머니로부터 고무신을 선물 받았는데, 오래 신으라고 너무 큰 걸 사준 게 화근이 된 셈이다.

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평생 자책했다. 아버지는 그때 시끄럽다며 집 밖에 나가서 놀라고 다그치지만 않았어도 총에 맞지 않았을 거라고 한탄했다. 최근 그의 사진이 발견되어 묘비 옆에 새겨졌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그의 얼굴에 총을 겨눴다는 게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다.

고3이었던 김부열(2-29)님은 계엄군에 맞서 총을 든 시민군이었다. 그는 5월 24일 계엄군이 도시 외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추격하다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야산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목과 팔 등이 잘리고 난도질당한 상태로 수습되었다. 사타구니에 있는 점으로 신원을 확인했을 정도였다. 그는 '폭도'로 낙인찍혀 유가족에 지급되던 위로금조차 받을 수 없었다.

중3이었던 김명숙(2-28)님은 항쟁 마지막 날인 27일 친구에게 책을 빌리러 집을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딸의 황망한 죽음을 애통해할 겨를도 없이, 그의 부모는 성마른 이웃들이 찧어대는 입방아에 내내 시달렸다. 딸의 목숨값인 보상금이 도리어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삶을 옥죈 셈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종필 님, 박성용 님, 문재학 님의 묘. 항쟁 마지막 날 도청을 지키다 총에 맞아 숨진 분들로, 묘비 앞에 '도청의 최후를 지킨 15인의 전사들' 팻말이 별도로 놓여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종필 님, 박성용 님, 문재학 님의 묘. 항쟁 마지막 날 도청을 지키다 총에 맞아 숨진 분들로, 묘비 앞에 "도청의 최후를 지킨 15인의 전사들" 팻말이 별도로 놓여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문재학님과 함께 도청에서 삶을 마감한 안종필(2-41)님과 박성용(2-37)님은, 모두 친구들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끝내 도청을 떠나질 못했다. 고1이었던 문재학님과 안종필님은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고, 박성용님은 대학 진학을 앞둔 고3이었다.

이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은 총을 드는 대신 항쟁 마지막 날까지 시신을 닦고 관에 안치하거나 부상자들을 옮기고 돌보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이 친구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라 여기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이들은 모두 27일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그들의 묘비 앞에 '도청의 최후를 지킨 15인의 전사들'이라는 영예로운 팻말이 놓인 이유다.

존칭을 생략하고 열여덟 분의 이름을 다시 떠올려본다. 박기현, 김완봉, 박금희, 박창권, 전영진, 이성귀, 김기운, 양창근, 박현숙, 황호걸, 방광범, 전재수, 김평용, 김부열, 김명숙, 문재학, 안종필, 그리고 박성용. 교사로서도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교육의 본령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아이들이 5.18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면? 이는 아이들에게 묻기 전에 교사를 비롯한 기성세대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저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 여야의 주류 정치인들과 동년배다. 저들의 숭고한 희생에 지금 권력을 틀어쥔 '또래'들은 과연 보답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태그:#5.18 민주화운동, #국립 5.18 민주묘지, #5.18 학생 희생자, #소년이 온다
댓글10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